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을 임대한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가 그린 놀라운 거래
[영화 알려줌] <딜리버리> (Delivery, 2024)
산부인과 의사 '정귀남'(김영민)과 인플루언서 아내 '우희'(권소현)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부부다.
하지만 이들에겐 치명적인 비밀이 있다.
'우희'의 아버지 '태식'(동방우)이 내건 상속 조건은 바로 '아이를 낳는 것'.
'귀남'은 자신의 무정자증을 숨긴 채 불임 탓을 아내에게 돌리고, '우희'는 SNS에서 완벽한 예비맘 인생을 연출하며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한다.
한편, 중고 거래로 간신히 생활비를 버는 공시생 '미자'(권소현)와 최근 직장까지 그만두고 게임에만 빠진 남자친구 '달수'(강태우)는 산동네 다세대주택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이들에게 닥친 계획에 없던 임신은 재앙과도 같았다.
준비도, 여력도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귀남'의 병원에서 중절 수술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분노에 찬 '미자'가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우희'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출산 전까지 머물 새 아파트와 매달의 생활비, 출산 후엔 거액의 정착금까지, 자궁을 '임대'해준다 생각하라는 '우희'의 말에 '미자'와 '달수'는 힘든 고민 끝에 계약서에 서명한다.
이후 네 사람의 위험한 공동 태교가 시작된다.
'우희'는 홈캠으로 '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미자'는 사생활 침해를 빌미로 더 많은 경제적 지원을 요구한다.
태아가 기형일 수 있다는 소식에 돌변하는 '우희'와 '달수'의 태도, 점차 아이에 대한 애착이 생기는 '미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귀남'까지, 네 사람의 불안한 동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루 평균 2000만 개의 택배가 오가는 물질적 풍요의 시대, 그러나 출생률은 바닥을 치는 아이러니한 현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 장민준 감독의 데뷔작 <딜리버리>는 이러한 시대상을 '배달'과 '출산'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품은 제목에 담아냈다.
그의 의도는 캐릭터들의 이름에도 깊이 새겨져 있는데, '정귀남'은 정자가 귀한 남자라는 뜻이고, '미자'는 오미자처럼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성격을 품은 인물이다.
'달수'는 '공수래공수거(공허하게 왔다가 공허하게 돌아간다)'에서 따왔으며, '우희'는 <패왕별희>(1993년)의 '우희'처럼 남편을 맹목적으로 믿다 배신당하는 캐릭터를 암시한다.
영화는 코미디와 드라마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도한다.
초반부의 코믹한 톤은 후반부로 갈수록 무게감 있는 드라마로 전환된다.
이러한 감독의 의도는 일부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는 데 성공한 듯하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후, 한 한국계 미국인 관객은 감독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그는 어린 시절 몸이 불편해 입양이 오래 걸렸던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영화가 입양과 생명의 가치를 섬세하게 다룬 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영화의 독특한 관람 포인트 중 하나는 동명이인 두 권소현 배우의 만남이다.
'우희' 역의 권소현은 뮤지컬 배우 출신으로 영화 <마돈나>(2015년)로 스크린에 데뷔해 <미쓰백>(2018년)으로 백상예술대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바 있다.
'미자' 역의 권소현은 걸그룹 포미닛 출신으로, <그 겨울, 나는>(2022년)으로 호평받았다.
"살면서 동명이인을 마주할 일도 많지 않은데 한 작품에서 만난 건 정말 특별했다"는 '미자' 역의 권소현은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숙소를 받을 때 배우의 매니저가 방 열쇠를 잘못 받아 가면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언급하기도 했다.
'우희' 역의 권소현은 "<미쓰백> 시사회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하고, SNS에서 '권소현 화이팅!'하며 서로 응원하던 사이였다"라고 밝혀 훈훈함을 자아냈다.
이번 작품에서 '미자' 역의 권소현은 임신과 출산 장면의 실감 나는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출산 브이로그를 보니 간호사분들이 '소리 지르지 마세요, 힘 빠진다'라고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조금 더 리얼한 걸 표현하고 싶어서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그때 온몸이 떨렸던 기억이 나는데, 나에게는 좋은 경험이자 슬픈 경험이었다"라고 권소현은 소개했다.
'미자'가 출산 후 회복실에서 홀로 눈물 흘리는 장면은 영화의 가장 강렬한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권소현은 임신 중인 지인들을 만나 세세한 변화를 연구했다.
권소현은 "친구들에게 '몇 주 때는 어땠어?', '지금은 어떤 느낌이야?', '몸 안에서는 어떤 감각이 느껴져?'라고 끊임없이 물어보며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엄마가 나를 낳을 때 이런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모든 임산부가 존경스러웠다"라고 전했다.
다만, <딜리버리>는 인물들의 극적인 변화가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준다.
특히 게임 중독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던 '달수'의 갑작스러운 성장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귀남'과 '우희' 부부가 태아의 기형 가능성이라는 한 번의 사건으로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도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임신 초기 아이를 '이것'이라 칭하며 거리를 두던 '미자'의 모성애 발현 과정 역시 좀 더 세밀한 묘사가 아쉽다.
또한, 작품은 현대 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고자 했지만, 등장인물들의 택배 배달이나 쇼핑 장면만으로는 그 주제의식이 깊이 있게 전달되지 않는다.
코미디와 사회 비판이라는 두 가지 톤을 오가는 과정에서 때로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순간도 있다.
그럼에도 <딜리버리>는 주목할 만하다.
저출생과 양극화라는 우리 시대의 민낯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아이를 위한 진정한 선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기생충>(2019년)에서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여러 시퀀스들을 떠올리게 하는 연출과도 이 질문은 잘 어우러졌다.
또한, 생명을 거래 대상으로 삼는 비윤리적 상황을 다루면서도,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대신 이런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를 차분히 들여다본 작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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