이젠 헌 옷도 팔리지 않는 동묘 구제시장의 주름살 [그림자 밟기]

홍승주 기자 2024. 12. 11. 10:0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스쿠프 홍기자의 그림자밟기
침체해 있는 동묘 구제시장
경기 침체로 의류 소비 안 해
헌 옷 감소로 구제 옷도 줄어
‘팔 만한 제품’ 찾는 것도 어려워
온라인 중고시장 활성화도 이유
예전의 활력 되찾을 수 있을까

헌옷을 다듬어서 값싸게 파는 동묘 구제시장. '빈티지'가 인기를 끌던 3~4년 전만 해도 젊은층에게 핫플레이스로 통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구제舊製 옷을 팔지만, 손님이 도통 찾아오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헌옷'을 내놓는 사람들도 줄어서 '팔 만한 제품'을 찾는 것도 어렵다. 시장 구석구석까지 내려앉은 침체의 그림자를 동묘 구제시장에서 쫓아가봤다.

동묘 구제시장에는 알록달록한 '구제 옷 무덤'이 있다.[사진 | 더스쿠프 포토]

3일 오후 2시. 지하철 1ㆍ6호선 동묘앞역 3번 출구로 나오자 길가에 쌓여있는 알록달록 '구제舊製 옷 무덤'이 보인다. 사람들은 그 위에 올라가 이 옷 저 옷을 손으로 낚아채며 매의 눈으로 상태를 살핀다.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았다면, 1000~5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옷을 구매할 수 있다.

옷 무덤과 가판대가 늘어서 있는 큰길은 평일인데도 어르신과 젊은이가 뒤섞인 인파가 꽉 채우고 있다. 골목 골목에는 가게 밖과 안을 구제 옷으로 가득 채운 가게들이 빼곡하다. 이곳은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묘 구제시장이다.

얼마 전 수능을 치른 오건희군은 '1장 6000원, 2장 1만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은 한 구제 옷 가게에서 친구들과 함께 옷을 고르고 있다. 건희군은 "수능을 끝내고 옷을 사고 싶은데 백화점은 너무 비싸 구경도 할 겸 동묘에 왔다"며 "이곳은 백화점 옷 가격의 10분의 1이다"고 말했다.

동묘 구제시장은 여러 예능 방송에서 '빈티지 명소'로 소개하면서 2030세대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하지만 활기가 넘쳤던 몇년 전과는 다르게 침체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30년간 동묘시장에서 구제옷을 팔고 있는 송경아(가명ㆍ60) 사장의 가게. 이곳은 8000~1만원대 셔츠, 2만원대 바지를 파는 수입 구제 가게다. 신상품과 비교해 싼 가격이지만 요즘은 이마저도 팔리지 않는다.

송 사장은 "하루 종일 구경하러 온 손님만 있을 뿐, 옷 1장을 팔까 말까다"며 "동묘도 이제 끝물인 것 같다"고 털어놨다. "바쁠 때는 점심밥을 사 먹었는데, 요즘은 돈도 없고 시간도 많아서 집에서 싸 가지고 다녀요. 그만큼 손님이 없다는 거죠." 24년간 가게를 꾸려 온 김순자(64) 사장도 "팬데믹 때보다 더 힘들다"며 "주 고객층인 어르신들이 돈이 없으니 밖으로 나와 옷을 사지 않는다"고 전했다.

동묘시장의 특색인 옛날 비디오, LP 음반, 소품 등도 팔리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비디오와 옷을 팔고 있는 상인 김원식(61)씨는 "옛날 비디오들은 가게에 레트로한 분위기를 내려는 자영업자들이 사가곤 했다"며 "요즘은 자영업자들도 사정이 힘들어서 그런지 도통 팔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시장이 이렇게 침체한 가장 큰 이유는 시민들의 의류 소비가 크게 줄어서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과 가계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 3분기 가구당 월평균 의류ㆍ신발 지출은 전년 동기보다 1.6% 감소한 11만4000원으로 나타났다.

월평균 소비지출(290만7000원)에서 의류ㆍ신발이 차지하는 비중은 3.9%로, 역대 가장 작은 수준이었다. 2014~2016년엔 7~8%대를 찍었고, 2023년 4분기에도 6.0%였던 의류ㆍ신발 비중이 3%대로 곤두박질친 건 경기침체의 단면으로 봐야 한다. 침체가 길어지면 소비자는 생필품 등 꼭 필요한 것 이외의 소비부터 줄이기 때문이다.

우석진 명지대(경제학)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경기침체가 찾아오면 소비자들은 몇 년씩 쓸 수 있는 준내구재인 의류 소비를 먼저 줄이곤 한다. 소득이 줄어드니 새 옷을 안 사고 과거의 옷으로 버티는 것이다."

구제 옷을 사는 사람도 지갑을 닫았지만, '헌 옷'을 팔던 사람이 사라진 것도 이곳의 침체를 부채질하는 이유다. 상인 김슬기(54)씨는 이렇게 말했다. "전국에서 버려지는 옷들은 수거업체가 일정한 공장 같은 공간에 모아요. 저도 새벽이면 파주와 일산에 있는 그곳에 가서 구제옷을 사오죠. 그런데 그곳에 있는 옷들이 평소보다 20~30% 줄었어요. 신발과 명품도 확연히 줄어 '팔 만한 것'들을 가져오기도 어려워졌죠." 새로운 옷들이 예전보다 적게 수혈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수혈이 부족하니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동묘 구제시장이 침체에 빠진 이유는 또 있다. 온라인 중고시장이 커졌다는 거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중고거래앱 '당근'은 해마다 거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강민국 의원실(국민의힘)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당근마켓 거래규모는 2021년 5100만건에서 2022년 5900만건, 2023년에는 6400만건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거래 금액 역시 같은 기간 2조9000억원, 4조3000억원, 5조1000억원으로 큰폭으로 늘어났다.

상인 이건호(33)씨는 "젊은 사람들이 좋은 중고 제품들을 온라인에서 거래하니, 구제시장까지 좋은 질의 제품이 오기가 힘들다"고 설명했다. 빈티지 업계 관계자는 "최근 빈티지 제품은 온라인 판매가 유행이다"며 "인스타 라이브나 빈티지 전문 온라인 플랫폼에서 많은 매출이 나온다"고 귀띔했다.

올 3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에서 의류ㆍ신발이 차지하는 비중은 3.9%로, 역대 가장 작은 수치를 기록했다.[사진 | 연합뉴스]

상황이 이런데도 동묘 구제시장은 점점 더 벼랑으로 밀리고 있다. 공장에서 떼오는 구제옷 자체도 값이 올랐기 때문이다. 몇몇 가게는 마진을 조금이라도 남기려 판매가격을 올렸지만, 부메랑만 날아들고 있다.

브라질에서 온 길레이(24)는 "긴팔 티셔츠와 겨울 코트를 하나씩 샀더니 6만5000원이 나왔다"며 "신상품을 파는 매장에 비하면 싼 가격이지만, 지갑에 부담이 안 될 정도는 아니어서 하나씩만 샀다"고 말했다.

오후 6시,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할 무렵 한 가게에서 흥정이 벌어졌다. "2만원에 주세요." "안돼요. 우리도 사정이 어려워요. 2만5000원에서 못 깎아요." 경기 침체 타격을 맞은 구제시장과 그곳에서조차 마음껏 쇼핑할 수 없는 시민들. 동묘 구제시장은 예전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홍승주 더스쿠프 기자
hongsam@thescoop.co.kr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