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 목욕 당번인가 봐'
지난 22일(이하 한국시간)이다. 시범경기가 한창이다. LA의 두 팀이 붙었다. 다저스와 에인절스의 일전이다.
초반부터 화끈하다. 다저스가 3회까지 10점을 뽑았다. 김혜성(27)이 3타점(2안타)을 기록한 게임이다.
오타니 쇼헤이(31)는 1번 지명타자다. 타석에는 그저 그랬다. 첫 타석 내야 안타(1회)가 유일하다. 다음은 땅볼(2회), 삼진(3회)으로 돌아섰다.
그게 끝이다. 그리고는 바로 교체됐다. 몸풀기 아닌가. 세 타석만 소화하고 빠진다. 그게 이상할 리 없다.
하지만 귀가 장면이 화제를 모은다. 바뀐 시점은 3회 초다. 일이 끝나자, 재빨리 짐을 챙긴다. 그리고는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여전히 게임은 진행 중이다. 동료들은 덕아웃에서 열심히 근무한다. 그 앞을 쏜살같이 달려간다. 관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멋쩍은 미소만 남긴다. 그래도 즐거운(?) 조기 퇴근이다.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SNS에 여러 댓글이 달린다. 그중 하나다. “오늘 딸 목욕 당번인가 보다.”
탁월한 상상력이다. 이도류도 어쩔 수 없다. 아빠는 아빠다. 육아에 열외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다른 사연도 있을지 모른다. 바로 ‘귀국’이다.
그가 일본에 도착한 것은 이틀 뒤다. 24일 오후에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WBC 일본 대표팀에 합류하기 위해서다.
아마도 짐 꾸리고, 공항으로 이동하고…. 그런 것 때문에 퇴근을 서둘렀던 것 아닌가.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비행시간, 시차 등을 고려하면 그렇다.
구리야마 감독의 묘한 말
흥미로운 것은 항공편이다. NPB(일본야구기구)가 제공하는 전세기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 공백을 줄이려는 배려일 것이다. 이번에는 오타니를 위해 전용기를 띄웠다. 스즈키 세이야(시카고 컵스)와 요시아 마사타카(보스턴 레드삭스)를 위한 것은 별도로 마련됐다.
같은 다저스 소속의 야마모토 요시노부는 27일 귀국한다. 이때도 역시 전세기가 준비될 것이다. 만만치 않은 거액이 투자된다.
아무튼.
분위기가 슬슬 달궈진다. WBC가 며칠 앞이다. 내달 5일(목) 개막을 앞뒀다. 중요한 관심이 모이는 곳이다. 지난 대회 MVP다. 원 톱 주연 배우 오타니의 거취 문제다.
이미 본인의 의견은 밝혔다. “타석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공식적인 출전 명단에도 그렇게 돼 있다. 2023년 대회 때는 포지션이 'TWO WAY PLAYER(이도류)’라고 적혔다.
이번에도 일본은 그의 위치를 ‘투수’로 분류했다. 그런데 최종 엔트리에는 ‘지명타자(DH)’로 표기됐다. 아무래도 등판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묘하다. 일본 쪽 반응은 다르다.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며칠 전이다. 다저스 캠프에 손님 한 명이 방문했다. 구리야마 히데키(64)다. 2023년 대회 때의 일본 대표팀 감독이다. 아울러 오타니의 니폰햄 시절 은사이기도 하다.
스승과 제자가 비공개 만남을 가졌다. 끝난 뒤 일본 기자들이 집요하게 묻는다. 오타니의 등판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구리야마의 답변이 흥미롭다.
“절차상 여러 문제가 걸릴 수도 있다. 등록상의 걸림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면, 그게 (애런) 저지와 만나는 상황이라도. 그는 아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등판을 준비할 것이다). 어떻게 막아도,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로버츠 감독의 구시렁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2023년 대회 결승 때다. 미국과 일본이 만났다. 스코어는 3-2, 한 점 차이. 오타니가 9회에 등판했다. 팀의 7번째 투수였다.
2사 1루에서 만난 타자는 마이크 트라웃이다. 풀카운트 접전이 벌어졌다. 6구째 스위퍼가 격렬하게 꺾인다. 배트는 턱도 없다. 크게 헛돌고 만다. 헛스윙, 삼진. 마지막 27번째 아웃이 선언되는 순간이었다.
역대급으로 대단한 장면이다. 대회 사상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WBC를 상징하는 한 컷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볼 수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일단 트라웃이 불참한다. 선발되지 못한 탓이다. 대표팀이 될 성적을 못 냈다. 지난 시즌 130경기에서 타율 0.232, 26홈런, OPS 0.797에 그쳤다.
여기에 투타니(투수 오타니)도 휴업이다. 이유는 뻔하다. 다저스가 질색한 탓이다.
앞장선 것은 감독이다. 데이브 로버츠가 월드시리즈를 마친 뒤부터 단속에 나선다. 그리고 겨우내 구시렁거렸다. 정리하면 이런 얘기다.
“WBC는 매우 중요한 대회다. 선수들이나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다. 일단 출전 여부는 당사자(선수)가 결정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우리’ 선수들은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일본 3인방 얘기를 꺼낸다. 오타니 쇼헤이, 야마모토 요시노부, 사사키 로키에 대한 부분이다.
“이들이 참가한다면 응원할 것이다. 그런데 걸리는 부분이 많다. 요시(야마모토)는 많이 던졌고, 로키는 (부상에서) 늦게 돌아왔다. 오타니 역시 올해 많은 이닝을 던졌다. 모두 보호하고 싶다. 2026시즌 준비를 위해 잘 쉬었으면 좋겠다.”
구단도 비슷하다. 차마 “안 된다”고는 못 한다. 그런데 고위층은 다들 애매한 스탠스다. 기자들 질문에 즉답을 피하기 일쑤다. 언론들은 ‘소극적인 반응’이라고 관측했다.

실망스러운 이도류 포기
그러나 소용없다. 당사자의 뜻은 명확했다. 곧 참전 의사를 밝혔다. 역시 SNS를 통한 소통이었다.
첫 줄은 영어다. 시즌 동안 팬들의 응원에 감사하고, 열심히 해서 내년에 다시 만나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문제는 다음이다. 일본어로 썼다. ‘일본을 대표해서 다시 플레이할 수 있게 돼서 기쁘다.’ 감독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뜸 결론부터 지르고 본다.
그런데 끝이 아니다. 1월이 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감독의 표정이 밝다. 그러더니 자신 있게 발표한다. “오타니가 WBC에 나간다. 하지만 투수로는 뛰지 않기로 했다. 이건 본인 뜻이다.”
일설에는 보험 문제가 거론됐다. 부상 전력 때문이다. 승인이 어렵다는 보도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MVP의 입에 관심이 몰린다. 사실상 감독의 말에 수긍하는 멘트였다.
다만, 약간의 차이는 있다. 자신의 ‘결심’ 혹은 ‘의지’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설득이나 의견이라는 얘기도 없다. 대신 (구단과) ‘상의’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보험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그 문제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정리하면 이런 것 같다.
WBC에 대한 뜻은 변함없다. 그러나 투타 겸업은 부담이 크다. 압박이 심했을 것이다. 감독과 프런트의 걱정을 왜 모르겠나. 결국 수정안이 등장했다. ‘투수 포기’라는 절충이다.
뭐, 이해를 못 할 바는 없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쉬움이 크다. 이제까지 모습과 다르기 때문이다.

한 가닥 기대
그를 상징하는 단어는 딱 하나다. ‘이도류’다.
그의 이력은 이걸 지키기 위한 여정이나 다름없다. 일본 시절부터 그랬다. 수많은 반대와 비판, 걱정과 우려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걸 모두 이겨냈다. 그래서 더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실망이다. 처음으로 ‘포기’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현실, 타협 같은 피곤한 말이 섞인다. 왠지 영웅의 낯선 얼굴을 보는 것 같다.
그래도 혹시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은사 구리야마의 말이다.
아마도 마지막, 절체절명의 장면일 것이다. 구단의 신신당부, 로버츠 감독의 안절부절, 보험에 대한 걱정…. 그런 것들을 모두 벗어버린다. 그리고 결연한 눈빛이 된다. 흙투성이 유니폼으로 마운드로 달려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에필로그
오타니는 WBC 기간에도 투구 훈련을 계속한다. 다저스가 제공한 프로그램도 갖고 떠났다. 이건 MLB 정규 시즌을 대비한 과정이다. 즉, 당장 던질 수 있는 몸 상태는 충분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