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O 리포트] 빛 바랜 이복현의 이유 있는 도발

조회 722025. 4. 2.

무산됐지만 상법개정 추진배경 잊지 말아야

부당한 경영권공격 방어 등 보완책 마련해야

지난 1년여 동안 숫한 논란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던 상법 개정이 정부의 재의요구권에 가로막혀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한덕수 대행은 법 개정 취지는 공감하지만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에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한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직전 금융위원회는 일반주주 이익보호 강화를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방향을 발표했다. 유상증자 물량의 20% 이내에서 모회사 일반주주에게 우선 배정하고 상장법인의 합병가액 산정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방안 등이 주요 핵심이었다.

하지만 대주주의 전횡에 대한 시장과 일반주주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다. 기업 지배구조 투명화와 주주권익 보호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면 기업경영의 근본을 규율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의 금융정책 실행을 책임지고 있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상법 개정안의 재의요구권 행사는 부적절하다며 '직'을 걸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그동안 상법 개정을 기대하며 정치권과 금융당국을 지켜보고 있던 시장의 실망이 크다. 정부 여당과 야당의 추가적 논의도 탄핵정국에 묻혀 전망이 불확실하다. 특히 미세한 정보에도 반향이 큰 금융시장에서 정책의 기획과 실행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간 이견 표출로 투자자는 불안하다. 정책을 조율하고 실행할 책임이 있는 집권 여당과 행정부 부처가 사전에 내부적 이견을 조율하지 못해 시장에 혼선을 초래한 것은 아주 큰 문제다. 하지만 배경이나 의도는 알 바 아니지만 이복현의 도발은 나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한덕수 대행도 상법 개정의 취지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번 3.13 상법 개정안의 방향은 일반주주의 권익은 보호하고 대주주의 전횡은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크게 두가지다. 우선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했다. 이사는 총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전체 주주를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규정한 것이다. 주주를 대리하는 이사가 주인인 주주의 이익을 보호할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모든 주주가 같은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따라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두번째는 일정조건(자산규모 등) 이상의 상장기업은 전자투표제와 비대면 전자주총 시스템을 의무적으로 도입하는 조항이 신설됐다. 주총장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편법을 동원하는 일이 없어지고 주총의 의사결정 과정이 보다 투명해질 것으로 기대했었다. 국내 주식시장은 형식적인 주총과 정보공개 제한 등으로 지배주주 중심의 의사결정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편법승계, 3자배정, 유상증자 등 다수 주주의 권익이 침해되고 자본시장 신뢰 저하로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한덕수 대행은 거부권 행사의 이유로 '애매모호한 법조문'과 일반주주의 '소송 남발'을 지적했다. 총주주와 전체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내용이 현실에서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이해관계가 다른 소수주주의 소송이 빈번해지면 기업경영 의사결정에 차질이 생기고 이사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증가로 경영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상법개정의 핵심 목적은 자본시장 신뢰회복이다. 소수 주주의 권익 침해와 재벌 대주주의 전횡을 줄여야 가능한 일이다. LG SK CJ 한화 현대백화점 OCI 등 대부분의 주요 재벌 대기업은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사를 설립한 후 성장성이 높은 핵심 계열사를 중복으로 상장해 자금을 모았다. 삼성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이나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유상증자 논란 등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대주주는 적은 지분으로 그룹 계열사를 확장하며 지배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자사주 등 주어진 제도를 십분 활용했다. 물적분할한 자회사를 상장하는 과정에서 기존 모기업의 소수 주주는 주가하락과 자회사 지분 희석으로 늘 경제적 손실을 경험한다. 시장에 대한 투자자 신뢰가 훼손되고 대주주를 제외한 시장 참여자 모두는 패자로 남는다.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고 소수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려는 상법개정의 취지는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현행제도의 부작용이 크다는 의미다. 하지만 변화를 수반하는 게임의 룰이 바뀌면 당장 불확실성이 커지고 기존 질서에 익숙한 이해관계자는 불편하다. 재계는 이해를 달리하는 소수주주의 집단소송 남발을 걱정한다. 행동주의 펀드의 과도한 배당요구와 터무니없는 경영개입으로 단기이익 추구행위에 휘둘릴 것을 우려한다.

여기에다 인수합병이나 대규모 투자 등 긴 호흡이 필요한 장기적 경영행위가 위축돼 기업의 근원적 경쟁력이 저하될 것이라 주장한다. 단기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걱정거리다. 그럼에도 '재의요구권 행사의 판단기준은 국익과 시장에 미칠 장기적 영향이어야 한다'는 이복현 원장의 주장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모든 제도변화는 단기적으로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영향이 늘 공존한다. 따라서 방향이 맞으면 제도적 보완책을 강구해 부작용을 줄이며 실행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사의 정당한 경영판단에 대한 면책조항을 구체적으로 하위법령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분구조가 취약한 중소중견기업의 경영권 보호를 위한 의결권 제한 등 현실적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주주의 권익 보호와 기업경영의 자율성이 적절히 균형을 이뤄야 한다. 정부가 제안한 자본시장법 개정은 소수 주주의 권익보다 대주주의 경영권 보장에 방점이 찍혀 있다. 현재의 기울어진 저울추를 바로잡기 크게 부족하다는 평가다.

이복현 원장은 '기업경영권 보호도 중요하지만 소수 일반주주 보호와 지배구조 투명성을 강화하는 것이 자본시장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시장에 혼선을 불러온 잦은 돌출행동과 달리 금감원의 상법개정 대응을 정치공세로만 치부할 수 없을 것 같다. 자본시장 안정과 투자자 보호 관점에서 시장과 소통하며 정리된 소신발언으로 이해된다. 시장의 중립성과 공공성을 유지하고 투자자 보호와 공정한 시장 감시자로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원칙으로 판단했다고 믿고 싶다. 잔여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사의까지 표명한 이복현 원장이 정부 여당의 정책방향을 바꿀 힘은 없어 보인다.

자본시장법과 상법 개정 가운데 어디에서 출발하든 기업 지배구조 투명성과 소수 일반주주 보호의 기본원칙에 충실한 대안이 만들어져야 한다.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시각이 충돌할 때 그 이유와 근거에 주목해야 한다. 정무적 판단도 중요하지만 원칙이 없는 의사결정은 혼란만 키운다. 국내 자본시장은 소액 투자자뿐 아니라 글로벌 자본시장과 밀접히 연계된 기관과 외국인 투자자도 많다. 향후 다시 진행되는 법안 개정 논의 과정에서 기업 지배구조와 주주권익 보호의 원칙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 것인지 해외 투자자도 예민하게 바라보고 있다.

금융의 중심은 돈이 아니라 신뢰다. 신뢰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된다. 상법개정을 둘러싼 논란이 당장은 기업경영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자본시장의 신뢰를 높이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울리는 투자환경을 조성하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믿는다.

허정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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