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님의 세월
사랑(가명) 님은 죽기 전에 땅끝마을은 한번 보겠노라며 두 달을 걸어서 남도에 갔고,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만나게 된 어떤 공무원들을 진심을 다해 설득해 그들의 마음을 바꿔, 얼마 전 내가 일하는 일시보호시설에 왔다.
나이도 있는 데다 무리한 여행으로 다리가 아프다던 그녀는 시설에서 얼마간의 휴식 시간을 보내더니 이제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처음엔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난간을 붙잡고 움직였는데 지금은 그래도 꼿꼿하게 걷는 모습이다. 그러나 여전히 삶에 별 희망이 없다고, 더 살아 좋은 일은 뭐겠냐는 말도 한다. 그럴 때면 ‘자녀도 있는 분이 그리 생각하면 어쩌느냐.’ 다독이다가 결국 그녀의 마음에 켜켜이 쌓인 상처와 회한을 보게 된다. 아주 오래전 집을 떠나 살아야 했고, 딸을 못 본 지도 오래되어 그리운 마음이 크지만 또 한편 그 딸에게 너무 큰 상처를 받기도 했다는 걸.

사랑 님은 심한 가정폭력으로 집을 떠났었다. 사랑 님의 이름으로 빚을 지고는 그걸 갚아야 하는 부담을 지우고, 돈을 더 마련해 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사랑 님의 딸이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즈음이었단다. 걸핏하면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던 그 시절, 자신은 딸에게 거칠고 폭력적인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안간힘을 다했다고 한다. 책을 찾아 읽어가면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좋은 말로 대하려 노력했다고. 하지만 몇 년 후 너무 그리워 찾아가 만난 딸은 사랑 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욕을 하며 엄마를 밀어냈다.
사랑 님은 경찰이고 공무원이고,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가정폭력으로 몇 차례 신고했을 때 경찰이 다녀가곤 했지만 그때마다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느냐’, ‘잘 화해해봐라’ 그런 말만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사랑 님과 이야기를 나눈 동료 사회복지사는 ‘그 옛날, 따님도 엄마가 필요할 나이였을 테니 어린 마음에 원망이 쌓이지 않았겠느냐, 어른이 되고 나면 엄마를 이해할 날도 생길 거다.’고 사랑 님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마디 말로 풀릴 응어리는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딸은 엄마를 찾게 되어 있으니 건강하게,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추스르고 잘 살아내고 있어야 한다고 격려했지만, 그 역시 그녀를 일으키기에 역부족인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사랑 님 마음의 깊은 우울과 무기력이 안타까워 병원에 가보자 설득했는데 정신과 치료가 달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사랑 님이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긴 세월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수풀 님의 시간
수풀(가명) 님은 내가 있는 시설의 일시보호 서비스가 끝난 후 노숙인자활시설에 입소한 지 벌써 1년도 넘었다. 수풀 님은 일시보호시설에 있을 때 법이 허용한 이용 기간이 끝나가는데 어떻게 할 계획인지 물어보면 ‘오빠네 가겠다’, ‘동생네 가면 된다’ 그러면서 형제들의 전화번호를 내밀었었다. 전파방해가 있는지 자기가 전화를 하면 받지 않거나 끊기더라며. 수풀 님의 오빠네로 전화를 해드렸다. 당시 수풀 님의 오빠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말투로 수풀 님 일이라면 진저리가 난다, 더 이상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 구청에서도 나서서 도와주려 했는데 치료를 안 받겠다고 우겨서 그 어떤 서비스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살던 집에서도 쫓겨났다더라, 다신 전화를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수풀 님께 오빠의 생각을 전하니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번에는 동생에게 전화를 해봐 달라고 했다. 동생에게도 전화를 했는데 수풀 님 일로 전화했다는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끊어버렸다. 그때 실망한 표정으로 풀이 죽어 사무실을 나가던 모습이 아직 생각난다.
이후에도 생활시설에 갈 수 있도록 연계하겠다고 하자, 아니라고, 가족에게 돌아가면 된다고 했었다. 어느 날은 조카의 결혼식이 있으니 오빠네 가봐야겠다고 하기도 했다. 연락이 왔냐고 물어보니 연락은 받지 못했지만 이즈음이면 조카가 결혼할 때가 되었다고 답해서 실무자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오빠는 수풀 님과 함께 살 형편이 안 되는 거 같으니 오빠네로 돌아가겠다는 계획은 비현실적이라고 설명하였으나,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럴 리 없다며 뒤돌아서곤 했다. 그러다 끝내 형제들과 살기는 어렵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인가 지하철은 전파방해가 되어 형제들과 통화가 안 되니 사무실에서 다시 전화를 해달라고 했고, 형제분들이 사무실에서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자 그럼 시설에 보내달라 해서 자활시설로 가게 됐다.

시설의 일시보호 서비스를 받고 있을 때 수풀 님이 몰두했던 것 중 하나가 뜨개질 프로그램이었다. 목도리나 모자 같은 간단한 소품 뜨기를 교육했는데, 수풀 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다. 교육 시간이 아닐 때도 실 꾸러미를 들고 다니면서 짬짬이 뜨개질을 하곤 했다. 그때 만들어진 생산품은 겨울에 거리상담 아웃리치를 나가 노숙하는 여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소품을 만드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나눔 활동에 사용될 거라는 소식에 몇 개씩 뜨기도 했다. 수풀 님은 그런 여성 중에도 으뜸으로 열심이었다. 자활시설에 입소한 이후에도 종종 전화가 왔다. 뜨개질 프로그램은 하지 않느냐고,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자신도 참여하고 싶으니 꼭 알려 달라고.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는 시설로 찾아와 실을 받아 갔다. 그러고는 뜨개질을 해서 완성품을 가져오곤 한다. 어떨 땐 목도리를, 어떨 땐 가방을, 조끼를, 치마를 떠 온다. 뜨개질 솜씨는 조금 엉성해서 코가 나갔을 때도 있지만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속도와 양은 엄청나다. 완성도를 높여드리고 싶어 이렇게 저렇게 조언을 해보지만, 창작자의 고집을 발휘해 결국은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해 온다. 최근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코바늘뜨기 작품을 하나 가져왔다. 가로 60cm, 세로 18cm 정도의 작품인데 끝마무리도 안 되어 실이 늘어져 있었고, 정작 본인도 무엇에 써야 하는지 답변을 못 하는 물건이었다. 그날 수풀 님에게 실을 드리던 사회복지가가 마무리를 해드리고는 이리저리 뜯어보다가 ‘아, 컴퓨터 키보드 덮개를 하면 되겠네요’, 이렇게 용도를 찾아드렸다. 수풀 님이 아주 뿌듯해했다.
수풀 님은 이번에도 또 다른 색 실을 달라고 해서 받아 갔다고 한다. 그렇게 한 코, 한 코 늘려나가는 시간들이 수풀 님에게 회복의 시간이 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글. 김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