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책 5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최근 뉴스레터 <퍼줄거임>(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09435)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다들 유행처럼 사랑을 한다. 물론 크리스마스라고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찾기도 어렵고, 기껏 찾았더라도 허무하게 잃어버리기 쉽다. 사랑을 찾지 못했다면, 혹은 허무하게 잃어버렸다면 아래 다섯 권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1]
<과학이 사랑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모든 것>
“다양한 존재와의 사랑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아무리 뜨거웠던 사랑도 3개월이 지나면 식어버린다는 속설 뒤에는 꼭 호르몬 핑계가 따라붙는다. 마음이 시들해지는 건 호르몬 탓이지 내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정녕 사랑은 호르몬 장난에 불과한가?
<과학이 사랑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은 호르몬 얘기로 시작한다. 인간이 사랑하는 이유는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개체가 처음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이 일을 해내기 위해 그때그때 필요한 호르몬이 분비된다. 저자는 이를 ‘생물학적 뇌물’이라 표현한다.
생물학적 뇌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옥시토신은 자신감을 준다. 옥시토신이 분비되면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 느끼기 마련인 망설임과 두려움을 훨씬 덜 느낀다. 사랑하면 용감해지는 이유다. 도파민은 실행력을 증폭시킨다. 도파민이 분비되면 즐거움이라는 보상이 뒤따르기 때문에 관계 맺기에 필요한 다음 액션을 하게 된다. 사랑하면 부지런해지는 이유다. 세로토닌은 집중력을 높인다. 특정 인물과의 관계가 깊어지려면 시야를 좁혀야 한다. 세로토닌은 “내 눈엔 너밖에 안 보여 너” 같은 노래가 만들어지는 이유다.
위의 세 호르몬은 시간이 지나면 덜 분비되는 경향을 보인다. “역시 사랑은 호르몬 장난이야”라고 속단하지 마시길. 호르몬이 하나 더 남았다. 바로 베타엔도르핀이다. 저자는 이 호르몬이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접착제”이자 “인체의 천연 진통제”라 말한다. 이 호르몬은 특유의 중독성을 발휘해 연인, 가족, 자녀, 친구와의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돕는다. 베타엔도르핀의 존재를 안 이상, 이제 사랑이 식었을 때 호르몬 핑계를 대긴 어렵게 되었다.
- <과학이 사랑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모든 것> | 애나 마친 | 어크로스 | 1만 8,800원
[2]
<로맨스 도파민>
“여기, 자신의 말이 불러온 말의 나비효과로 인해 곤경에 처한 PD가 있다.”
대치동 학원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졸업>은 로맨스와 도파민이 뒤섞인 작품이었다. 입시 성공 경험을 공유하는 선생과 제자의 사랑, 둘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마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억측과 뒷담화, 잘나가는 일타강사를 끌어내리기 위한 암투, 그 속에서 서로 긁고 긁히는 사람들… 여러 작가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 <로맨스 도파민>을 집어 들면서도 그런 걸 기대했다.
기대는 빗나갔다. 분명 로맨스고 분명 도파민인데, 몰입이 안 된다. ‘맛있는 녀석들’은 평범한 러브 스토리로 시작했으나 알고 보니 썸남이 식인종이다. 다행히도(?) 못된 인간에게만 맛을 느끼기 때문에 썸녀는 생명에 지장 없이 식인종 썸남과 커플로 맺어진다는 해피 엔딩. ‘러브러브 좀비템플’은 완급 조절 같은 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전력질주하는 작품이다. 템플 스테이에서 좀비떼를 만나 불상 위로 기어오르다 남자랑 눈이 맞는 소설가 지망생의 이야기다. 마지막 작품 ‘나의 지구’ 속 주인공은 지구가 침공할 만한 행성인지 정찰 나온 외계인과 사랑에 빠진다.
윤리적인 식인종, 절에 나타난 좀비, 사랑꾼 외계인… 자극적인 설정 속에 자극적인 캐릭터를 욱여넣는다고 도파민이 샘솟지는 않는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그래도 맘에 드는 소설이 하나 있었다. 오조 작가의 ‘행운을 빌어줘’다. 이 소설을 한줄로 요약하면 ‘나는솔로 PD와 출연자 사이의 환승연애’다. 설정만 들어도 자극적이지 않은가? 그래, 영상의 시대에서 텍스트 하나로 승부하려면 이 정도의 비틀기는 있어야 방송국 놈들, 유튜브 놈들을 이겨 먹지.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 중 솔직히 둘은 별로였고 둘은 그저 그랬지만, 이 한 편이 무척 훌륭했기에 도파민에 굶주린 로맨스 매니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 <로맨스 도파민> | 최영원 외 4명 | 안전가옥 | 1만 6,000원
[3]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홀딱 반했던 보조개도 지금은 주름 속.”
제목만 보고 인기 웹소설인 줄 알았다면 오해다. 이 책은 시집이다. ‘센류’라는 이름의 일본 전통 문학 장르가 있는데, 쉽게 말해 매우 짧은 시라고 보면 된다. 일본의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에서는 매년 ‘실버 센류’ 공모전을 연다. 나이 들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실버 세대의 일상이 위트 있는 짧은 문장에 담겨 있다.
책 제목이 된 시는 97쪽에 있다. 후쿠오카현에 사는 일흔다섯 살 남자 회사원이 썼다. 독자인 나는 서른일곱 살이다. 부정맥이 정확히 어떤 건지 잘 모른다. 정맥, 동맥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를 보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부정맥은 질환이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 다카키 마슈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살아오면서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때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신체 반응을 자주 경험했다. 그리고 최근 누군가를 만났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래서 사랑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노화 때문이었다. 짠하게 볼 것 없다. 다카키 마슈는 여전히 사랑이라 착각할 만한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 밑줄은 ‘부정맥’이 아니라 ‘사랑인 줄 알았는데’에 그어야 한다.
사랑은 계속된다. 노련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실버 세대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시를 몇 편 골라 적는다. 손가락 하나로 스마트폰과 나를 부리는 아내. 아내의 푸념 끄덕끄덕 하다 보니 내 얘기구나. 이봐 할멈 입고 있는 팬티 내 것일세. 손을 잡는데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 책에서 가장 좋았던 시는 40쪽에서 찾았다. 한 문장에 불과하지만 짧은 소설 한 편을 읽은 느낌이었다. 41쪽에 삽입된 소박한 그림 때문일까, 설레고 슬프고 아련하다. 가고시마현에 사는 스물다섯 살 파트타이머 여성은 이렇게 적었다. “두 사람의 연애담 처음 들은 장례식날 밤.”
-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 포레스트북스 | 1만 3,300원
[4]
<사랑과 결함>
“엄마, 그런 표정 좀 하지 마.”
아이에게 ‘개똥벌레’를 불러주다가 가사가 너무 슬퍼서 멈췄다.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다니,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간다니, 오늘 밤도 이렇게 울다 잠이 든다니. 대신 ‘과수원길’을 불러줬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생긋. 아직 어린 아이가 가사 뜻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향긋하고 예쁜 것만 들려주고 싶다.
나도 엄마의 애창곡을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던 때가 있었다.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쓴다면 지우기가 너무너무 어렵잖아요,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그때 내가 알고 있던 건, 연필은 잘 지워지고 잉크는 안 지워진다는 사실뿐이었다. 사랑을 지우기가 얼마나 어렵고 아픈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아이가 개똥벌레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없듯이.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다면, 그건 특권이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예소연 작가의 단편소설집 <사랑과 결함>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다. 특히 ‘미정이와 나’ 연작이라 할 수 있는 세 편이 그랬다.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로 이어지는 동안 화자인 ‘나’와 친구 미정이는 자란다. 자라면서 이해한다. 슬프고, 아프고, 외로운 것들에 대해.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아이에게 개똥벌레 대신 과수원길을 불러주며 나는 바란다. 외롭고 슬픈 것들은 나중에, 웬만하면 마음이 좀 더 단단해진 뒤에 찾아오기를.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좀 더 나중에.
- <사랑과 결함> | 예소연 | 문학동네 | 1만 6,500원
[5]
<AMORE 아모레>
“사랑은 읽는 게 아니죠. 사랑은 하는 거지.”
연애 프로그램에는 이런 말이 종종 나온다. “티키타카가 잘 되는 분이면 좋겠어요.” 같이 TV를 보던 아내가 중얼거렸다. “우린 티키타카가 잘 되나?” 여기서 잠시 ‘티키타카’에 대해 알아보자. 티키타카는 탁구공이 오가는 모양을 뜻하는 스페인어인데,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점유율을 높이는 축구 스타일을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 등이 함께 뛰던 FC 바르셀로나가 티키타카의 대표격이다. 이후 티키타카의 의미는 한 번 더 확장된다. 짧은 패스를 주고받듯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티키타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연애 상대와의 티키타카, 중요할 수 있다. 어색한 첫 만남에 말이 뚝뚝 끊겨서 마가 뜨는 것보다야 척 하면 딱 알아듣고 추가 질문을 던져주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티키타카가 연애의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골대와 먼 지점에서 종일 패스만 주고받는다고 골이 들어가진 않듯이. 연애할 때 우린 자주 말없이 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와, 우리 한 10분 동안 말을 한 마디도 안 했네.” 우린 티키타카와 거리가 멀다. 굳이 따지자면 뻥축구에 가깝다.
그래픽 노블 에는 9편의 러브 스토리가 담겨 있다. 부제는 ‘이탈리아식 사랑 이야기’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말이 별로 없다. 말없이 다가가고 말없이 집착한다. 이탈리아는 역시 티키타카보다는 카테나치오(빗장수비)지. 세계 축구 트렌드도 꽤 많이 바뀌어서, 이젠 공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보다는 공을 뺏겼을 때 혹은 빼앗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사랑도 비슷하다. 티키타카가 안 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은 그제야 시작된다.
- <AMORE 아모레>| 지드루 | 이숲 | 2만 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