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플라자 합의 40년, 망령은 다시 부활할 것인가

박영서 2025. 9. 2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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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촉발한 ‘플라자 합의’가 이뤄진지 지난 22일로 40년이 됐다. 당시 미국은 동맹국의 팔을 비틀어 무역적자 완화를 꾀했지만, 일본은 장기 침체라는 뼈아픈 고통을 겪어야 했다. 40년이 흐른 지금, ‘제2의 플라자 합의’가 거론되고 있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기에, 같은 비극을 겪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가 요구된다.

◆엔화 절상, 일본 경제 무너뜨리다

‘플라자 합의’란 명칭은 회의가 열린 미국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따왔다. 1985년 9월 22일, 미국·영국·프랑스·서독·일본 선진 5개국(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이 호텔에 비밀리에 모여 대규모 달러화 매도 등을 결정했다. 합의 직후 달러화 가치는 급락했고, 엔화와 마르크화는 급격히 절상됐다.

당시 미국은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동시에 확대되는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서독과 미국 간의 무역 마찰도 심화되고 있었고, 감세와 방위비 부담으로 공공 재정도 악화되고 있었다. 이렇게 미국의 경제력이 쇠퇴하고 있었지만 달러는 무역에 편리한 통화여서 세계 각국은 달러를 매입했다. 그 결과 달러는 강세를 보였다. 이에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미국 정치권을 중심으로 공유됐다. 결국 미국은 동맹국이었던 일본과 서독을 압박해 엔화와 마르크화의 인위적 절상(달러 약세)을 유도했다.

당초 일본은 10~15%의 엔화 평가절상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엔화 상승 폭은 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합의 전 달러당 240엔대였던 엔화 환율은 1987년 말 120엔대에 진입했다. 2008년 리먼 쇼크 이후 엔화 평가절상 압력은 더욱 강해졌고,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2011년 만에는 전후 최고치인 75엔 32센을 기록했다.

환율에 휘둘린 수출 기업의 ‘엔고 불황’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은행은 1986~87년 다섯 차례 금리를 인하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금융 완화는 주식과 부동산에 대한 투기를 과열시켰고, 거품 경제로 이어졌다. 1990년 초 거품이 터지기 시작하자 그 피해는 막대했다. 일본 경제는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잃어버린 30년’에 접어들었다.

반면 미국은 숨 고르기에 성공했다. 강달러로 인한 부담이 완화되어 일부 제조업이 숨통을 틔우면서 1990년대 초반까지 무역수지가 개선됐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냉전이 종식되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값싼 외국 제품이 대거 유입되면서 무역적자는 다시 급격히 확대됐다. 1985년 약 1200억달러였던 무역적자는 2024년에는 약 1조2000억달러로 10배 부풀어 올랐다. ‘플라자 합의’의 긍정적 효과는 단기적이었다.

◆‘환율 전쟁’ 내성 키워야

40년이 지난 지금, ‘제2의 플라자 합의’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올해 1월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동맹과 적대국 모두에게 약탈당했다”고 주장하며 세계 각국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이렇게 관세로 기선을 제압한 후 달러화 가치 절하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런 관측은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교사 격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스티븐 마이런 위원장이 쓴 보고서에 이른바 ‘마러라고 합의’가 언급되면서 부각됐다. 그는 보고서에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지키는 동시에 미국 제조업의 부활과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 해소를 위해서는 ‘약달러’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제2의 플라자 합의’ 같은 새로운 글로벌 통화 질서에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러라고 합의’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초만 해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 “황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강도 관세 정책 등 경제·통상·외교전략에 의미를 부여하는 ‘청사진’으로 인식되는 분위기다. 이를 보면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달러화 가치를 낮추려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동맹국들에게 달러 약세 협조를 요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40년 전인 1985년과 다르다. 당시 ‘플라자 합의’ 당사국들은 5개국에 불과해 합의에 도달하기 쉬웠다. 지금은 글로벌 공급망이 촘촘히 얽혀 있는데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 경제권이 급부상중이라 이해 관계가 훨씬 복잡하다.

일단 중국은 미국과 전략경쟁을 벌이고 있어 달러 약세에 협조할 이유가 없다. 유럽과 한국, 일본도 고물가와 성장둔화에 시달리는 처지여서 달러 약세를 감내하기 어렵다. 달러 약세가 곧바로 자국 통화 강세로 이어지는 탓이다. 따라서 트럼프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환율이 조작될 개연성은 미미하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압박 자체는 현실적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 미국의 금융시장 지배력과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에게 환율 조정 압력이 가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제2의 플라자 합의’는 아직 가설에 불과하지만 미국의 무역적자와 정치적 계산, 그리고 동맹국에 대한 압박 등 여러 요인이 맞물리면 유사한 국면이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교훈이다. ‘제2의 플라자 합의’가 실제로 성사될 지 여부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어떤 격랑도 막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일본의 사례를 통해, 급격한 환율 조정이 경제적 참극으로 이어짐을 목격했다.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외부 충격에 대비해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힘은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영서 기자 py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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