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갈아넣는' 시대 종말…의대증원 철회만으론 복귀 안해"
“내년도 의대 증원을 백지화한다고 해서 떠난 전공의들이 돌아오진 않을 거에요. 전공의들을 갈아 넣는 시대는 끝났어요. 진료수가, 의료사고 등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돌아올 겁니다. 이건 국민을 위한 것이기도 해요. 수가를 현실화하고 의사 보호시스템이 갖춰지면 의사의 의욕, 사기, 사명감이 올라가면서 방어 진료 대신 소신 진료를 할 수 있게 되죠. 병원은 수가 보전을 위해 감기 환자를 보는 대신 중증환자에 집중하게 될 겁니다.”
2일 만난 김태경 토론토대 영상의학과 교수는 현재 의료사태에 대해 이같이 진단했다. 김 교수는 해외에서 21년간 의사 생활을 하며 한국의 현 상황을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목도할 수 있다. 김 교수는 1996년 전공의를 마치고 2000년까지 서울대병원에서 근무하다가 교수가 된 뒤 서울아산병원에서 일했다. 2003년부터 현재까지는 캐나다에서 의사 생활을 하고 있다.
김 교수는 “캐나다에서 의사를 하고 있지만 한국 의료의 급격한 발전을 함께 했던 행복한 기억이 있고 단시간 세계 최고에 이른 한국 의료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그런데 올해 초 비과학적인 의대 증원 결정과 전공의 사직 소식을 들으면서 엄청난 사태가 벌어졌음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오랫동안 곪은 염증이 이제야 터진 것으로 의대 증원을 철회해도 전공의 복귀를 유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의료 시스템이 수십년간 여러 정권을 거치며 개선되지 않고 유지돼 오다가 2000명 의대 증원이라는 ‘이상한 모양새’로 터졌다는 해석이다.
● 의대 증원 이슈가 본질 가려...수가·의료사고 해결이 ‘진짜 본질’
김 교수는 정부가 의료 전문가들과 의정협의체를 꾸린 뒤 충분한 시간을 들여 국내외 자료들을 모으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실정에 맞는 지속가능한 의료시스템에 합의한 후 이에 입각해 적절한 증원 규모를 과학적으로 계산해야 한다”며 “현 방식은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의료시스템을 정상화하기 위해 ‘필수의료 정책패키지’를 내놓았다. 필수의료 수가 인상, 의료사고 부담 완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긴 하지만 김 교수는 내용이 모호해 ‘안 쓴 것만 못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의사들은 기본적으로 과학자들이기 때문에 모호한 결정을 싫어하고 땜질식 처방도 싫어한다”며 “과학적인 처방이 필요한데 필수의료 패키지를 읽어보면 근거가 불분명하고 두리뭉실해 회의 요약본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모호한 말은 정책 집행 시 상황에 따라 유리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구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급조된 의대 증원 정책과 필수의료 패키지는 취소하고 한국 실정에 맞는 이상적인 의료시스템의 청사진을 구체적인 타임라인과 함께 제시해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생각이다. ‘진료 수가 현실화’와 ‘의료사고 배상제도 개선’이 가장 시급한 현안이라고 보았다. 의대 증원 이슈로 흐려진 진짜 본질은 이 두 가지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땜빵식으로 재원 몇조 또는 몇십조를 이과 또는 저과에 쓰겠다는 식이 아닌 의정협의체를 통한 오랜 공부와 연구를 통한 수가가 정해져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국민에게는 의료비 증가, 건강보험료 인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잘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적정 수가가 정해지면 적자를 메우기 위해 과잉검사, 과잉진료를 하는 위험이 줄기 때문에 의료비 증가 폭은 걱정하는 것만큼 커지지 않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수가 해결과 더불어 정부가 시급히 관여해야 할 부분은 의료사고로부터 필수의료 의사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령 한국은 산모 10만명 당 11.8명이 사망한다. 고령임신이 많은 한국에서는 특히 산모 사망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 교수는 “의사 과실이 입증되지 않더라도 산모 사망에 수억원의 배상료를 의사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면 산부인과 의사를 하려는 의료인은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다”며 “캐나다는 의사들이 방어 진료 대신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도록 무과실에 대해선 주정부가 의료사고 배상 보험료의 80%를 보조하고 있다. 성적인 범죄나 고의적인 범죄가 아니라면 형사처벌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정부, 권한·명령 남발하면 안 돼...의료계 자정 노력도 필요
정부는 의사들에게 단일한 목소리를 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직역 간 이해관계 차이로 모든 의사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김 교수는 필수의료 전문가들의 의견에 우선적으로 귀를 기울여줄 것을 당부했다.
김 교수는 “전공의 사직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진 곳들은 필수의료를 담당하고 있는 큰 수련병원”이라며 “전공의가 없는 병원들과 의원들은 타격을 입지 않아 상대적으로 이번 사태에 대한 관심이 적고 의료사고 위험성이 적고 비보험 진료가 많은 병원들도 이번 사태와 큰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며 “필수의료는 소수의 중증환자에게만 필요하지만 중증질환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닥칠 수 있고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건강보험의 큰 목적이므로 수가 체계 등에서 필수의료 전문가 이야기를 더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전문가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건 선진국답지 못한 일이라고도 지적했다. 김 교수는 “정부가 전문가 의견을 충분히 듣지 않은 채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지고 수많은 명령을 남발하는 것이 일상화됐다”며 “특정 기관의 자율성도 부정하고 있는데 이런 행위들은 선진국에서는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자율성이 부정 당하는 특정 기관은 의대 적합성을 평가하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을 의미한다. 최근 정부는 의평원이 의대 학사 운영 ‘불인증’을 내리지 않도록 의대에 1년 이상 보완 기간을 주는 법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의료계는 정부가 대규모 의대 학사 운영 불인증을 피하려고 의평원 기능을 무력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는 물론 의료계 또한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 사직 전공의가 근무 중인 의사 명단을 블랙리스트화한 혐의로 구속 송치된 사건과 관련해 김 교수는 “명백한 잘못이고 실망스러운 일이며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의대 교수들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도주 위험이 없는 초범을 법정 구속하는 것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공부만 잘하는 의사가 아닌 전인적인 의사를 뽑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도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의사들도 말실수가 많아 국민들을 등돌리게 만들기도 한다“며 ”캐나다에서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토론 수업이 많고 의대에서도 교수 강의는 녹화본으로 개인 시간에 보고 학교에 나와서는 토론을 많이 한다“며 ”캐나다는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상황에 익숙해져 말실수가 많지 않은데 이런 교육을 통한 전인적인 사람을 의사로 뽑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문세영 기자 moon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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