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떠나는 아시아 여행, 몽골·중국·필리핀 ‘현지감성’ 물씬
광희동·연남동·혜화동 등 숨은 다문화 거리 인기…“현지인의 일상 느낄 수 있어”
“해외여행 가고 싶은데 비행기 값은 부담되고, 서울에서 즐길 수 있는 세계여행 장소는 없을까?”
서울 도심에서 마치 해외여행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이태원 이슬람 거리, 대림동과 건대 차이나타운, 서래마을 프랑스 거리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의 다문화 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광희동 중앙아시아 거리와 연남동 화교 거리, 혜화동 필리핀 시장 등이 그 주인공이다. 여권 대신 교통카드 하나만 들고 떠날 수 있다.
동대문 광희동에서는 키릴 문자, 연희동에서는 붉은 한자, 혜화동 일요일 오후의 골목에서는 타갈로그어가 한글과 뒤섞인다. 광희동에서 사마르칸트까지 5126km, 연희동에서 베이징까지 956km, 혜화동에서 마닐라까지 2611km. 숫자로는 멀지만 걸음으로 가까운 서울 속 아시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서울서 느끼는 몽골 울란바토르, 광희동 중앙아시아 거리
서울 지하철 2·4·5호선이 교차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12번 출구. 수많은 관광객들이 쇼핑몰과 DDP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사이, 좌측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서면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거리 곳곳에는 키릴문자와 한글로 가득한 간판들이 절묘하게 뒤섞여있다. 광희동 사거리에는 중앙아시아 거리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1990년 한-러 수교를 계기로 동대문 의류를 거래하는 러시아 보따리상인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몽골 등 중앙아시아 각국의 상인들도 합류하며 자연스럽게 중앙아시아인들의 거점이 됐다. 초기에는 러시아인 거리였으나 점차 중앙아시아 각국의 사람들이 채워나가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거리에는 식료품점, 핸드폰 가게, 운송업체, 일자리 소개소, 비자 발급 회사가 들어섰다. 우리나라의 민요 판소리 동호회와 몽골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하러 오는 식당이 한 건물에 있다. ‘몽골타워’로 불리는 뉴금호타워에는 10층 전체가 몽골 관련 상점으로 채워져 있다. 사마르칸트, 울란바토르 등 현지 도시 이름을 딴 식당들도 즐비하다. 실내로 들어서면 TV에서 몽골 방송이 흘러나오고 벽면에는 칭기스칸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중앙아시아거리의 식당에서는 우유와 차를 섞고 소금을 넣어 마시는 몽골식 수태차부터 각종 향신료가 들어간 전통 음식까지 중앙아시아의 맛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식료품점에서는 한국 제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교민들이 고향의 향수를 달랠 수 있는 통조림, 과자, 주류, 식재료 등을 판매한다.
이국적인 문화와 음식을 체험하려는 한국인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조윤주(28·여) 씨는 “근처에 살지만 중앙아시아 거리가 있는 걸 알게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며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몽골식당에서 허르헉과 수태차를 먹었는데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관광지처럼 꾸민 게 아니라 현지인들의 진짜 일상이 느껴져 매력적이다”며 “한국과 중앙아시아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이곳이 오래 보존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50년간 이어져온 진짜 중국의 맛, 연희·연남동 화교 거리
서울 지하철 2호선·경의중앙선 홍대입구역 3번 출구. 나와 경의선 숲길을 따라 동교로를 향해 10분쯤 걸으면 붉은 한자가 새겨진 간판들이 하나둘 시선을 붙잡는다. 연희동과 연남동 일대는 오래된 중화요리의 맛과 새로운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연희맛로와 고가도로 아래로 이어진 연남동 동교로 사거리를 중심으로 중화요리점들이 밀집해 있다.
1969년 한성화교중·고등학교가 연희동으로 이전하면서 화교들의 정착이 시작됐다. 1970년 소공동과 서대문 일대 재개발로 강제 이주당한 화교들은 이곳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연희동은 학교와 가깝고 연남동은 집값이 비교적 저렴해 화교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거리를 걷다 보면 중국인들이 복을 상징한다고 여기는 붉은색 간판과 전통 풍등이 현대식 건물과 어우러져 있다. 최근에는 MZ세대를 겨냥한 감각적인 인테리어의 중식당과 카페들이 줄지어 들어서며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연희동에는 연희맛로를 따라 고급 중화요리점이 들어섰고, 중식의 대가로 알려진 이연복 세프의 식당도 이곳에 있다.
반면 연남동에는 서민적인 중식당이 자리 잡아 각기 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오룡해삼, 산라탕 등 본토 스타일의 중국 서민 음식부터 정통 고급 중화요리까지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최근 연남동이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지역의 변화도 빨라지고 있다. 급격한 임대료 상승으로 오래된 화교 식당들이 하나둘 자리를 옮기고, 전통적인 화교 문화는 조금씩 쇠퇴해가고 있다.
한때 서울의 차이나타운으로 조성될 뻔했던 이곳은 급격한 임대료 상승으로 화교들이 하나 둘 떠나고 있지만 50년 넘게 이어온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화교 가게들이 대를 이어 명맥을 유지하며 중국의 맛과 문화를 간직한 곳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연희동에서 옷가게를 운영중인 한 상인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오래된 가게들이 문을 닫고 1세대 사장님들이 연로해져 떠나기도 했다”며 “하지만 가수 성시경씨가 다녀가면서 입소문이 나기도 하고 3대째 가업을 잇는 사장님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화교 커뮤니티가 끈끈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연남동에 거주하는 정진아(31·여)씨는 "연남동 핫플레이스에 중국 요리집이 몰려 있는 이유를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며 "이곳 중국 요리집은 다른 곳에선 맛보기 어려운 전통적인 중식 메뉴를 다양하게 준비해 중국 본토의 맛을 고루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일요일 오후만 열리는 마닐라, 혜화동 필리핀 시장
혜화역 1번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 동성중고등학교 정문에서 혜화동 성당까지 이어지는 50여 미터의 거리가 매주 일요일이면 작은 마닐라로 변신한다.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열리는 이 특별한 시장은 15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전국에서 올라온 필리핀 사람들이 모이는 이곳은 타국에서 고향의 정을 나누는 교류의 장이다. 시장이 가장 붐비는 시간은 오후 2~3시경이다.
1996년 혜화동 성당에서 필리핀 신부가 타갈로그어로 미사를 집전하기 시작한 것이 시장의 시작이다. 천주교를 믿는 필리핀 교민들이 미사를 드리러 모이면서 자연스레 새로운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처음에는 한국인 남편을 둔 필리핀 아내들이 몇 개의 좌판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규모가 커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는 민원으로 인해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필리핀 문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유의 향신료 향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순간 이곳이 서울인지 마닐라인지 헷갈린다. 시장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한 여러 상품이 준비됐다. 필리핀 현지의 과자와 통조림, 라면 등 다양한 식료품을 만날 수 있다. 필리핀 떡, 고기 꼬치, 바나나, 그린망고 등 현지 음식도 즐비하다.
노릇하게 구워낸 생선구이, 현지식 파스타와 돼지 피를 활용한 고기 요리들이 가판대를 채운다. 주문하면 뒤편 간이 테이블로 안내되는데 이때가 또 다른 재미다. 기본 밥과 함께 제공되는 10여 가지 반찬을 손님이 직접 골라 담을 수 있다. 주말 외식에 나선 필리핀-한국 다문화가정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한켠에선 고향 음식이 그리웠을 유학생들이 홀로 식사를 즐긴다. 타갈로그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수다 소리와 후라이팬 위 생선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시장 골목을 가득 메운다.
시장을 방문한 이리네트아드리아티코(20·여)씨는 “필리핀 국적의 어머니와 함께 돼지고기 꼬치와 그린 망고를 구입했다”며 “필리핀 방문이 오래 됐는데 이곳은 현지시장과 비슷해 그리움을 달랠 수 있어 종종 찾는다”고 말했다.
한 상인은 “이곳에서 판매하는 그린 망고와 바나나는 한국인들이 평소 먹던 맛과 차이가 있다”며 “그린 망고에 필리핀 전통의 볶은 새우 젓갈을 얹어 먹으면 색다른 풍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이태원과 서래마을을 지나쳐 덜 알려진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깊숙한 곳에는 또 다른 세계가 숨어있다. 광희동 골목의 중앙아시아, 연희동의 50년 된 화교 문화, 일요일이면 마닐라가 되는 혜화동은 뜻 밖의 발견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현대인들이 해외여행 욕구가 크지만 실제로 장기간이나 빈번한 여행이 어려운 상황이다”며 “대안으로 해외여행 영상을 보거나 국내의 이국적인 거리를 직접 체험하는 방법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대륙별로 최소 한 나라씩은 체험할 수 있는 거리가 조성되면 더 풍성한 문화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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