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는 현역 최고령 선수가 있다. 지난 2월에 42세가 된 저스틴 벌랜더다. 벌랜더는 올해 메이저리그 20번째 시즌이다.
2025시즌 최고령 선수
42세62일 - 저스틴 벌랜더
41세245일 - 제시 차베스
41세162일 - 찰리 모튼
40세318일 - 율리 구리엘
전성기
벌랜더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건 2005년이다. 샌프란시스코 사장 버스터 포지보다 4년 더 빨리 데뷔했다. 이듬해 본격적인 첫 시즌을 보낸 벌랜더는, 17승9패 평균자책점 3.63(186이닝)의 성적으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벌랜더가 각광받은 건 강속구였다. 투구 추적이 가능해진 2007년, 선발 투수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 1위는 펠릭스 에르난데스였다(95.6마일). 2위는 A J 버넷(95.1마일) 그리고 3위가 바로 벌랜더였다(94.8마일). 94.8마일이 지금은 평범하게 보이지만, 2007년 리그 평균 구속은 90.3마일이었다.
이후 벌랜더는 구속이 더 올랐다. 2009년 포심 평균 구속은 96.3마일이었다. 1회 구속을 아낀 뒤 경기 중후반에 구속을 끌어올리는 것이 벌랜더의 피칭이었다.
2011년 벌랜더는 역사적인 시즌을 보냈다. 다승(24)과 탈삼진(250) 평균자책점(2.40) 타이틀을 모두 쓸어담는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이에 벌랜더는 통산 첫 번째 사이영상과 MVP를 동시 수상했다.
1956년에 사이영상이 제정되면서 MVP는 야수가 선정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2011년 벌랜더가 투수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반면, 야수 중에선 확 치고 나간 선수가 없었다. 덕분에 벌랜더는 MVP 투표에서 가장 많은 1위표 13장을 획득할 수 있었다(2위 자코비 엘스버리).
사이영상 & MVP 선발 투수
1956 - 돈 뉴컴
1963 - 샌디 코팩스
1968 - 밥 깁슨 & 대니 매클레인
1971 - 바이다 블루
1986 - 로저 클레멘스
2011 - 저스틴 벌랜더
2014 - 클레이튼 커쇼
벌랜더의 또 다른 강점은 엄청난 내구성이었다. 웬만하면 선발 일정을 거르지 않았다. 2007년부터 8년 연속 200이닝을 돌파했다. 2015년 삼두근 부상으로 200이닝을 놓쳤지만(133.1이닝) 2016년부터 다시 4년 연속 200이닝을 넘겼다. 2007-19년 이닝 수에서 압도적인 1위로, 2위 그룹 선수들보다 200이닝 이상 더 던졌다. 다른 투수들에 비해 한 시즌을 더 소화한 셈이다.
2007-19년 투수 최다 이닝
2784.2 - 저스틴 벌랜더
2562.1 - 콜 해멀스
2537.2 - 잭 그레인키
2491.1 - 제임스 실즈
2456.1 - 존 레스터
벌랜더는 위 명단에 있는 투수들 중 유일한 현역이다. 가장 많은 이닝을 책임졌지만, 누구보다 건재함을 과시했다. 2019년 두 번째 사이영상(21승6패 2.58) 그리고 토미존 수술에서 돌아온 2022년에는 세 번째 사이영상을 손에 넣었다(18승4패 1.75). 사이영상을 3회 이상 차지한 투수는 역사상 11명이 전부다.
2022년 벌랜더는 39세 시즌이었다. 보통 은퇴를 고려하지만, 벌랜더는 갓 데뷔한 선수들과 경쟁했다. 30대 후반에 토미존 수술을 받을 때만 해도 다시 사이영상 투수로 복귀하는 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가히 '금강벌괴'로 불릴만했다.
쇠퇴기
2022년 리그 최고 투수였던 벌랜더는 FA 시장에 나왔다. 나이로 인해 대형 계약은 받지 못했지만, 뉴욕 메츠가 2년 8670만 달러 계약을 안겨줬다. 연평균 4333만 달러는 메이저리그 최고액이었다. FA 시장에서도 보란듯이 자존심을 지켰다.
벌랜더의 활약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40세가 된 벌랜더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른쪽 대원근 부상으로 개막전을 놓쳤다. 5월에 돌아와서 두 자리 승수와 3점대 평균자책점, 규정이닝은 충족했지만, 힘이 떨어진 모습이었다(13승8패 3.22, 162.1이닝).
그 사이 벌랜더는 휴스턴으로 트레이드 됐다. 휴스턴은 벌랜더가 사이영상 두 번을 받도록 도와준 팀이다. 벌랜더 역시 휴스턴 전,후로 커리어가 달라졌다고 인정했다. 휴스턴의 분석과 조언이 자신을 좀 더 세련된 투수로 만들어줬다고 말한 바 있다.
문제는 몸이 이전 같지 않았다. 벌랜더는 지난해에도 어깨 통증으로 개막전을 놓쳤다. 시즌 중반에는 목 경직 증세에 시달리면서 두 달 넘게 부상자 명단에 있었다. 그러면서 지난 시즌 90.1이닝밖에 던지지 못했다. 이닝이터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설상가상 등판했을 때도 성적이 좋지 않았다. 17경기 평균자책점이 5.48에 그쳤다. 2023년부터 하락했던 9이닝 당 탈삼진 수가 더 떨어졌고, 9이닝 당 피홈런 수는 더 늘어났다. 세월의 무게가 체감됐다.
벌랜더 9이닝 당 탈삼진 / 피홈런 수
2022 [K/9] 9.51개 [HR/9] 0.62개
2023 [K/9] 7.98개 [HR/9] 1.00개
2024 [K/9] 7.37개 [HR/9] 1.49개
*2022시즌 이전 9.08삼진 / 0.93피홈런
재도약
벌랜더는 2년 계약의 마지막 시즌을 초라하게 끝냈다. 건강에 적신호를 보인 40대 투수는 시장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예비 명예의 전당 투수라고 해도, 벌랜더의 새 계약은 난항이 예상됐다.
벌랜더에게 손을 내민 팀은 샌프란시스코였다. 샌프란시스코는 1년 1500만 달러 계약을 보장하면서, 벌랜더의 동의 없이 팀을 옮길 수 없는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도 넣어줬다. 수상에 따른 보너스뿐만 아니라, 원정 경기 시 호텔 스위트룸도 챙겨줬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투수를 예우하는 계약이었다.
포지 사장의 영입 목적도 벌랜더를 움직였다.
많은 사람들이 벌랜더의 역할은 '젊은 투수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지 사장은 벌랜더에게 "그저 멘토로 영입한 것이 아니다.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면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다시 대단해지길 바라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I’m not bringing you in to be a mentor. I wouldn’t sign you if that’s all I thought you had left. I want you to be great again, and I think you can.”)"고 말했다.
숫자에 드러난 이유도 있었다.
지난해 벌랜더는 허용한 타구의 질은 나쁘지 않았다. 타구들의 평균 속도가 88.6마일로 느린 편에 속했다. 그러다 보니 타구의 질로 계산된 기대 평균자책점(xERA)은 실제 평균자책점 5.48보다 훨씬 낮은 3.78이었다.
지난해 벌랜더는 뜬공이 발목을 잡았다. 뜬공 비율 52.3%는 90이닝 이상 던진 140명 중 두 번째로 높았다(조이 에스테스 55.5%). 샌프란시스코는 이 뜬공이 일으키는 파장이 오라클파크에선 억제될 것으로 내다봤다. 오라클파크는 해풍이 역으로 불어 홈런을 치기가 어려운 곳이다. 넘어갈 법한 타구도 힘을 잃고 떨어진다. 실제로 최근 3년간 홈런팩터가 가장 낮은 구장이 오라클파크다.
최근 3년간 홈런팩터 하위
85 - 카우프만스타디움 (캔자스시티)
83 - 프로그레시브필드 (클리블랜드)
80 - PNC 파크 (피츠버그)
80 - 오라클파크 (샌프란시스코)
*홈런팩터 1위 신시내티 GABP (127)
벌랜더도 샌프란시스코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착실하게 몸을 만들었다. 이전까지 오프시즌은 휴식에 집중했지만, 지난 오프시즌은 계속 투구 훈련을 가져갔다. 또한 커브 그립을 바꾸면서 스위퍼를 새롭게 장착하는 시도도 했다.
무엇보다 지난 2년간 벌랜더를 가로막은 건강 이슈가 없었다. 아픈 곳 없이 정상적으로 오프시즌을 보내고, 스프링캠프를 마쳤다. 벌랜더가 웃음을 되찾은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300승
희망을 가득 안고 출발해도 현실은 냉정한 법이다. 이번 시즌 벌랜더는 5경기를 치렀다. 그런데 승리 없이 1패만을 떠안고 있다. 평균자책점도 5.47로 작년과 비슷하다.
지난 월요일 등판은 안타까웠다. LA 에인절스 원정에서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다. 하이 패스트볼로 타자를 제압하는 피칭은 마치 시간을 몇 년 전으로 돌린 듯 했다. 타선도 석 점을 지원하면서 승리 요건을 안겨줬다. 중견수 이정후도 안타성 타구를 호수비로 낚아채 벌랜더의 팔을 번쩍 들게 했다.
하지만 마무리 라이언 워커가 리드를 날리면서 벌랜더의 시즌 첫 승은 물거품이 됐다. 벌랜더는 점점 나아진 피칭 내용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로써 벌랜더는 통산 262승에서 아직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벌랜더가 건강하게 시작한 시즌에서 첫 5경기 동안 승리가 없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세이버 지표의 발달로 다승의 가치는 이전보다 하락했다. 투수 개인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다승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현역 최다승 투수인 벌랜더를 향한 존경심을 밝힌 로비 레이는, "다승이 팀 통계라고 해도 선발 투수에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산술적으론 쉽지 않다. 300승까지 38승이 필요하다. 최소 3시즌은 더 뛰어야 한다. 일단, 올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중요하다. 300승에 다가갈 뿐만 아니라, 그래야 벌랜더를 찾는 팀이 나타난다. 팀을 찾지 못해 강제 은퇴한 베테랑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과거 벌랜더는 '45세'까지 뛰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벌랜더의 우상, 놀란 라이언은 46세까지 공을 던졌다. 마지막 300승 투수 랜디 존슨도 45세 시즌에 8승을 더하면서 대업을 완성했다. 벌랜더는 신인 시절 40대 투수 케니 로저스와 한솥밥을 먹으면서 40대 커리어는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 들은 적이 있다.
현역 최다승 순위
262 - 저스틴 벌랜더(42세)
216 - 맥스 슈어저(40세)
212 - 클레이튼 커쇼(37세)
153 - 게릿 콜(34세)
138 - 크리스 세일(36세)
138 - 찰리 모튼(41세)
앞으로 300승 투수는 종적을 감출지도 모른다. 벌랜더가 하지 못하면, 그 다음 주자들의 가능성은 더 희박하다. 그나마 기량을 유지했던 게릿 콜도 토미존 수술로 쓰러졌다. 벌랜더가 아니면 우리 시대의 300승 투수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벌랜더의 의지는 강력하다. 몸이 허락하는 한 마운드에 오른다는 입장이다. 여전히 벌랜더는 얼마나 더 던질지보다, 얼마나 더 잘할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야구를 마라톤에 비유한 벌랜더는 거의 종착점에 다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관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I’m in the middle of running the marathon. I know that I’m towards the end. I’m not quitting now).
벌랜더가 반드시 자신의 마라톤을 완주하길 바란다.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