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감독님한테 연락이 올 줄 몰랐습니다."

정호영의 이 한 마디가 이번 이적의 본질을 압축한다. 여자 프로배구 V리그 FA 시장 최대어로 꼽히던 미들블로커 정호영이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유니폼을 입었다. 계약 기간 3년, 총액 5억 4,000만 원. 2026-2027시즌 여자부 보수 상한선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숫자만 보면 단순한 빅딜이지만, 그 이면에는 요시하라 토모코 감독의 직접 설득, 이다현과의 역대급 더블 미들블로커 조합, 그리고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KOVO 총재 취임까지 얽힌 복합적인 흐름이 있다. 흥국생명은 지금 단순한 전력 보강이 아니라 우승을 향한 퍼즐 맞추기에 한창이다.

흥국생명의 전력 재건 프로젝트는 2024-2025시즌부터 조용히 시작됐다. '배구여제' 김연경의 은퇴 이후 팀이 흔들릴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요시하라 토모코 감독은 예상을 비껴갔다. 분산 공격 전술과 선수층 활용을 앞세워 첫 시즌 만에 19승 17패, 정규리그 4위를 기록했다. 준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며 '봄배구'에 안착했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GS칼텍스 외국인 선수 지젤 실바에게 42점을 헌납하며 무릎을 꿇었다. 상대 강공을 정면으로 틀어막을 블로킹 높이가 절실했고, 중앙에서 흐름을 끊어낼 카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미 지난 시즌 이다현을 FA로 영입해 중앙 보강의 첫 단추를 꿴 흥국생명은, 이번 시즌 정호영까지 품으면서 그 작업을 완성했다.

정호영은 2019-2020시즌 KGC인삼공사(현 정관장)에 전체 1순위로 입단한 선수다. 190cm 장신에 타점이 높고, 고교 시절부터 성인 국가대표 경험을 쌓은 조숙한 자원이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당시 고교생 신분으로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다. 그러나 2020년 10월 왼쪽 무릎 전방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며 커리어가 한 차례 꺾였다. 수술과 6~9개월의 기나긴 재활 끝에 돌아온 정호영은 미들블로커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이후 정관장의 중앙을 7시즌 동안 책임졌다. 이 부상의 여파로 FA 자격 취득 시점이 동기 선수들보다 1년 늦어졌다는 사실도, 이번 이적이 그에게 얼마나 특별한 전환점인지를 말해준다.
이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요시하라 감독의 직접 접촉이었다. 정호영은 "감독님과 카페에서 처음 만났는데, 배구 얘기만 한 시간 넘게 했다"며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게 많았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껴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한 팀에서 보낸 선수가 낯선 유니폼을 선택한 데는, 전술적 비전을 공유한 감독의 진정성이 통했다.

정호영의 직전 시즌(2025-2026) 성적을 보면 이 영입의 무게가 가늠된다. 27경기 290득점, 경기당 평균 10.7득점. 세트당 블로킹 0.667개로 리그 4위, 속공 성공률 44.49%로 6위, 시간차 공격 성공률 54.55%로 4위였다. 시즌 막판 손가락 골절로 조기 이탈했음에도 이 수치를 찍었다. 부상만 없었다면 더 높은 자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흥국생명의 중앙 라인업은 이제 이다현과 정호영 두 국가대표 미들블로커로 채워진다. 지난 시즌 흥국생명에서 첫해를 보낸 이다현은 속공 성공률 53.5%로 리그 1위, 세트당 블로킹 0.63개로 5위를 기록했다. 두 선수가 동시에 코트를 밟으면, 상대 팀은 중앙 봉쇄와 블로킹 견제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측면 공격수들이 자연스럽게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외국인 선수 구성도 달라졌다. 2시즌 연속 아시아쿼터로 활약한 아닐리스 피치(뉴질랜드)와 결별하고, 현대건설 출신 일본인 아웃사이드히터 자스티스 야우치를 영입했다. 자스티스는 지난 시즌 35경기 466득점으로 아시아쿼터 최다 득점을 올렸다. 리시브 효율 37.9%로 리그 2위, 서브 득점은 세트당 0.35개로 1위였고, V리그 시상식에서 여자부 베스트7 아웃사이드히터로 선정됐다. 요시하라 감독과는 일본 오사카 마블러스에서 4시즌을 함께한 인연도 있다. 자스티스 본인도 "요시하라 감독과 함께하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전술 언어를 이미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팀 적응 속도 면에서 상당한 이점이다. 거기에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서 전체 3순위로 킨델란을 지명했다. 킨델란은 쿠바 출신의 188cm 아포짓 스파이커로 트라이아웃 첫날부터 각 구단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
내부 정비도 깔끔하게 마쳤다. 주장 김수지(총액 2억 원), 리베로 도수빈(총액 1억 4,000만 원, 보상선수로 정관장 이적), 아웃사이드히터 박민지(총액 7,000만 원) 등 내부 FA 3명 전원이 잔류를 택했다. 여기에 트레이드를 통해 경험 많은 아웃사이드히터 표승주도 합류시켰다. 흥국생명이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내주면서까지 데려온 카드다. 2010-2011시즌부터 프로 무대를 밟아온 표승주는 지난 시즌 FA 미계약으로 은퇴했다가 몸을 만들어 복귀에 성공한 케이스다. 베테랑의 경험치가 팀에 더해진다.

이번 흥국생명의 행보를 단순한 FA 쇼핑으로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 정호영 영입의 진짜 가치는 정호영 개인의 득점이 아니라, 그 존재가 만들어내는 공간과 견제 효과에 있다.
블로킹 상위권 미들블로커 두 명이 중앙을 동시에 점령하면, 상대 세터는 토스 선택지가 줄어든다. 중앙을 두려워하면 측면으로 몰리고, 측면이 열리면 날개 공격수들이 살아난다. 요시하라 감독이 지향하는 다채로운 분산 공격은 이 구조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요시하라 감독 스스로도 정호영에 대해 "높이와 스피드, 블로킹 타이밍을 모두 갖춘 선수"라고 평가했다. 단순히 높이만 있는 자원이 아니라, 전술 전체를 움직이는 기어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시즌 흥국생명의 가장 뼈아픈 장면을 복기하면 더 선명해진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실바 한 명에게 42점을 내준 장면은, 흥국생명의 블로킹 높이와 중앙 장악력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숫자로 증명했다. 그 약점을 메우는 데 두 시즌이 걸렸고, 이다현에 이어 정호영을 보태며 비로소 답에 가까워졌다.
주목해야 할 맥락이 하나 더 있다. 모기업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이 KOVO 9대 총재로 선임됐고, 흥국생명보험이 3년간 V리그 타이틀스폰서로 확정됐다. V리그 총재사로서 우승 트로피를 품겠다는 의지가 이번 공격적인 투자에 깔려 있다. 팬들은 이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다. 흥국생명 팬 커뮤니티에서는 "이다현 영입 때부터 그림을 그린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고, 배구 팬 사이에서도 내년 시즌 우승 후보 1순위라는 평가가 공공연하게 떠돈다.

그러나 변수는 남아 있다. 리베로 포지션이 아직 불안 요소다. 지난 시즌 신연경(리시브 효율 35.38%)과 도수빈(35.07%)이 번갈아 뛰었지만, 베스트7 리베로 문정원의 49.19%에 비하면 수치 차이가 적지 않다. 도수빈은 재계약에 성공했지만, FA 보상 선수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던 만큼 내부 경쟁과 자리 싸움이 어떻게 정리되느냐가 변수다. 외국인 공격수 슬롯도 확정되지 않았다. 기존 레베카 라셈을 유지할지, 트라이아웃으로 더 강한 옵션을 탐색할지가 남은 과제다. 세터진과 아웃사이드히터 포지션 최종 정비, 샐러리캡 관리까지, 아직 퍼즐 조각 몇 개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화려한 영입 이면에서 조용히 이뤄지는 이 정리 작업이 새 시즌 흥국생명의 완성도를 가를 것이다.
정호영은 "우승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짧게 말했다.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흥국생명이 지난 두 시즌에 걸쳐 쌓아 올린 전력의 무게는 그 말에 충분한 설득력을 실어준다. 이다현과 정호영의 더블 센터, 자스티스의 측면 안정, 표승주의 경험, 그리고 요시하라 감독의 전술 철학. 이 조합이 실제 코트에서 어떤 장면을 만들어낼지, 2026-2027시즌 개막이 그 어느 때보다 기다려진다.
Copyright © 구독과 좋아요는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