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두 선남선녀가 최근 주목받는 까닭
김동률의 신곡 뮤직비디오에서 배우 김무열과 이영아는 헤어진 연인으로 등장해 영상 내내 아련한 감성을 전한다.
가수 김동률 '산책' 뮤직비디오는 김선혁 감독이 연출했다. 최근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MV의 연출자, 김선혁 감독이 영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김선혁 감독의 김동률 '산책' 뮤직비디오의 힘.."공백의 미학"
상대에게 말을 거는 듯한 가사와 간결한 시적 표현법, 담담하지만 아련함이 묻어있는 목소리. '기억의 습작'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여행' '오래된 노래' '아이처럼' 등을 부른 가수 김동률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10월27일 발매된 김동률의 싱글 '산책'의 간결하고 여백이 있는 가사처럼 뮤직비디오 역시 '비어있음'의 미학을 강조한다. 뮤직비디오는 화려하거나 돋보이지는 않지만, 공백이 만들어낸 묘한 단단함으로 가득하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각자의 방식과 기억대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드는 틈을 제공한다. 극중 헤어진 연인 김무열과 이영아는 서로 다른 사계절과 시공간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또 눈을 피한다. 함께 방문했던 공간 안에서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며 생기는 아련한 정서는 계절의 끝과 끝에서 분리되면서 감정적으로 연결된다.
2018년 '답장', 2019년 '여름의 끝자락'에 이어 '산책'까지 김동률과 호흡을 맞춰온 김선혁 감독은 연인의 이야기를 표현한 방식처럼 시간의 공백을 두고 제작했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봄부터 소복이 눈이 쌓인 겨울까지 사계절이 담길 수 있던 것도 1년이라는 제작 기간을 두고 다양한 순간들을 포착한 김선혁 감독의 기다림에 있었다. 김무열의 얼굴에 닿는 나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빛의 질감과 이영아의 손등에 닿는 눈이 녹는 이미지는 '진짜'를 위해 공을 들인 과정 덕분이다. 김 감독은 김동률과 여러 차례 작업을 해오면서 그가 지닌 감수성을 최대한 담아내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그는 caska라는 비주얼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브랜드 필름, 영화,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영상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프로젝트에 참여해 아카이브 공간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와 광고 및 도록 사진을 제작한 그는 아모레퍼시픽 광고 등도 만들었다. 영화과 출신으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인 남궁선 감독의 '힘을 낼 시간'에는 촬영감독으로, 지난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인 이정홍 감독의 '괴인'에는 컬러리스트로 참여하기도 했다.
1일 전화로 만난 김선혁 감독은 자신의 작업물과 닮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오랜 기다림을 통해 포착할 수 있는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순간들을 한겹씩 쌓아가는 느낌이었다. 아마 우리가 '산책' 뮤직비디오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던 이유는 이미 찍었던 장면일지라도 더 좋은 바람의 느낌, 햇빛의 질감이 있다면 재촬영을 하기도 했던 감독의 집념 덕분인지도 모른다.
▲이전에 '답장', '여름의 끝자락' 뮤직비디오로 김동률과 협업했다. 이번 '산책' 뮤직비디오는 어떻게 연출을 맡게 되었나.
"김동률 선배와는 2017년 '답장'으로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계속 작업해오고 있다. 둘이서 직접 긴밀하게 소통한다. 공개 시점 기준으로 1년 반 정도 전에 이미 거의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는 음원을 들려주었다. 작년 5월 즈음이었다. 가사에 봄과 가을이 직접 등장하는데, 김동률 선배가 뮤직비디오 안에 두 계절이 담겼으면 좋겠다고 헤 기본적으로 1년 정도의 작업 기간을 토대로 진행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모두 담아냈다. 햇볕이 인물의 얼굴에 닿는 질감이나 나뭇잎의 색감이 인공적으로 가공한 것이 아닌 그 시간대를 '진짜로' 찍어낸 느낌이다. 1년 정도 시간을 들여 촬영했다고 알려져 있다. 촬영 방식은 어땠나?
"통상적으로 광고나 뮤직비디오는 계절을 선행해 제작한다. 겨울 시즌 광고는 가을에, 가을 시즌 광고는 여름에 찍는 식으로. 통제된 세트에서 인조나무, 인공눈을 활용해 다가올 계절을 시뮬레이션하고, 여러 사람의 스케줄에 맞춰야 하니 날씨를 고려하지 않고 촬영일이 정해지므로 조명으로 햇빛을 모사한다. '산책'은 이와 반대다. CG는 없다. 모두 카메라에 담긴 것들로만 만들었다. 그래서 각기 다른 수종의 단풍이 어우러지는 풍경, 자세히 보면 하나하나 다른 눈의 결정들, 해가 구름에 드나들며 바뀌는 햇빛의 변화들이 있다. 목표하는 계절감이 잘 드러나는 시기를 계산해서 촬영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 같은 숏이지만 날씨가 좋고 원하는 느낌이 일치하면 다시 찍기도 했다. 특히 인서트들이 그렇다. 나뭇잎에 흔들리는 바람이나 빛, 눈 같은 것들은 이미 찍었는데, 다른 날에 더 좋은 조건이면 끊임없이 재촬영했다."
▲산책로, 공원, 전망대 등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소가 뮤직비디오 안에 묘사된다. 로케이션은 어디였나.
"주로 등장하는 장소는 서울 홍대 인근 와우산 쪽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주택가랑 인접해있고, 너무 넓거나 트여있거나 하지 않아 소담한 부분들이 많다는 점이 좋아서 선택하게 됐다. 맘 먹고 나들이가는 공원과 일상 속에서 아무런 소지품 하나 없이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은 다르다. 보는 이에게 너무 특별해 보이는 곳이기보다 내 주변의 장소들에도 비추어 볼 수 있는 보편성이 담기길 원했다. 그리고 남산 쪽에서도 일부 촬영을 진행했다."
▲김무열과 이영아가 그리는 헤어진 연인의 관계를 계절이라는 소재와 함께 결부해서 표현했다. 중점에 둔 부분이 있나.
"우선, 1년 정도 되는 시간이 프로덕션 기간으로 주어졌을 때, 이 재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했고, 가장 먼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시간(계절) 너머로 시선이 마주치며 감정이 오가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요란한 방식이 아니라 리버스 숏이라는 최대한 단순한 문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상상했다. 각자 길을 걷다 돌아보는 장면에서 계절로 분리하게 되면 중의적인 표현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를 정말 본 것인가'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고, 아니어도 괜찮다. 어쩌면 비현실적이지만, 정서적으로 가닿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뮤직비디오에서 그려지는 시간차는 같은 연도가 아닐 수도 있다. 시간의 간극은 같은 해 계절 정도의 차이일 수도 있고, 5년이든 10년이든 이건 보는 이의 시점에 따라서 저마다 다른 감각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김동률 선배가 이번 뮤직비디오를 위한 첫 만남에서 김무열 배우가 출연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연락을 드렸고, 빠르게 답을 주셨다. 처음에 김동률 선배가 상상했던 뮤직비디오는 남자 혼자 나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상대역과 병행하는 구조를 제안했다. 이영아 배우는 평소 눈 여겨본 배우여서 캐스팅을 진행했다. 김동률 선배의 음악이 가진 깊이가 잘 표현돼 몹시 기쁘다.
이번 '산책' 뮤직비디오에서 회상 신을 가장 좋아한다. 찍기 직전까지 내게는 가장 걱정이 많았던 장면인데 지금은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된다. 발라드 뮤직비디오에서 좋았던 과거를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클리셰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두 사람이 같이 산책길을 올라오는 장면은 혼자 등장하는 장면들과는 그 느낌이 확연히 분리되길 바랐다. 촬영 전에 따로 만나서 이날이 어떤 날이고 둘이 무엇을 하게 되는지, 직접 촬영하지는 않을 컨텍스트를 설명드렸다.
예를 들어 오늘 두 사람이 동거하는 집으로 이사온 지 일주일도 안 돼 처음 인테리어하는 날로 하자.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 새롭다. 그러니 전등 하나 다는 것만으로도 물개 박수 치며 좋아하는 느낌으로. 그런 걸 찍지는 않겠지만 그런 걸 하러 가는 길인 것이다. 그러고도 그 장면에 대한 불안은 있었는데, 첫 테이크 가는 순간 둘의 모습이 너무나 앳되고 예뻐서 깜짝 놀라 환호했다. 녹음을 하지 않는 촬영이니 카메라가 돌아가는데도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노래에는 "울어도 되는 걸까", "불러도 되는 걸까", "어쩌면 그때 우리는 아름다움의 끝을 피운 걸까"라는 가사에서 느껴지는 그리움이나 아쉬움의 감정이 짙게 배어있다. 그래서일까. 유독 뮤직비디오 내에서 김무열과 이영아가 어딘가를 응시하거나 뒤를 돌아보는 장면이 많다.
"그리움을 표현하는 감정적 포즈라고 생각했다. 어떤 구체적인 스토리나 상황 설정을 뮤직비디오 안에 녹이는 것은 개인적인 스타일에 맞지 않아 가사에 집중하려고 했다. 멈춰 서고, 어딘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돌아보는 행동들이 가사와 잘 맞았다.
엔딩에서 두 사람이 문득 멈춰 서고, 반쯤 돌아서고, 먼발치에서 서로 응시하는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엔딩 장면의 감정 변화를 세 단계로 표현하려고 했다. 슬픔-그리움-고마움이었다. 4년 전 오래 같이 산 반려견을 떠나보냈다. 아직 해주지 못한 것들만 생각나서 미안하고 슬프기만 하다가 시간이 지나며 그게 그리움이 된 것 같다. 그러다가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같이 산책했던 장소를 오랫만에 찾았을 때는 함께 했던 빛나는 시간들이 더 많이 떠오르며 고마운 감정이 더해졌다. 시간에 따라 변모해가는 그런 감정의 단계들을 새겨넣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촬영 전에 배우들에게 넌지시 말씀드렸다."
▲엔딩에서 김무열은 햇살이 내리쬐는 봄의 시간대에 머무르고, 이영아는 눈이 내리는 겨울로 분리된다. 끝과 끝으로 가장 가깝지만 멀리 떨어진 계절로도 느껴진다. 두 사람의 관계성을 상반된 계절의 차이를 표현해 마무리한 이유가 있나.
"다양한 해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겨울에서 봄은 시간적으로 근소한 차이지만, 시각적으로는 가장 차이가 많이 난다.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눈이 하얗게 내려앉은 이미지와 생명력이 가득한 초록의 이미지는 반대에 위치한다. 누군가는 이 시간적 격차를 크게 느낄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저마다의 경험에 따라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고 느낌으로써 더 슬프고 애틋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해석의 자유를 열어두고 싶다."
▲그동안 연출한 뮤직비디오를 보면, 공간에 대한 감각이 묻어 나오는 것 같다. '답장' 뮤직비디오에서 서늘함이 내려앉은 집과 꽉 막힌 도로가 공존하거나, '여름의 끝자락'에서는 끝이 어딘지 모를 초록빛의 초원 등이 그렇다. '산책' 뮤직비디오도 마찬가지다. 평소 뮤직비디오를 연출할 때, 공간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가.
"개인적으로 영화적인 스토리가 있는 뮤직비디오는 선호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직업이 뭐고, 언제 어디서 만났고, 어떻게 첫 키스를 하고, 왜 헤어졌는지 등등. 어쭙잖게 꾸며낸 사건들이 내 개인적 경험과 다르다고 느낄 때 그 즉시 음악과의 몰입도 끊기는 것 같다. 플롯이라든가 서사의 연결성 같은 것은 음악에서 가사가 담당하는 영역이고, 가사는 시나리오와 달라서 상대적으로 무척 자유롭다. 그렇다 보니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상황에 신경 쓰기보다 '감정 상태'에 관심을 두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감정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장소인 경우가 많다.
인물들은 장소에 놓임으로써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고 어떤 감정 상태에 빠져들어간다. 이건 적당히 아무 곳에서나 시나리오에 적힌 행동을 한다고 구색이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정말 그곳이 아니라면, 그 시간대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성립이 안되는 무엇이다. '답장' 속 이설 배우의 뒤로 보이는 게 아득한 차량 행렬을 합성할 그린 스크린 앞이라든가, '여름의 끝자락'의 김도건 배우가 모 맥주 광고처럼 인조나무가 빼곡히 심겨 있는 곳에 서 있다거나 '산책'의 이영아 배우가 인공눈을 뿌리는 대형 세트 안을 거닐고 있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구체적인 장소는 힘이 있다. 배우가 혼자 등장하는 장면이어도 상대역이 있는 셈이다."
▲아무래도 뮤직비디오 감독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만들어진 노래가 잘 전달되기 위해 창작하는 느낌에 가깝다. 창작자로서 어떤 마음가짐인가. 그것과 더불어 김동률의 노래를 뮤직비디오로 만드는 작업은 어땠을까.
"철저히 의뢰업이라고 생각하고 작업한다. 이건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기 위함이다. 뮤지션과 필름메이커 모두 창작가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어떤 틀에서 만나는지에 따라 위계가 달라진다. 뮤지션이 영화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한다면 그 작업의 주인은 영화감독이다. 필름메이커가 뮤직비디오에 감독으로 참여한다면 뮤지션이 주인이다. 영화 매체에서 감독을 서포트하는 최상단의 기술자는 촬영감독이라고들 하는데, 그와 비슷한 마음이다. 곡을 듣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이 곡을 만든 김동률 선배의 입장에서, 그가 이 음악에 부여한 감수성에 위배되는 것은 없는지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눈다.
예컨대 내가 생각한 배우가 선배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설정한 상황이 선배에게는 어색하고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 그 부분을 빼고 다시 구상한다. 좋았던 부분들은 남기고.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김동률스러운 결과물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럴 때 작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동시에 같은 창작가라는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큰 힘이 된다. 모든 면에서 대선배이지만 맞은편의 나를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항상 동등한 작업자로서 섬세하게 존중해준다. 큰 얼개에 관해서는 세세하게 의견을 주지만 반대로 세세한 디테일과 기술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믿고 맡겨준다. 어떻게 보면 김동률 선배가 말하는 것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호불호다. 그런데 그건 만드는 사람에게 가장 큰 힌트이자 영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