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53>] 필리프 4세의 통화정책… 디밸류에이션과 리밸류에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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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위대한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자본주의의 맹아(萌芽)가 이미 중세 이전에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가 자본, 특히 화폐의 운동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시계(Longue durée)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왕이 법정화폐 1단위(1리브르)에 포함된 귀금속(은)의 양을 줄이면(4g→3g) 해당 통화의 국내 환율(1리브르=은 4g→3g)과 화폐의 구매력이 낮아지므로(100→75)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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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위대한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자본주의의 맹아(萌芽)가 이미 중세 이전에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가 자본, 특히 화폐의 운동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시계(Longue durée)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의 경제학자 브래드퍼드 들롱(Bradford DeLong)은 ‘20세기 경제사(Slouching To-wards Utopia)’라는 책에서 브로델과 비슷한 생각을 기술한 바 있다.
11~13세기 십자군 원정이 끝난 후 유럽에서는 정치, 경제, 종교의 모든 방면에서 대격변이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는 중세의 봉건제가 무너지고 프랑스를 필두로 중앙집권적인국가(d’Edat)가 출현했고, 경제적으로는 십자군 원정로의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국제적 무역로가 형성됐다.
성전기사단(Templar)은 국제적 투자은행으로 변신했으며,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교회가 분열돼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교황이 난립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격변의 한가운데에는 프랑스의 미남왕(美男王· Le Bel) 필리프 4세(Philippe IV)가 있었다.
대내 환율과 대외 환율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전 세계의 화폐는 금본위제(Gold Standard)를 따랐다. 이 제도하에서는 달러, 파운드, 프랑이 각각 일정한 귀금속의 중량과 연동돼 있었다. 이들 통화를 들고 조폐국이나 은행에 가면 해당 중량의 귀금속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금본위제하에서는 법정통화(표상)와 귀금속(실질)의 교환 비율을 의미하는 대내 환율(국내 환율)과 여러 국가의 법정통화 간 교환 비율을 의미하는 대외 환율(국제 환율)이 존재했다. 하지만 1971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불태환 선언’ 이후 금속화폐 제도가 붕괴하고 명목화폐 제도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에는 대외 환율만 존재하게 됐고, 종이(돈)를 들고 중앙은행 창구에 가봤자 금 대신 종이를 내줄 뿐이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경제 용어 중에 디밸류에이션(devaluation·평가 절하)과 디프리시에이션(depreciation·가치 하락)이라는 용어가 있다. 둘 다 자국 통화의 가치 하락을 의미하는데, 전자는 금본위제도하에서 화폐의 소재 가치(귀금속의 중량)가 감소한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명목화폐 제도하에서 대외 환율 변화에 따라 자국 통화의 가치가 하락한 것을 의미한다. 원래 디프리시에이션은 감가상각(減價償却)이라는 회계 용어로 부동산, 자동차 등 자산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노후하면서 줄어든 자산 가치를 장부가에서 소거하는 회계 처리 방식을 뜻하는데, 경제학자들이 이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디밸류에이션
디밸류에이션의 사례를 들어보자. 프랑스 왕이 법정화폐 1단위(1리브르)에 포함된 귀금속(은)의 양을 줄이면(4g→3g) 해당 통화의 국내 환율(1리브르=은 4g→3g)과 화폐의 구매력이 낮아지므로(100→75)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발생한다. 또한 해당 통화의 대외 가치가 하락하므로(은 4그램→3그램) 해당 통화의 대외 환율이 하락한다(파운드 : 리브르=1 : 1→1 : 0.75). 필리프 4세는 이러한 화폐의 운용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1294년 아키텐(보르도)의 영유권을 두고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고 1297년 프랑스의 속령 플랑드르(벨기에)가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전쟁이 벌어지면 국가는 통화를 증발(增發)하거나 국채를 발행해 전쟁 자금을 조달한다. 전쟁이 계속되고 재정 적자가 이어지자, 필리프 4세는 신용이 하락해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없었고, 귀금속이 부족해서 통화를 증발할 수도 없었다. 이제 필리프 4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디밸류에이션밖에 없었다. 왕립조폐국은 은 함량이 높은 기존 주화를 수거한 뒤 이를 녹여 은 함량이 낮은 새로운 주화를 발행해 유통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인은 주화를 왕립조폐국으로 가져가는 것을 꺼렸고, 은을 해외로 가져가 강력한 외국 통화로 교환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 결과 1301년 프랑스에서는 은이 극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디밸류에이션으로 인해 필리프 4세는 1297~99년 141만리브르의 수입을 얻었다. 107만리브르의 전쟁 비용을 지불하고도 34만리브르의 순이익을 남긴 것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인플레이션이 조세(inflation tax) 역할을 한 것이다.
전쟁과 인플레이션
디밸류에이션이 초래한 인플레이션으로 채권자(귀족, 교회)는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피해를 입었다. 대출금의 명목 가액은 동일하지만, 은 함량이 높은 강한 통화로 대출을 실행하고 나서 은 함량이 낮은 약한 통화로 대출금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채권자가 손해를 입었다면 채무자는 이익을 얻어야 했을 텐데 실제로는 그들도 손해를 입었다.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화폐의 구매력이 침식되자 채무자(하층민)의 생활이 팍팍해진 것이다. 그 결과 사회적 불안이 발생했다. 1303년까지 유통 중인 리브르의 가치는 3분의 1로 감소했다.
1302년 프랑스가 자랑하던 중기병이 플랑드르 농민군에게 패배하자 프랑스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당시 기병은 귀족으로만 구성되는데, 말은 전쟁 도구이자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기병대의 모든 장구는 금과 은으로 치장돼 있었다. 플랑드르 지방에는 늪지가 많았기 때문에 중무장한 프랑스 기병이 기동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장창으로 무장한 플랑드르의 경보병에게 대패하고 만 것이다. 당시 전장에는 프랑스 기병의 값비싼 마구가 널려 있었기 때문에 이 전투를 황금 박차 전투(Bataille des éperons d'or)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전투로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프랑스는 15개월 동안 통화가치가 37% 하락했고, 정부는 금과 은의 수출을 금지하는 새로운 법령을 공포했다. 필리프 4세는 신하들에게 이들이 소유한 은그릇을 국가에 헌납해 주화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사람들이 상품의 형태로 부를 해외로 빼돌리려 하자, 필리프 4세는 수출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필리프 4세는 교황으로부터 이교도(영국, 플랑드르) 정벌을 목적으로 한 ‘십자군 십일조’의 징수를 승인받아 이를 시행했다. 필리프 4세는 왕실 보물을 담보로 성전기사단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다. 당시에는 이러한 모든 결정이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징세와 차입은 국왕의 지고한 권한(Hoheitsrecht)이었고,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이 이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돈의 가치를 조작하는 중앙은행의 기술은 해박한 금융 지식이나 전문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중세 이후 유럽 사회에 만연한 국왕의 돈 장난 경험을 포장(명칭)만 바꿔서 재활용하는 것일 뿐이다.
리밸류에이션
디밸류에이션이 가치(value)를 떼어내는(de) 것이라면 리밸류에이션(revaluation)은 가치를 다시(re) 붙이는 것이다. 플랑드르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프 4세는 1306년 새로운 주화의 은 함량을 전쟁 이전(1285년) 수준, 즉 리브르당 은 3.96g으로 높이도록 명령했다. 오늘날로 치면 중앙은행의 ‘난폭한 금리 인상(Giant Step)’에 해당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필리프 4세의 리밸류에이션에 따라 채무자는 새롭고 강력한 통화로 대출금을 갚아야 했기 때문에 생활이 더욱 궁핍해졌다. 1306년 겨울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필리프 4세는 자신의 궁전을 버리고 피난해야 했다. 오늘날과 달리 옛날 사람들은 국가의 정책 실패를 폭력으로 응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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