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냐’ 소리까지 들었다”…30대 직장인 400만원짜리 중고 카메라 산 이유가 [다시 사는 사람들]

전종헌 매경 디지털뉴스룸 기자(cap@mk.co.kr) 2026. 5. 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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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거래의 상식이 바뀌고 있다. 한때 중고시장은 ‘새것보다 싸게 산다’는 실용적 소비의 영역으로 여겨졌지만, 이젠 ‘취향’을 사고파는 가치를 거래하는 시장으로 변하고 있다. 희소성 있는 물건을 고르고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 자체가 소비의 목적이 되면서 중고시장은 단순한 재판매 시장을 넘어 가치와 문화를 향유하는 자리가 되고 있다. 손때 묻은 오래된 필름 카메라, LP 등 시간의 흔적과 희소성이 깃든 제품을 찾아 나서는 이들은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만의 취향과 경험을 소비한다. 이 과정에서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커뮤니티가 형성되기도 하고 다양한 직업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전업 리셀러는 희소성 높은 상품을 발굴해 새로운 유통 가치를 만들고, 빈티지 큐레이터는 시대성과 감성을 선별해 소비자와 연결한다. 중고거래 시장에서 ‘다시 사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들을 조명해 본다.[편집자주]
2005년 단종된 필름카메라 ‘콘탁스 T3’.[번개장터]
“이거 중고 맞아요?”

직장인 김모(34) 씨가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400만원 가까이 주고 산 물건은 2005년 단종된 필름카메라 ‘콘탁스 T3’다. 웬만한 최신 미러리스 카메라보다 비싸다. 주변에선 “미쳤냐”, “제정신이냐”, “돈이 남아도냐”는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지만 김씨는 태연하다.

“이 카메라가 찍는 색감은 디지털로 못 만들어요. 단종됐으니까 중고 아니면 방법이 없죠.”

그에게 중고는 ‘싼 대안’이 아니라 ‘유일한 선택지’다.

김씨 같은 사람이 늘고 있다. 새 제품이 아니라 단종된 바로 ‘그 모델’, 절판된 바로 ‘그 앨범’이어야 하는 사람들. 이들이 몰리는 곳이 바로 중고 플랫폼이다.

‘어른이 동심’ 피규어 거래, 1년 만에 2배↑
숫자가 말해준다. 리커머스 플랫폼 번개장터에 따르면 피규어·레고·프라모델 등이 몰려 있는 키덜트 카테고리의 거래 건수는 올해 1월에만 전년 동월 대비 110% 증가했다. 1년 사이 약 2배가 된 셈이다.

빈티지 수집품 시장도 가파르다. 예술·희귀·수집품 카테고리는 거래가 94% 뛰었고, 구매자는 74% 증가했다. LP·빈티지 기타 등이 거래되는 음반·악기 카테고리도 80% 성장했다.

취미·수집 관련 주요 카테고리를 합산하면 올 1분기(1~3월) 거래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58%, 구매자 수는 44% 늘었다. 중고거래 시장 전체의 성장세를 취미·수집이 끌어올리고 있는 구조다.

‘싼 물건’이 아니라 ‘못 사는 물건’을 산다
재미있는 현상은 이 시장의 문법이 일반 중고거래와 다르다는 점이다. 보통 중고거래를 떠올리면 ‘새 제품보다 싸니까 산다’는 말이 나올법하지만 이 시장은 다르다.

취미·수집 중고거래에선 정가보다 비싼 거래가 일상이다. 단종된 한정판 피규어, 초판 LP, 80년대 빈티지 앰프 같은 물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가격이 오른다. 콘탁스 T3만 해도 단종 당시 출고가(약 120만원)의 몇 배를 훌쩍 넘긴다. 중고가 아니라 사실상 ‘경험재(경험을 통해서만 가치를 확인하는 상품)’ 시장이다.

이 흐름을 관련 업계에선 ‘리커머스(recommerce)’라고 부른다. 단순히 물건을 되파는 게 아니라, 중고거래 자체가 하나의 소비문화이자 산업이 됐다는 의미다. 국내에서는 번개장터가 회장사로 있는 글로벌 리커머스 산업협회가 활동하고 있고, 해외에서도 리커머스를 패션·럭셔리·전자기기·수집품 등으로 세분화해 독립된 시장으로 추적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취미 수집품이 중고거래의 다음 성장 엔진”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중고거래의 핵심이 생활용품이나 전자기기의 가성비 소비였다면, 최근에는 취미·수집 카테고리가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새로운 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종 모델이나 한정판을 찾는 수요가 플랫폼의 검수·안전결제 서비스와 만나면서 고가 거래에 대한 심리적 허들이 크게 낮아진 것이 핵심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400만원 가까운 중고 카메라를 사는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닌 셈이다. 새것으로는 살 수 없는 물건을, 믿을 수 있는 구조 안에서 자기 취향대로 고르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과거 중고거래의 키워드가 ‘절약’이었다면 지금 이 시장을 움직이는 건 ‘취향’이다. 그리고 그 취향의 크기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탑재된 카메라로 손쉽게 사진을 찍는 시대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2030 여성들 사이에서 빈티지 디지털카메라를 찾는 유행이 일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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