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팸햄, 못 먹어요"…튀르키예, 韓 구호식품 거절한 사연 [채상우의 미담:味談]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오 안돼, 또 스팸이야!(Oh hayır, yine spam!)"
1350만명에 달하는 튀르키예·시리아 강진 이재민을 위한 한국인들의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지만, 문화적 차이로 곤란한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한국인들이 보내오는 '스팸(햄)'이 문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햄의 주재료인 '돼지'는 금지된 음식(하람 푸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재민들에 가장 필요한 구호식품은 뭘까. 튀르키예에서 구호활동을 펼치는 NGO 등의 도움을 받아 현지 상황을 재구성했다.
튀르키예 구호 활동가 아브라함 누스렛은 트럭 한가득 실려 온 '스팸'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며 탄식을 내뱉었다.
"또 한국에서 보냈나 보네요. 양도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은데...고맙긴한데 어쩌죠." 옆에 있던 나짐 히크메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어쩌긴, 외국인 이재민한테 우선 배분하고, 나머진 다 창고로 보내야지." 스팸상자를 한참이나 바라본 아브라함이 말했다.
"지금 창고에 자리가 부족하다고. 곤란하다고 하는데요." 창고 담당자와 전화를 끝낸 나짐이 말했다.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될 거 같아요. 지금 다른 물품들 운반할 트럭도 부족하다구요. 다른 활동가들도 먹지도 못할 스팸이나 종이학 같은 걸 처리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들은 못하고 있잖아요." 나짐은 답답한듯 양팔을 벌리고 따지듯 목소리를 높였다.
"말 조심해. 그래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보내준 물건들이야.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그렇다 하더라도 조만간 대사관에는 얘기를 해봐야겠군.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따로 있는데 말이야." 나짐을 다그친 아브라함도 더는 손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같은 시간 한국.
"에고, 아기들 불쌍해서 어쩌냐" 저녁을 먹으며 TV로 뉴스를 보던 혜진은 밥알만 곱씹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엄마, 왜그래?" 혜진의 5살 아들이 말똥말똥 궁금하다는 눈으로 혜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외국에 지진이 났대. 지금 먹을 게 없어서 도율이 친구같은 애들이 밥도 잘 못먹고 그런가봐." 혜진은 혹시나 아들이 뉴스를 보고 놀랄까 채널을 급히 바꾸며 말했다.
"배고픈거 싫은데" 아들의 말에 혜진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필 뉴스에 먼지를 뒤덮은 아이들이 구호식품을 받아든 모습이 나와 더 그랬다.
'구호 가능 물품 : 식품(오래 보존 가능한 통조림)' 잠들기 전 튀르키예를 도울 방법을 찾던 혜진은 기사에 나온 문구를 보고 침대에서 일어나 찬장을 열었다. 명절마다 남편이 받아온 스팸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열량도 높고 맛도 있으니까 튀르키예 아이들도 좋아하겠지. 도율이도 얼마나 좋아하는데..' 혜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찬장에서 스팸을 모두 꺼내 부엌 한편에 쌓아놨다.
결국 주한 튀르키예대사관이 나섰다.
18일 헤럴드경제 취재에 따르면, 튀르키예 대사관은 더는 개인이 보내는 식품을 받지 않기로 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문화적인 이유로 대다수 튀르키예인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데, 한국에서 보내는 통조림 상당수가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이어서 현지에서 물량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유는 종교 때문이다. 튀르키예는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수니파 무슬림을 믿고 있다. 무슬림에서 금기되는 음식을 '하람(Haram) 푸드'라고 한다. 이슬람 율법에서 허용하는 음식인 '할랄(Halal) 푸드'의 반대 개념이다. 하람 푸드의 대표적인 게 '돼지'다.
그냥 돼지고기뿐 아니라 돼지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모든 것이 금기다. 예컨대 '초코파이' 역시 먹을 수 없다. 돼지껍데기에서 추출한 젤라틴 성분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젤리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돼지고기가 닿은 식기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선수들에게 이슬람 율법에 따른 '할랄푸드'를 제공했지만 거부한 일이 있었다. "돼지고기를 담았던 조리기구로 만든 음식은 진정한 할랄푸드가 아니다"라는 게 이유였다니 음식에 대한 그들의 신념이 얼마나 강한지 드러난다.
무슬림이 돼지를 멀리한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분분하지만, 튀르키예인들에게 이를 묻는다면 "알라가 쿠란을 통해 지시했다"는 간단 명료한 답이 돌아온다. 알라가 지시한 걸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튀르키예는 인접한 아랍국가들의 영향을 받아 7세기 후반부터 문화·사회·정치 모든 것에 이슬람 문화가 스며들었다. 현재의 튀르키예인들이 살기 전부터 이슬람국가인 사파르왕조와 사만왕조가 튀르키예에 터를 닦아놓은 만큼, 튀르키예는 국가의 형성 단계에서부터 이미 이슬람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 13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이 들어서면서 이슬람 문화는 더욱 공고해졌다.
1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런 이유로 튀르키예 인들은 돼지를 먹지 않았고, 그렇기에 한국에서 온 스팸은 그들에게 감사하면서도 미안한 한편으론 당혹스러운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그렇다면 튀르키예 이재민에게 가장 절실한 구호식품은 뭘까. 현지 구호가들은 '분유'와 '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수천 명의 생존자들이 추운 겨울 날씨를 버티며 임시 대피소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생존자들은 피난처와 음식, 물, 위생 시설 등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부족하고 추운 환경에서 제2의 인도적 재난을 맞고 있습니다. 이들이 추운 밤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식량과 식수, 임시 거처, 따뜻한 의류 등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세이브더칠드런 튀르키예 비상대응팀 소속 베르나 쾨롤루 씨의 말이다. 그는 참담한 재난 현장 속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추위와 배고픔, 목마름에 힘들어하며 목놓아 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더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며 기자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간절히 요청했다.
"현재 임시 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아동과 가족을 위해 음식과 담요, 매트리스, 침낭, 신생아를 위한 이유식과 우유 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제 원조 역시 이제 막 가장 필요한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피해를 당한 모든 아동이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모든 아동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전날 튀르키예에서는 2598명의 희생자가 더 늘었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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