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 양탄자 잔디 관리 비밀은?

사진출처=제시 린가드 SNS

요즘 한국에서 연락이 많이 온다. 가장 큰 이유는 '잔디' 관련이다.

K리그 개막 이후 손상된 잔디 상태로 인해 많은 비판 여론이 일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TV에서 보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경기장의 잔디는 양탄자와도 같다. 잔디가 패이거나 죽어있는 경우는 없다. 볼이 굴러가다 불규칙 바운드가 생기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EPL 구장 잔디 관리 비법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해온다. 이에 대한 답을 해본다.

#잔디 관리 산업

영국의 경기장 유지 및 잔디 관리 산업 규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021년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영국의 경기장 관리 산업 규모는 약 10억 파운드 이상(약 1조 8000억원)이다.

산업 종사자들도 많다. 2만 7000여명의 전문가들이 종사하고 있다. 그늘에서도 자랄 수 있는 잔디를 개량하는 종자 연구자에서부터 더 푸르게 보이는 화학 성분을 개발하는 과학자, 동네 6부리그 경기장 잔디를 관리하는 그라운드맨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물론 축구장 뿐만이 아니라 윔블던 같은 테니스 경기장, 트위크넘 같은 럭비장, 세인트 앤드류스 같은 골프장 등을 총망라한 것이다. 그래도 세계적으로 큰 규모와 기술력을 자랑한다.

교육 기관도 많다. 대표적인 곳이 마이어스코 대학교(University Centre Myerschough)나 해들로우 컬리지(Hadliw College), 영국 국제 골프 그린키퍼 협회(BIGGA - British and International Golf Greenkeepers Association), 그라운즈 매니지먼트 협회(GMA - Grounds Management Association)등이 있다.

이들 교육 과정을 통해 기초적인 부분부터 학사, 석사, 박사까지 취득하며 전문가로 나아갈 수 있다. 영국 내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잔디 관리인(그라운드맨)들은 풍부한 경험과 함께 식물학을 전공하며 학문적인 역량까지 갖추었다. 유관 산업도 크게 성장했다. 세계 최고의 잔디 깎이날 연마 시스템을 제조하는 버나드 앤 컴퍼니, 잔디 깎기 기계 생산 및 유지 보수를 하는 앨럿, 데니스 등의 회사들도 있다.

참고로 한국이 관련 통계조차 없다. 가장 규모가 큰 서울 월드컵 경기장 잔디 관리에 연간 2억 5000만원을 쓸 뿐이다. 이를 통해 유추해본다고 해도 경기장 유지 및 잔디 관리 산업 규모는 고작해야 몇 백억원대에 머물 뿐이다.

#고난의 시절을 거치며

영국도 처음부터 잔디 사정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고난의 시절이 있었다. 영국은 비가 잦고 일조량도 적다. 비만 오면 그라운드는 진흙탕으로 변했다. 겨울이 되면 잔디는 얼어붙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잔디가 메말라버렸다. 늘 잔디 관리는 실패했다.

그러던 1990년대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했고, TV 중계권료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돈이 생기자 구단들은 좋은 선수를 데려오기 위해 선수 이적료와 연봉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좋은 선수들이 영국으로 몰려들었다. 비싼 선수들을 관리하는 것, 즉 부상 방지가 중요해졌다. 선수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고품질의 경기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경기장 잔디 관리에 자본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프리미어리그의 정책도 이를 도왔다. 프리미어리그는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잡으려고 했다. TV 중계에서 경기장이 멋있게 보여야 했다. 진흙탕이나 울퉁불퉁한 잔디, 패인 잔디는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방송사들은 깨끗한 경기장을 원했고, 완벽한 상태 유지를 요구했다. 역시 경기장 잔디 관리에 자본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관리법들이 나왔고, 경기장 관리인들이 공유하면서 관리 기술은 발전했다. 또한 프리미어리그는 1990년대 후반 그라운드맨들이 '식물학' 교육을 필수적으로 받도록 규정을 마련했다.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도 커졌다.

2000년대 이후 영국의 그라운드맨들은 유럽 각국으로 진출했다. 레알 마드리드, 파리 생제르맹, UEFA, FIFA 등이 이들을 영입했다. 경기장 관리만 전문으로 하는 컨설팅 회사들도 생겨났다. 경기장 관리 산업은 더욱 고도화되고 더욱 커져가고 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한국이 나아갈 길은

영국의 경기장 관리 산업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우선 관리 주체부터가 다르다. 프리미어리그의 경우 대부분의 구단이 구장을 소유하거나, 구단의 자회사가 구장을 소유하고 있다. 혹은 재단이나 지자체가 소유했지만 운영권을 구단에게 장기간(99년이 대표적) 주고 있다. 때문에 구단들이 직접 경기장을 관리할 수 있다. 경기장 유지 관리에 심혈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

재원도 다르다. 2023년 회계연도 기준 프리미어리그 20개 팀의 총 매출은 59억 파운드였다. 약 11조원. 구단별 평균 매출액은 3억 파운드(5632억원) 정도로 계산할 수 있다. 2022년 K리그 구단들의 평균 매출액이 257억원이다. 그마저도 대부분 모기업이나 지자체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경기장 유지 관리에 들일 돈이 많지는 않다.

하나하나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구단이든, 지자체든, 관리공단이든 '잔디 및 시설 관리가 선수들을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스포츠 산업 고도화'를 위한 최소한의 투자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도 EPL처럼 양탄자같은 잔디를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