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품고 시간과 벗하는 도자기 복원가의 집[집 공간 사람]
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집을 보면 인생이 보인다"고 했다. 문화재 복원가인 정수희(44)씨의 집이 딱 그렇다. 정씨는 도예가들이 대대로 삶을 꾸려왔던 유서 깊은 땅에 두 번 집을 지었다. 처음엔 30여 년 세월을 지낸 주택을 고쳤고, 다음은 그 집을 연장한 새 집을 지었다. 말하자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가치를 꼭꼭 눌러 담아 지은 '오래된 새 집'이다. "오래된 것을 되살리는 업을 따라 집도 꼭 그렇게 지었네요. 과거와 미래를 잇는 공간이 됐으면 했어요." 재화로만 여겨지는 집이 아닌, 소박하지만 분명한 신념을 새긴 집에는 '행복이 가득할 집(대지면적 980㎡, 연면적 193.81㎡)'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기 이천시 백사면 조읍리의 나지막한 산비탈에 자리한 이 집에는 정씨와 남편, 반려견 미소와 빙고, 고양이 8마리가 산다. "이천에서 태어나 부산으로, 프랑스 파리로 옮겨 살았는데 운명처럼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왔죠." 파리에서 문화재 복원가로 15년을 활동한 정씨는 수년 전 이천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귀국한 김에 이곳에 정착했다. 마지막 집이라는 생각으로 수십 채의 집을 보러 다녔지만 어린 시절 추억을 돋게 하는 소박한 빨간 벽돌집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결국 다른 집을 계약하려던 차에 운 좋게 만난 이 집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더없이 좋았던 건 집이 숲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는 점이었다. "이 집이다 싶었죠. 그냥 집이 아닌 오래된 것들로 둘러싸인 집에서 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거든요. 숲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존재니까요."
존재해온 것을 기어코 지키려는 마음
집의 환경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지만 답답한 구조가 문제였다. 긴 세월을 보낸 농가치고 겉은 깨끗하게 관리가 돼 있었지만 내부가 아파트 구조를 답습하고 있었던 것. "집주인이 당시 유행하던 아파트 평면을 그대로 쓴 거죠.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벽을 허물고 최대한 창문을 많이 냈어요." 집을 지어본 적도 고쳐본 적도 없었던 그는 '집 어디서나 숲을 보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손수 설계도를 그려가며 생짜로 집을 다듬어 나갔다. 구조 변경과 인테리어 마감, 가구까지 직접 완성한 집에는 창문이 무려 15개. 방 3개가 거실을 마주 보던 아파트 구조는 안방을 제외하고는 모든 벽채가 뚫린 열린 구조로 바뀌었다. 덕분에 여느 집에 있는 천장등 하나 달지 않았지만 종일 은은한 자연광이 감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집이 오픈 구조인 데다 작업실을 겸하고 있다 보니 살림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 특히 부엌 공간이 협소해 평소 요리를 즐기는 남편의 아쉬움이 컸다. "3년여 리노베이션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신축을 결정했죠. 새 집을 짓고 기존 집과 연결해 부족한 공간을 보완하면 되겠다 싶었어요."
옛집에 오늘의 감각을 더해 줄 건축가로는 'STUDIO 승호'의 이승호 소장, 디자인버그 건축사사무소의 김수영 소장이 낙점됐다. 두 소장을 은인으로 생각한다는 정씨의 말을 빌리자면 "그럴 거면 집을 처음부터 새로 짓지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핀잔만 듣다가 두 건축가가 단박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눈물 나게 고마웠다"고. 이들 역시 쉽게 사라지는 과거의 공간을 기필코 지키려는 건축주의 열정에 매료되긴 마찬가지였다. 이 소장은 "집을 대하는 태도가 보통의 건축주들과도 달랐고 그만큼 자유로운 작업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해 신이 나서 했던 프로젝트였다"고 떠올렸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오래된 새 집'
존재해온 것들을 기어이 지키려는 건축주와 이 집만의 감성을 명료한 건축적 언어로 살려내고 싶었던 두 건축가. 세 사람이 합심해 완성한 집은 보통의 가정집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두 소장은 30년 세월을 간직한 집의 한쪽 벽을 터서 고인돌을 닮은 위트 있는 건물로 연결했다. 땅 모양에 맞춰 길게 앉힌 새 집은 고벽돌을 두른 벽채가 땅을 딛고 묵직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받치는 디자인이다. 김수영 소장은 "옛집에서 무엇을 계승하고 새 집에서 무엇을 드러낼지 질문하는 것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며 "고벽돌, 노출 콘크리트 같은 묵직한 소재로 본채의 분위기를 연장하고 형태미가 두드러지는 모던한 스타일로 차별화했다"고 설명했다.
20평 남짓의 내부는 단순한 오픈 구조인데 들여다보면 건축주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성실하게 반영됐다. 이 소장은 "숲을 내부로 충분히 끌어들이는 데 주력했다"며 "땅의 단차를 살린 계단이 단조로운 집에 역동성을 살리고, 3면의 통창과 고측창을 과감하게 써서 숲을 풍성하게 들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건축의 주 목적이었던 주방에는 한가운데 아일랜드 싱크대를 설치해 요리하면서 느긋하게 풍경을 즐길 수 있게 하고, 부엌과 다이닝 공간 사이에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필요에 따라 공간을 분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수백 년 된 고벽돌을 일일이 깨고 다듬어 외벽을 채우고 내부에는 노출 콘크리트로 재료의 물성을 살린 것이나, 인위적인 조경을 생략하고 숲 정원의 자연미를 강조한 것도 건축주의 생활 철학과 결을 같이한 부분이다.
옛집과 새 집은 한눈에 봐도 다른 스타일이지만 어색함이 없다. 건축주가 신중하게 배치한 테이블, 의자, 공예품 같은 오래된 물건들이 곳곳에 놓여 중심을 단단히 잡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정씨가 폐교에서 공수해 마감한 마루 바닥. 정씨는 바닥을 가리키며 "초등학교 시절 한 번쯤은 왁스 오일을 칠해봤던 바로 그 교실 마루를 가져와 바닥재로 재활용한 것"이라며 "완공한 지 한 달이 안 된 새 집이지만 바닥에는 이미 수십 년의 역사가 채워졌다"며 웃었다. 백 년 한옥에서 나온 대들보로 제작한 육중한 테이블은 심플한 다이닝 공간과 편안하게 어우러지며 시선을 붙잡는다.
'무엇을 남길까' 시간과 맥락을 간직한 일상
숲이 만드는 풍경처럼 매일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 쉬이 허물 수 없는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건축주. 정씨는 "인생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집이 180도 달라지는 것 같다"며 "누구보다 공들여 만들었지만 오랜 시간이 쌓인 집과 땅의 내력, 자연을 생각하면 집이 나만의 재산이라 여겨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원래 집이 담고 있는 시간과 맥락을 잘 간직하다가 언젠가 미래 세대에 전해지길 바란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과거 유산들이 빠르게 사라져가는 시대, 신중하게 집터를 찾아 낡은 집을 다듬고 새로운 공간을 지어 생기를 불어넣은 지난 수년간의 집짓기 여정도 그 나름의 실천이 아니었을까. 집주인의 삶과 철학이 고스란히 투영된 집에는 '행복이 가득할 집'이란 이름처럼 날마다 새로운 행복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천=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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