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굴기(倔起).
이 단어는 '몸을 일으킴'과 '보잘것없는 신분으로 성공해 이름을 떨침'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기자가 학창시절 처음 이 표현을 접한 분야는 축구였다. '축구 굴기'에는 축구광 시진핑 주석이 자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축구경기에서 우리나라를 만나기만 하면 번번이 주저앉는 중국 대표팀의 모습을 보며, 중국의 '굴기'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바이오 업계를 취재하면서부터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바이오 산업에서만큼은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은 지금 그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무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15년 '중국제조 2025'를 내세우며 10대 핵심 산업 중 하나로 바이오의약을 지정했다. 이후 막대한 자본과 정책 지원, 인재 영입을 통해 산업 전반의 역량을 끌어올렸다.
이 같은 변화는 불과 몇 년 사이 급격히 현실화됐다. 2021년 무렵부터 중국 기업들은 임상시험에서 성과를 내고, 블록버스터 신약 개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과거 '가짜약 온상' 이미지는 빠르게 벗겨졌고, 세계 투자자본이 앞다퉈 중국 바이오 기업들로 몰려들고 있다. 상반기에만 60조원이 넘는 투자가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인재 귀국 러시도 힘을 보탰다. 초고액 연봉을 마다하고 글로벌 빅파마를 떠나 귀국한 연구자들이 중국 신약개발 현장에 합류하면서 연구개발(R&D) 속도가 배가됐다. '쌍일류대학' 정책으로 수백조원을 투입해 인재 양성 인프라를 다진 점도 강력한 뒷받침이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자본과 인재, 시장과 정책이 맞물리며 중국식 굴기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미국조차 위기감을 갖추지 못한다. 미국 전문가들은 '3년 안에 따라잡힌다'는 경고를 내놓고 있고, 워싱턴에서는 중국 바이오 기업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생물보안법의 재추진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생물보안법안에 대한 중국 기업들의 로비는 계속되고 있다. 이같이 글로벌 빅파마 입장에서도 더 이상 중국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면서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문제는 이 경쟁구도가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전쟁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기업들 역시 정면으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기술수출(LO) 모델에서 기대성과를 만들어왔지만, 글로벌 시장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단순한 기술이전만으로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게 됐다. 빅파마들이 중국과 협력한다면 한국 기업의 설 자리는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국의 가장 큰 취약점은 상업화 역량이다. 신약을 개발해도 글로벌 임상 네트워크 구축이 더딘 탓에 허가까지 이어가는 데 박차를 가하기 쉽지 않다. 자금조달도 열세다. 미국처럼 자본시장이 뒷받침되는 것도 아니고, 중국처럼 정부 주도의 대규모 보조금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엔데믹 이후 '돈맥경화' 현상은 이런 우려를 키운다. 결국 계약 체결 이후의 길을 열어가지 못한다는 구조적 약점이 반복된다.
인재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중국은 해외 인력을 대거 영입하며 기술과 경험을 흡수하는 반면, 한국은 인재를 해외로 내보내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바이오 산업은 장기 투자가 필요한 영역인데, 국내에서는 안정적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인재 확보 경쟁에서 밀리면 기술 축적과 산업 성장 속도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위기의식'이 아니다. 기술수출 이후 단계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머지않아 중국의 그늘에 가려질 것이다. 글로벌 임상 인프라 확대, 국내 자본시장과 연계한 대규모 R&D 펀딩, 인재 육성과 유출 방지, 정부 차원의 산업 전략 강화가 동시에 추진돼야 중국의 바이오 굴기로부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굴기라는 단어가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로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바이오 산업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기자가 처음 축구를 보며 떠올렸던 '중국의 굴기는 요원하다'는 생각은 이제 완전히 빗나간 오판이 됐다. 문제는 앞으로의 3년, 그동안 한국이 바이오 산업에서 기술수출 이후의 전략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굴기라는 단어는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곱씹어야 할 용어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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