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선언'의 후반이 불쾌했다면, 이것 때문이었다

▲ 영화 <비상선언> ⓒ (주)쇼박스

[양기자의 영화영수증] <비상선언> (Emergency Declaration, 2022)

글 : 양미르 에디터

※ 영화 <비상선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재난영화들은 어떻게든 그 기억을 상기시켜줬다.

관객이기에 앞서, 국민이 공통으로 겪었던 트라우마의 무게감은 영화에서 생생히 떠올려졌다.

2016년 텐트폴 시장과 그해 겨울에 공개된 <부산행>, <터널>, <판도라>는 각각의 방식으로 '한국의 전반적인 시스템 문제'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변화된 시대를 감지한 듯, '재난영화'의 진화가 필요했던 시점에 나온 <엑시트>(2019년)는 학생들을 먼저 구조하려는 어른들의 모습이 등장했다.(작품을 연출했던 이상근 감독 역시 세월호 참사를 생각해, 그 장면을 그런 화면 구도로 찍어야겠다는 확신을 기자간담회를 통해 말한 바 있다)

이후 개봉한 '코로나 19' 시대의 재난 영화는(촬영은 모두 '코로나 19' 직전에 이뤄졌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미흡한 부분이 있었지만, 관객에게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남기면서 막을 내렸다.

<비상선언>은 '코로나 19'가 한창인 가운데 '촬영되어 개봉한' 첫 번째 재난영화다.

그간 한국 재난영화가 지녔던 숙제(예컨대, 이래도 울지 않겠느냐고 영화의 후반부 여러 차례나 관객의 감정선을 흔드는 과잉 신파)에 대한 풀이, 혹은 비슷한 재난 영화의 공식에서 차별화되는 한 방(아니면, 그 공식을 '무리수 없이' 잘 이행했느냐)을 기대했을 관객이 많았을 것이다.

큰 축에서 <비상선언>은 항공 재난영화, 바이러스 재난영화가 지닌 특수성을 무리 없이 옮긴 작품이다.

기본 뼈대 작품으로, 자본과 스타 시스템으로 뭉친 1970년대 재난 영화 붐을 만들어 낸 <에어포트>(1970년)가 있다.

각자의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비행기에 탑승한 가운데, 한 테러범이 폭탄을 터뜨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었고, 많은 후속작을 만들어냈다.

할리우드발 재난 영화 붐은 유럽으로 옮겨졌는데, <카산드라 크로싱>(1977년)은 바이러스에 노출된 남자가 수천 명이 탑승한 유럽 대륙 종단 열차를 타게 되면서, 바이러스 노출을 막기 위해 열차를 '폭파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여기에 <비상선언>은 <에어플레인>(1980년)의 이야기도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에어플레인>은 식중독으로 인해서 기장을 비롯한 기내 조종사들이 정신을 잃은 상황에 놓이고, 과거 비행 경험이 있었으나 현재는 비행 공포증이 생겨버린 남자가 비행기를 무사히 착륙시켜야 하는 이야기를 담은 '코미디' 영화였다.

이런 1970~80년대 추억의 재난 영화들을 소개한 이유는, 이 작품보다 <비상선언>은 한결 세련된(당연하다고 주장할 순 있겠으나) 작법으로 관객을 찾았기 때문이다.

<에어포트>가 그런 것처럼, <비상선언>은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부터, 인천 국제공항 안팎의 분위기를 살피면서 주인공들을 소개한다.

눈에 띄는 인물은 테러를 저지르기 위해, 승객이 가장 많은 비행기에 탑승하고 싶다면서, 공항 여성 직원에게 욕설을 퍼붓는 '진석'(임시완)이었다.

'진석'의 반대편에는 '재혁'(이병헌)이 있었다.

'재혁'은 아토피로 고생 중인 딸 '수민'(김보민)의 치료를 위해 비행 공포증을 무릅쓰고 하와이행을 결정한다.

'수민'에게 접근한 '진석'을 불안하게 여긴 '재혁'은 계속해서 '진석'을 의심한다.

한편, 베테랑 형사팀장 '인호'(송강호)는 아내(우미화)가 비행기를 타고 휴가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 '비행기 테러 예고' 동영상 소식에 관심을 기울인다.

영상의 촬영지를 파악한 '인호'는 그곳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체를 발견하고, 조사를 하던 중 테러를 준비 중인 사람이 '진석'이며, '진석'이 아내가 탄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걸 인지한다.

그 시간, 국토부 장관 '숙희'(전도연)는 세미나 준비 도중 비행기 재난 소식을 접하고,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각 부처와 고민하지만, '진석'이 진행하는 '바이러스 테러' 상황에 공포를 느낀다.

영화의 초반 1시간은 인물 군상의 사연과 테러의 전개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관객의 극 몰입을 원활하게 해준다.

심지어 기존 국내 기술로는 볼 수 없었던 항공기 회전 장면을 실감 나게 구현하면서, 액션까지 제공해줬다.

이 순간이 되면서, 영화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1990년대 항공 재난 영화는 주로 한 개인의 영웅적인 면모가 빛을 낸 경우가 많았다.

<터뷸런스>(1997년)는 비행 승무원이 연쇄 살인범을 상대로 승리해 비행기 착륙까지 해결해야 한다는 믿기지 않는 시나리오를 보여줬고, <에어 포스 원>(1997년) 역시 '인디아나 존스'로 변신한 미국 대통령의 액션이 볼거리가 됐다.

"다 같이 죽어버리자"라고 생각한 두 영화의 빌런들처럼, '진석'도 사실상 '묻지 마 테러'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비상선언>은 한술 더 뜨는 선택지를 꺼낸다.

'진석' 역시 바이러스 감염자가 되어 영화 중반부에 최후를 맞이한 것.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비상선언>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1990년대의 재난영화 공식에서 차별화된 한 방을 '무리수 없이' 잘 이행하고 있었고, 훌륭한 비행 중이었다.

심지어 임시완의 미친 연기로 만들어 낸 사이코패스 캐릭터 '진석'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주지 않는 스토리텔링으로 흥미로운 전개를 보여줬다.

하지만, 회항을 결정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갔다.

처음으로 돌아가, 영화는 '비상선언'에 대한 정의를 자세히 자막으로 소개한다.

문득 화산 관련 재난 영화 <볼케이노>(1997년)가 생각났다.

그 작품의 인트로는 주인공 '마이크'(토미 리 존스)가 어떤 지위 권한이 있음을 알려주고,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실제로 '마이크'는 그런 지휘를 진행한다).

<비상선언>의 '비상선언' 정의 역시 그런 연유로 사용됐을 터.

아무리 미국 정부가 바이러스 감염 이유로 인해, 착륙 불허 결정을 내렸다 할지라도, '현수'는 '항공 교통 관제(ATC)' 교신에서 '비상선언'을 내리고, 착륙을 시도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는 국제민간항공협약에 의해 설립된 UN 산하 기구인 'ICAO'의 '부속서'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고, 국내에선 국토교통부의 '항공교통관제절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정체 모를 바이러스일지언정, 자국민이 탑승했을 수도 있는 비행기의 착륙 자체를 저지한다는 것은 '영화적 허용'이지, 실제에선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굳이 관제절차까지 살펴봤던 이유는, "관객들이 영화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볼 수 있기를 바랐다"라고 언급한 한재림 감독의 공식 보도자료 답변 때문이었다.

미국에 비상 착륙했더라도, 충분히 관객의 서스펜스를 작용할 수 있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코로나19' 초기 있었던 일본의 크루즈 유람선 선체 내 격리처럼,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들은 그곳에서 격리 대상이 됐을 터.

그 사이 '인호'와 '숙희'는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항체를 찾아내고, 승객이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을 터.

"별로 재미없지 않겠냐"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그것을 탄탄하게 풀어가는 것 역시 감독의 숙제였다.

'한국 재난영화가 지녔던 숙제' 말이다.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2016년)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이 작품은 각자의 위치에서, 철저한 직업윤리를 보여줬고, 그로 인해 태어난 '기적'을 군더더기 없이 보여줬다.

'신파'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하나도 없었다.

<비상선언>으로 돌아가서, 바이러스로 인해 기장이 죽고, 부기장 '현수'(김남길)의 몸이 온전치 않자, <에어플레인>의 상황처럼, 과거 비행기를 몰았던 경험이 있던 '재혁'을 나서게 한다.

그 상황에서 '현수'와 '재혁'의 관계가 밝혀지고, 잠시간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성에 집중한다.

이야기가 진행된 후, '현수'는 연료 부족 등 여러 이유로 일본 공항 관제에 '비상선언'을 하지만, 일본 측은 이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술 더 떠, 일본 항공자위대의 전투기는 국제선 민항기에 경고 사격과 '카미카제'를 시도한다.

이는 일본이 '전쟁 선포'를 한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인데, 냉전 시기에 '소련'이 저질렀던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1983년) 이후, 민항기를 대상으로 한 전투기의 요격은 전무했다.(1984년, ICAO는 영공을 침범했다 하더라도 민간 항공기 격추는, 격추 당사자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국제 민간 항공 협정'을 개정안, 일명 '시카고 협약'을 발표했다)

그렇게 일본에서도 착륙을 못 한 비행기는 한국으로 날아갔는데, 이번에는 '서울공항' 착륙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착륙을 반대하는 민간인들이 공항 난입 시위를 벌였다는 것인데, 충분히 공항 밖에서 시위가 이뤄질 수는 있겠으나, '군사 시설'인 서울공항 안에 민간인들이 들어갔다는 설정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번에도 착륙이 안 되니, 탑승객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려 한다.

다수의 국민들에게 피해(발견된 '바이러스' 항체가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나온 이후였다)가 될 수 있으니, 소수의 숭고한 희생으로 마무리 짓자는 것.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볼 법한 '살신성인', '영웅주의'와 같은 메시지가 없어서 참신했던 영화는, 그 순간의 결정으로 '심각한 호불호'를 낳게 됐다.

다시 '세월호 참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에,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영원히 기억해야 할 사건으로 남기게 됐다.

특히 꿈을 피워보지도 못한 미성년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더욱 큰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

하지만 <비상선언>에서 '집단 희생'을 결정한 주체는 어른이었지만, 영화에 나오는 두 축의 미성년들은 그 결정을 마지못해 따르는 것으로 등장한다.

(하와이까지 여행을 가는데 굳이 교복까지 입고 갈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그 결정에 수용하고, 심지어 '수민'이 "다른 아이들이 아플 수 있으니 내리지 말자"는 대사를 하게 만든다.

올해 여름을 겨냥하고, 한국 상업영화에서 볼 수 있던 결정 중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하필, 그다음 장면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게 해주는 '영상 메시지 모음'이었는데, 이 역시 매우 위험한 '신파'로 남을 것 같았다.(세월호의 아이들이 남겼던 메시지를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이는 <아마겟돈>(1998년)이나, <판도라>에서 주인공이 인류를 구하기 위해 가족들에게 남기는 메시지와는 분명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게 <비상선언>은 뛰어난 전반부와 무시무시한 후반부로 기억될, 안전한 선택지를 찾다가 더 기묘한 선택지로 향해가는, 영화 '내외적으로' 매우 지독한 '윤리 실험장'에 온 것 같은 영화였다.

2022/08/03 CGV 용산아이파크몰 IMAX

비상선언
감독
한재림
출연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김소진, 박해준, 서혜윤, 박윤희, 김소운, 옥윤중, 현봉식, 지웅배
평점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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