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체육관의 공기는 팽팽했다. 신유빈은 올 시즌 가장 뜨거운 흐름을 타고 있었고, 관중은 그가 또 한 번 벽을 넘을 수 있을지 숨을 죽였다. 결과는 세트 스코어 1-4 패배. 세계 2위 왕만위의 벽은 높았다. 하지만 표면만 보면 놓치는 것이 많다. 이번 패배는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한국 여자 선수가 WTT 그랜드 스매시에서 처음으로 4강을 밟아 ‘동메달’ 성적을 확정한 자리였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는 16강에서 중국의 콰이만을 3-2로 잡아내며 올해 이어지던 ‘대중(對中) 8연패’ 사슬을 끊었고, 8강에서는 귀화 선수 주천희를 4-2로 꺾었다. 그 연장선에서 세계 최정상과 맞붙어 한계를 확인했고, 동시에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과제도 얻었다. 이게 이번 준결승의 진짜 내용이다.

경기 흐름을 천천히 되짚어보자. 1게임은 사실상 승부의 방향을 정하는 분기점이었다. 신유빈은 4-1, 7-4로 앞섰고 10-8에서 먼저 게임 포인트를 잡았다. 랠리 길이가 길어질수록 왕만위의 백핸드 압박이 거세지는 것을 의식해, 초반에는 과감한 3구·5구 공격으로 스코어를 쌓았다. 그러나 막판 두 포인트에서 리시브 길이가 살짝 들뜨며 왕만위의 역공 각을 열어주었고, 이어진 듀스에서 연속 실점으로 10-12를 허용했다. 이 한 게임이 선수의 에너지 배분과 심리의 균형을 흔들었다. 2게임을 11-7로 곧장 되갚은 건 분명 강점이었다. 회전량 많은 서브로 상대를 묶고, 전위에서 한 박자 빠르게 찔러 넣는 전환이 살아났다. 하지만 3게임 듀스(11-13)에서 또 한 번 마무리의 한 끗이 모자랐다. 앞서 있던 상황에서 결정구의 코스가 바깥으로 살짝 벗어나며 균형이 기울었고, 왕만위는 여기서 냉정하게 2구 공격과 백핸드 라인 공략을 섞어 흐름을 완전히 가져갔다. 4·5게임은 스코어상 7-11, 7-11이지만, 내용은 “초반 균형—중반 흐름 이탈—끝맺음 미흡”의 반복이었다. 요약하면, 초반 주도권은 충분히 만들었지만, 듀스와 매치의 문턱에서 내리막을 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모자랐을까. 기술적으로 보면 세 가지가 눈에 띈다. 첫째, 리시브의 ‘질’이다. 왕만위는 서브 이후 2구 공격에서 각을 만드는 데 매우 능하다. 이를 끊으려면 짧은 리시브는 더 짧게, 긴 리시브는 더 낮게 들어가야 한다. 이날은 몇 차례 하프롱(harf-long)이 허용되며 상대의 드라이브 출발점이 편해졌다. 둘째, 백핸드 대 백핸드의 중거리 교환에서 깊이가 들쑥날쑥했다. 신유빈의 백핸드는 스피드와 각도가 장점인데, 왕만위처럼 안정적인 축을 가진 선수에게는 간헐적으로 ‘몸통 쪽 깊숙이’ 들어가는 볼과 완전히 벌리는 볼을 확실히 섞어야 한다. 특히 3게임 듀스 국면에서 이 변주가 부족했다. 셋째, 체력과 집중력의 미세한 흔들림이다. 1, 3게임 막판에 발 첫 스텝이 반 박자 늦어지며, 손이 먼저 나가고 몸이 따라가는 장면이 보였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이 급의 경기에서는 점수로 직결된다.

그럼에도 이번 대회에서 확인한 성장 포인트는 분명하다. 콰이만전 역전승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다. 초반 상대의 강서브에 흔들리며 1게임을 내준 뒤, 2·3게임에서 리시브 라인을 과감히 올리고, 포·백 전환을 빨리 가져가면서 스스로 경기 흐름을 바꾸었다. 주천희전에서도 0-2 뒤지던 경기를 4-2로 뒤집었다. 예전 같으면 밀릴 때 움츠러드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내 템포’를 되찾는 시간이 확실히 짧아졌다. 포인트 사이사이에 루틴으로 호흡을 안정시키고, 작전타임 이후 첫 두 랠리에서 의도한 전술을 실행하는 모습이 여러 번 확인됐다. 이는 단순한 감정 조절을 넘어서, 경기 설계 능력이 올라왔다는 증거다.
왕만위라는 상대의 특성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백핸드 축을 탄탄하게 세워놓고, 초구에서 라켓 각도를 살짝 닫아 깊게 찔러 넣는 2구 공격이 일품이다. 이 습관을 깨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서브에서 ‘정보’를 지우는 것이다. 같은 폼에서 짧은 백스핀이 나갈지, 하프롱이 갈지, 노스핀이 탈지 읽히지 않게 만들어야 2구 스타트를 지연시킬 수 있다. 다른 하나는 3구에서 아예 몸통을 겨냥해 첫 각을 뭉개는 선택이다. 코스 자체는 화려하지 않지만, 왕만위의 준비 동작을 흔드는 데 유효하다. 신유빈은 2게임에서 이 변화를 성공적으로 적용했고, 그 순간 경기력이 수직으로 올라갔다. 이 패턴을 3·4·5게임의 결정적 랠리에서도 더 많이 꺼내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멘털과 체력의 연결도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첫 게임을 놓치고도 곧장 2게임을 따낸 건 ‘회복력’의 증명이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듀스에서의 세밀함은 단순한 담대함만으로 오지 않는다. 평소 훈련에서 “10-10, 나의 서브, 상대의 예상은 이거, 내가 던질 카드는 저거”처럼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반복해 몸에 넣어야 한다. 작전타임의 질도 중요하다. 코치의 한마디가 기술적 팁 하나와 루틴 하나로 정리돼야 선수의 호흡에 스며든다. 장기전 체력은 이미 예전보다 좋아졌다. 다만 4강 같은 하이 볼티지 매치에선 ‘고강도 30분’을 견디는 폭발력과, 포인트 사이 15초 회복능력이 더 요구된다. 이는 근지구력과 유산소·무산소 인터벌의 배합, 그리고 짧은 루틴 훈련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번 동메달은 랭킹 포인트와 자신감 두 가지를 동시에 올려주는 결과다. WTT 그랜드 스매시는 세계선수권을 제외하고 가장 크고 깊은 대회다. 4강은 한국 여자탁구 역사에도 남는 성과다. 의미를 크게 잡으면서도 과제는 작고 구체적으로 쪼개야 한다. 리시브는 “더 짧고 더 낮게”, 3구는 “몸통을 먼저, 각도는 나중에”, 듀스는 “패턴을 미리 정해두고 바꾸지 않기”. 이렇게 간단한 문장으로 훈련 목표를 정리해 매일 반복하면 경기장에서 즉각 꺼낼 수 있다. 서브는 백스핀·노스핀의 궤도 차이를 더 숨기고, 가끔은 아주 느린 짧은 서브로 상대의 리듬을 끊는 것도 필요하다. 백핸드 대 백핸드 교환에서는 같은 스피드만 고집하지 말고, 한두 번은 느리게 묻혀 넣어 상대의 타점을 무너뜨린 뒤, 다음 볼에서 속도를 올리는 변속이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앞설 때 더 차분해지는 습관”이다. 10-8에서의 두 포인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점수판보다 루틴을 먼저 떠올리는 자동화가 답이다.

팀 차원의 지원도 덧붙여 보자. 테이블 뒤에서 찍는 상·하 시점의 영상 분석은 이미 하고 있겠지만, 이번처럼 듀스에서 흔들린 장면만 모아 ‘결정구 선택’ 데이터셋을 따로 만들 필요가 있다. 어떤 코스가 성공률이 높았는지, 어느 시도에서 실수가 나왔는지 수치로 보면 선수가 더 빨리 받아들인다. 또한 스파링 파트너를 왕만위 유형(단단한 백핸드 축+빠른 2구)으로 세팅해 ‘몸통 깊숙이’로 몰아치는 연습을 늘리는 것도 도움이 된다. 체력 파트에서는 포인트 간 12~15초 회복을 가정한 인터벌 러닝과, 복근·둔근·햄스트링 중심의 안정화 훈련을 더하면 마지막 5게임의 스텝이 가벼워진다.
이번 대회는 한국 여자탁구의 지도에도 작은 선을 하나 더 그었다. 과거엔 중국 톱랭커를 만나면 “잘 싸웠다”는 말로 위안을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다르다. 콰이만을 넘었고, 주천희와의 ‘집안 대결’도 이겼다. 왕만위전 역시 초반 리드와 중반의 팽팽함이 있었다. 남은 숙제는 마지막 문을 여는 방법, 즉 듀스와 세트 포인트에서의 두 세트 플랜뿐이다. 그 문턱을 넘는 순간, 결승은 현실이 되고, 우승은 목표가 된다. 신유빈은 아직 21살이다. 이미 큰 무대에서 여러 번 흔들리고 다시 선 경험을 쌓았다. 석은미 감독의 말처럼 “아직 뒷심이 약하다”는 자평은 인정의 다른 표현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선수는 강해진다.

이제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곧 다가올 아시아선수권 단체전을 위해 인도로 향한다. 단체전은 개인전과 다른 강박과 기회가 뒤섞인 무대다. 동료의 포인트가 나의 포인트로 이어지고, 한 포인트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무대일수록 직전 대회의 경험이 빛난다. 베이징에서 놓친 두 개의 듀스, 하나의 게임 포인트는 인도에서의 한 세트, 한 판을 바꿀 자양분이 된다. 중국의 벽은 높지만, 이미 첫 문은 열렸다. 이번 동메달이 증명한다. 남은 문을 여는 열쇠는 화려한 묘기가 아니라, 아주 작은 정확함을 매일 반복하는 끈기다. 팬들이 할 일도 분명하다. 과정을 믿고 박수를 보태는 것.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면, 언젠가 한국 여자탁구의 금빛 순간이 다시 달력 위에 찍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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