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하는 야구팀보다 강한" 지지정당 대물림…근데 '대전환' 올 수 있다고? [스프]

심영구 기자 2024. 10. 1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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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퍼민트] 유권자 지형 대전환, 새로운 기준은 "제도를 보는 시선?"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미국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지지 정당을 물어보면, 적잖은 경우 "우리 집이 대대로 민주당 지지하거든." 혹은 "부모님이 다 공화당 지지하셔서 나도 자연스레...."와 같은 답을 듣게 됩니다.

'지지 정당도 집안 내력을 따른다는 소린가?'

한 가족이라도 세대에 따라 정치 성향이 갈라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좀 이상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보다 땅덩이가 넓어 물리적 이동이 덜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도 상대적으로 드문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 성향뿐 아니라 전반적인 가치관이 대물림되기 쉬운 환경일 거란 생각도 듭니다. 사회·경제적 계층의 이동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큰데, 큰 변화가 없는 곳도 많을 겁니다.

그래서 1960년대 캘리포니아의 대학 캠퍼스와 진보적 커뮤니티에서 민권운동을 하다 만난 부모님 사이에서 나고 자란 해리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것도, 부동산 재벌가에서 나고 자란 트럼프가 정치에 뛰어들기 전까지 평생 사업가로 지내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거를 치르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순리처럼 보입니다. 제가 느슨한 관찰을 통해 내린 가벼운 결론은 "미국인의 지지 정당은 종교보다는 약하지만, 응원하는 야구팀보다는 강력하게 대물림된다"쯤 됩니다.

보통 미국에서 사는 지역, 성별, 인종, 학력, 재산, 소득 수준 정도를 알면 거의 예외 없이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 지지 정당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식처럼 적용할 수 있던 기준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서부 제조업 노동자들이 노조를 통해 조직돼 있던 시절에는 민주당을 지지하던 성향이 두드러졌는데, 이제는 노조 조직률이 낮아지는 등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백인, 남성, 제조업 노동자"라는 키워드만 준다면 공화당(트럼프) 지지자라고 예측하는 게 정답일 확률이 높아졌죠.

이를 "정치적 대전환" 혹은 "유권자 지형의 대전환"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Great Political Realignment"인데, 이를 그대로 옮기면 정치적 대전환이고, 당연히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개인이 아니라 특정 유권자 집단 수준에서 바뀌므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의역하면 유권자 지형이 근본적으로 바뀐다고 볼 수 있어서 그렇게 썼습니다.

"대전환"은 커다란 변화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통 적어도 10년에 걸쳐 변화가 일어나는데, 가장 최근 미국의 유권자 지형 대전환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60년대를 관통한 민권운동의 결과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 법이 통과되자 이를 탐탁잖게 여긴 남부의 보수적인 백인 유권자들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지지 정당을 바꿉니다. (그때는 아직 TV 방송사에서 민주당을 파란색, 공화당을 빨간색으로 표시하기 전이었지만, 블루 스테이트가 빨갛게 변한 겁니다.) 이어 공화당은 "작은 정부", "경제적 보수주의"를 앞세워 더 많은 보수적 유권자를 끌어들였습니다.

인종 문제가 직접적인 정치적 대전환의 계기가 된 건 그보다 1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1850년대 휘그당이 분열 끝에 사라지면서, 노예제에 반대하는 북부의 산업 세력이 주도하는 정당이 탄생했는데, 그 정당이 바로 공화당입니다. 그리고 1860년대 공화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돼 (이후 내전까지 치르면서) 노예제를 철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입니다. 현재 공화당과 트럼프를 지지하는 세력 중에는 소수지만 백인우월주의 조직이 있는데, (100년 넘는 세월이 물론 짧지는 않지만,) 현재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들 중 일부의 증조부, 고조부 대에선 노예제를 철폐하려는 공화당 소속 "북부 양키놈들"을 향해 총칼을 겨눴을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 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3523 ]


트럼프와 정치적 대전환
앞서 언급했듯 대전환은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곧 대전환이 한창 진행 중이라도 이를 정확히 느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대대로 공화당만 찍었다는 사람 중에 트럼프가 아니라 해리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러 눈에 띕니다. 반대로 원래대로라면 민주당을 찍을 법한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현상도 보이죠.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마가(MAGA) 싫으면 당장 꺼지세요!" 그 이후... 미국 유권자 지형 대전환 오나
[ https://premium.sbs.co.kr/article/DChOiehkH ]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가 애리조나주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터닝 포인트라는 단체를 취재하고 나서 쓴 장문의 칼럼을 보면, 분명 대전환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트럼프가 처음 당선된 8년 전에 그 문턱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4년 동안의 첫 집권기, 2020년 선거에서의 패배와 불복으로 인해 일어난 정치적 폭력과 혼란을 거치며, 트럼프와 트럼프주의를 뜻하는 마가(MAGA) 지지층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층과 몇 가지 특징에서 뚜렷이 구분됩니다.

트럼프가 마가 운동을 이끌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평을 받는 부통령 후보 J.D. 밴스가 내세우는 주장이 지난 1960년대 대전환 이후 공화당의 가치, 비전, 정치적 강령과 비슷하면서도 엄연히 다른 부분이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밴스는 무조건 작은 정부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대신 세계화와 기술 발달로 소외되고 배제되고 낙후된 지역에 사는 미국인들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이들을 지원해 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 값싼 노동력을 찾아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이나 이윤을 노동자와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는 대기업을 규제하고. 필요하면 처벌해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반독점 규제당국의 상징과도 같은 리나 칸 연방거래위원장의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죠.
[ https://premium.sbs.co.kr/article/A6-KOBKdEgu ]

트럼프가 내세우는 관세 정책도 트럼프의 말대로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어쨌든 "당신의 삶을 힘들게 한 세계화주의 엘리트들을 응징할 적임자는 나"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직관적으로 알맞은 공약입니다.
[ https://americaknow.substack.com/p/85b ]


기술 발전과 세계화가 낳은 승자와 패자
트럼프가 대변하는 지금의 정치적 대전환은 어디서 시작됐을까요? 그 힌트를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다론 아체몰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 교수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역사와 자료를 검토하고 분석해 실로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연구를 해온 정치경제학자들이지만, 이들의 연구를 대표하는 저서 두 권
[ https://www.nobelprize.org/prizes/economic-sciences/2024/press-release/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와
[ https://www.yes24.com/Product/Goods/7745135 ]"권력과 진보"를 중심으로 거칠게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 https://americaknow.substack.com/p/eff ]

먼저 "권력과 진보"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지난 몇십 년 사이 컴퓨터의 놀라운 발달로 소수의 사업가와 기업계 거물이 지극히 부유해졌다. 그러는 동안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대부분의 미국인은 뒤로 밀려났고 많은 이들의 실질소득이 심지어 감소했다.

아체몰루와 존슨 교수는 기술이 발전한다고 그 혜택과 번영을 모두가 알아서 공유하게 되는 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기술 발전은 오히려 필연적으로 극소수의 승자와 대다수의 패자를 낳습니다. 이를 고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경제적 혜택을 독점하는 이들은 정치적 권력마저 독점하게 되고, 억압적인 체제가 등장합니다. 사회의 권력이 소수에 집중돼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수가 배제되면, 불만이 쌓이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집니다.

아체몰루와 로빈슨 교수가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기술 발전의 혜택과 번영을 공유하기에 더 좋은 제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더 많은 사람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경제적인 이윤을 더 많은 사람이 공평하게 나눠 갖는 포용적인 제도(inclusive institutions)가 있는데, 포용적인 제도를 가꾸고 유지하는 나라는 번영에 이르고, 반대로 의사결정 과정을 소수의 엘리트 권력이 독점하고, 이들이 경제적인 이윤과 사회 전반의 부를 독점하는 착취적인 제도(extractive institutions)에 잠식되는 나라는 실패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로 든 사례 가운데 남·북한을 비교한 장도 있어 주목을 받기도 했죠.)

두 점을 이어 현재 미국 정치에 적용해 보면, 기술 발전과 세계화가 승자와 패자를 나눠 놓았는데, 미국의 경제 체제는 충분히 포용적인 제도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사는데도 자꾸만 뒤처지고, 심지어 부모 세대보다도 먹고사는 게 힘들어진 데 좌절한 사람들의 불만과 분노가 마른 장작처럼 쌓여있던 겁니다. 트럼프의 등장은 거기에 불을 지른 셈이죠.

물론 트럼프가 제시하는 비전이나 실제로 첫 번째 행정부에서 보여준 정책이 민주당과 미국의 경제 엘리트가 편 정책보다 더 포용적인 제도였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대규모 부자 감세, 일방적인 규제 완화, 외국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권위주의적인 성향은 착취적인 제도에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이 된 백인 노동자들은 늘 입을 모아 "트럼프는 적어도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우리의 어려움에 공감한다"고 말합니다.

골드버그도 칼럼에서 유권자 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부분을 직접 언급합니다.
 
트럼프 시절을 거치면서 공화당은 노동자 계층에서 점점 더 우위를 점했고, 민주당은 도시와 근교의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 좀 더 넓게 보면 미국 정부나 공공기관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는 이들에게서 표를 얻었다.

원문에서 골드버그는 "civic institutions"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를 "시민적 제도"라고 옮기면 뜻이 와닿지 않을 것 같아 정부 또는 공공기관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아체몰루 교수가 지적한 대로 (포용적인) 제도의 효능을 경험했거나 신뢰하는 이들이 권위주의의 부상을 제어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동력이 된다는 점과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글자 그대로 "시민적 제도"라고 옮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번 선거에서 해리스와 트럼프, 또 2020년대 들어 민주당과 공화당을 가르는 기준이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는 "뉴딜과 복지국가 대 경제적 보수주의와 규제 완화"와 같은 도식적인 기준이 더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도를 보는 시선", 즉 제도를 신뢰하느냐 아니면 정치·경제 제도를 (민주당과 좌파, 워싱턴 D.C.의 딥스테이트, 여기에 월스트리트를 포함한 금융 부문의) 엘리트들이 나 같은 사람을 착취하기 위해 물린 재갈로 보느냐, 그래서 "우리를 여기서 구원해 줄 트럼프를 지켜내느냐"가 이번 선거뿐 아니라 앞으로 한동안 미국 유권자를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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