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익진의 무비세프 <36> 서기(舒淇 Shu Qi)

정익진 시인 2022. 7. 2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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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맘보’ ‘자객 섭은낭’의 히로인

지금에서야 부산에서 영화 ‘밀레니엄 맘보(Millennium Mambo, 千禧蔓波, 2003)’를 보려면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더블콘 건물 4층 도서관(자료실)에 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영화배우 서기가 주인공이라는 것과 영화제목이 밀레니엄 맘보라는 점 때문에 영화는 선명하게 기억난다. 영화의전당이 생기기 전에 수영만 요트장 안의 영화관 시네마테크 자료실에서 이 영화를 골라놓고 우물쭈물하다 못 본 기억 때문에 더욱 잘 기억한다.

대만 태생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중화권 영화배우 서기.


짧은 동영상 자료를 보았다. 주인공 서기(비키)가 푸른 빛이 감도는 저녁, 뒷모습을 하고 성으로 향하는 기나긴 회랑 같은 길을 걸어가는 비교적 단순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이 상당히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가끔 담배 연기를 후 내뿜기도 하고 기나긴 흑발을 휘날리기도 하며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순간적 장면들이 몽환적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

서기의 얼굴은 글쎄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계 미국인 가수(레퍼) 제시의 몹시 야윈 모습(?)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입술이 매우 강조되는 얼굴인 점 또한 유사하다.

영화 시작부터 그녀(비키)의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흐른다. 영화 내내 지속되는 서기(비키)의 내레이션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극 전체를 끌어가는 해설자처럼 서사 흐름을 이끈다. 자신조차도 타자화시켜 ‘여자’라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식이다.

“여자는 하오하오와 헤어졌다. 그러나 그는 늘 그녀를 쫓아다녔다. 여자에게 전화하고 돌아오도록 애원했다. 몇 번이고 여자는 도망갈 수 없었다. 마치 주문에 걸렸거나 또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항상 돌아왔다. 여자는 혼잣말로 ‘은행에 50만 대만 달러가 있다. 그 돈을 다 써버리면, 그 남자를 영원히 떠날 것’이라고. 이 일은 1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2001년에. 세계는 21세기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천년을 축하하고 있었다.”

서기가 주연하고 허우샤오시엔이 감독한 영화 ‘밀레니엄 맘보’ 포스터. 젊은 날 서기의 눈빛과 표정이 청포도처럼 살아 있다.


이런 영화 내용 때문에 ‘밀레니엄 맘보, Millennium Mambo’라는 영화제목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일본 유바리를 배경으로 한 4분짜리 동영상도 볼 만했다. 속삭이는 듯한 서기의 목소리가 마치 쌓인 눈이 나뭇잎에서 떨어질 때 소리처럼 아니면 나직한 목소리로 시를 읊는 듯한 목소리로 들려왔다. 영화 장면들은 거의 원 씬 원 컷의 롱테이크 촬영기법을 쓰고 있다. 인물과 상당히 가깝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물 내면을 포착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물론 주인공 서기(비키)인데, 그녀의 웃는 모습, 술에 취한 모습, 담배를 피우며 허무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퇴폐적이지만 매우 인상 깊게 다가온다. 히스테리컬하면서도 어린 아이 같은 불안한 시선이 공존하는, 비참하지만 찬란한 20대 청춘 ‘비키’를 완벽하게 연기했다는 호평을 받으며 서기는 서서히 연기가로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이 영화를 감독한 허우샤오시엔(侯孝賢, 1947년 생)은 대만을 대표하는 감독이며 명실상부한 현 시대의 거장이다. 움직임 없이 대상을 물끄러미 응시하지만 화면 어딘가 삶의 근원적 비애와 동시대인에 대한 짙은 애정이 스며든 특유의 카메라워크와 미장센을 특징으로 한 영상미학을 추구한다고 알려졌다. 그의 말을 들어본다.

“이때까지의 내 작품의 시대 배경은 과거였다. 그러나 이번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속한 세상은 굉장히 빠르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시간 속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젊음은 피자마자 시들어버리는 꽃과 같다. ‘밀레니엄 맘보’는 시간을 통해 그 젊음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쓰리 타임즈’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는 서기(왼쪽)과 장첸. 이 작품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했다.

서기와 허우샤오시엔은 ‘쓰리 타임즈’(最好的時光, 2005)로 다시 한번 의기투합했으며 서기는 이 영화로 제42회 금마장상(Golden Horse Awards)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최전성기를 이어갔다. 2015년 서기는 허우샤오시엔과 세 번째로 함께한 작품 ‘자객 섭은낭’에서 여성 자객 역할을 맡아 아시아 필름 어워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자객 섭은낭’은 허우샤오시엔의 첫 번째 무협 액션영화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허우샤오시엔에게 안겨주었고, 서기는 호평받았다. 허우샤오시엔과 함께한 협업은 서기의 배우 역량을 극대화했고 중화권 영화배우로서 서기가 국제적 인지도를 얻게 한 토대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서기(舒淇, Shu Qi·1976년 생)는 타이베이 신베이(New Taipei City) 시에서 태어난 대만의 배우. 본명은 린리후이(林立慧)이고, 서기(舒淇)는 예명이다. 17세가 되던 해 홍콩으로 이주하였다. 홍콩에서 처음으로 하게 된 일은 소프트코어 포르노 산업의 누드모델이었다. ‘홍등가의 혈투’로 스크린에 데뷔햇다. ‘첨밀밀 2’에 출연해 유명해졌다.

한국과도 꽤 인연이 있다. 2000년 김민종의 6집 타이틀곡 ‘왜’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2002년 ‘버추얼 웨폰’에서 송승헌과 호흡을 맞췄고, 2006년 ‘조폭 마누라 3’에서는 이범수·현영과 출연했다. 2003년 미국 영화 ‘트랜스포터’에 출연했다. 2009년 ‘스트리트 오브 드림스’에서 로버트 드니로와 연기했다. 2008년 58회 베를린영화제와 2009년 칸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다. ‘색정남녀’로 홍콩금상장을 받았다. ‘쓰리 타임즈’는 그녀에게 대만금마장을 안겼다. 2015년 ‘자객 섭은낭’에 섭은낭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서기는 한창 활동할 무렵이었다. (그녀가 책임져야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 탓에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소진시키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던” 시기였다. 서기는 한 인터뷰에서 우상이라고 밝히기도 했던 장만옥과 나눈 대화가 이 시기를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됐다고 했다. 장만옥은 “누군가 시키기만 하면 그 어떤 배우보다 훨씬 깊어질 수 있는 사람”이라며 배우로서 서기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서기가 장만옥에게 영화배우를 그만두겠다는 푸념을 늘어놓을 때면 “작품을 적게 하는 건 괜찮지만 그만둘 생각은 말아라. 그건 범죄나 다름없다”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영화 ‘자객 섭은낭’에 주인공 섭은낭으로 나온 서기. 이 영화는 무협영화의 틀을 빌려 삶과 세계 깊은 곳을 자객처럼 찌르는 걸작이다. 이 영화는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고, 서기는 세계 영화계에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서기의 영화를 많이는 보지 못했지만 그중 ‘자객 섭은낭’이 가장 인상 깊다. 섭은낭이란 이름도 절묘한 느낌을 준다. 섭은낭이라고 발음하면 그녀가 언제 왔는지 내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분명 무협영화 장르라고 알고 봤는데 정작 칼쌈하는 장면은 몇 되지 않는다. 대사도 많지 않다. 칼쌈도 없고 목소리도 조용조용해 우리가 알던 무협영화 문법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섭은낭으로 분한 서기의 모습도 모든 것이 많이 절제되어 있다. 말도 별로 없고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에 표정을 가린 섭은낭의 모습은 다리 없이 떠다니는 귀신 같기도 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섭은낭은 말하자면 무림 고수로. 살인청부업자다. 하지만 무조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누가 뭐라 해도 자객(암살자)인데, 사람은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섭은낭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자객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다른 칼쌈과 격을 달리한다.

영화 ‘자객 섭은낭’ 한 장면. 주역 서기의 모습이다.


칼과 칼의 부딪는 소리를 멀리하고 한 폭 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절제된 풍광과 여백이 오히려 대세를 이루어 칼이 가진 냉혹함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영화가 아닐까. 영화가 정작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는 섭은낭의 심리일 것이다. 영화 초반부, 섭은낭의 스승인 여도사는 검술은 완벽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흔들리는 섭은낭을 질책한다.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린 여도사는 섭은낭을 지금보다 더 완벽한 자객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인지, 한 때 섭은낭이 사랑했던 전계안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섭은낭은 갈등 속에서 망설인다.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섭은낭은 전계안을 죽이지 않는다. 애초 전계안을 죽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섭은낭은 인륜의 정을 끊지 못하고 자기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보통 인간으로 퇴화한다. 정의 구현 또는 대의를 위해, 자신과 얽힌 모든 인연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스승과 달리. 섭은낭은 ‘위박’에 남은 부모님의 안위가 걱정스럽고, 전계안의 본처에 의해 죽을 위기에 처한 전계안의 첩 호희의 불안한 운명에도 눈길이 닿아있다.

‘자객 섭은낭’에 등장하는 인물 중 그래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얽힌 감정에서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인물은 의외로 섭은낭 아닐까. 질투 증오 복수 등 삭막하고 가파른 감정에 사로잡혀,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다른 종족과 격을 달리한다. 섭은낭은 오로지 진짜 칼날이 필요한 때에만 칼을 뽑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말하자면 자신의 본심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려 한다.

그래서 섭은낭은 번뇌와 굴레를 내팽개친 냉혹한 자객은 되지 못했지만, 인륜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여백을 두니, 오히려 한결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영화 ‘쓰리 타임즈’는 보지도 못했지만 동영상 자료도 거의 없는 편이다. 영화 전체를 담은 영상자료가 하나가 있긴 있는데, 화면도 흐리고 자막도 불어라 알아 볼 수 없다. 소리도 들리지 않아 몇 개의 장면만 추려보았다. 남자배우로 머리를 빡빡 깎은 장첸이 나오고 여주인공 서기가 한들한들 예쁜 옷을 입고 예쁜 모습으로 등장한다.

초반 장면은 당구장이다. 우리 당구장과는 좀 분위기가 다르다. 넓고 분위기가 편해 보이고 서정적인 느낌마저 든다. 당구장의 여신처럼 서기의 당구 치는 모습도 꽤나 눈길을 끈다. 영화 중간쯤 가서는 남자주인공 장첸이 변발을 하고 등장하고 서기는 올림머리를 하고, 중국 사극에서 볼 수 있는 의상을 입고 있다. 다른 영화인가? 영화 전체를 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장면 장면을 보면 볼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이 영화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본다.

‘쓰리 타임즈’(最好的時光)는 2005년 제작된 타이완의 드라마 영화다. 허우샤오시엔이 감독과 공동각본을 맡았다. 2005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작이다. 제 10회 부산 국제 영화제(BIFF) 개막작이기도 하다.

‘쓰리 타임즈’는 옴니버스 형식이다. 세 편의 서사로 구성됐다. 시대 배경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지만 두 명의 주인공(서기와 장첸)은 같다. 그 두 명은 시공을 초월해 환생한 듯 조금씩 이름과 관계를 바꾸어 영화를 끌고 간다. 첫 번째 시간은 1966년 가오슝이 배경이다. 당구장 종업원 슈메이(서기)와 휴가를 맞아 당구장을 찾은 군인 첸(장첸), 두 연인의 ‘연애몽(사랑의 꿈)’이다.

2006년 한국영화 ‘조폭마누라3’에 출연한 서기(왼쪽).


두 번째 시간은 1911년, 격변기 대만이 배경이다. 개화사상을 주장하는 신지식인 창(장첸)과 유곽 기녀 아메이(서기) 사이의 ‘자유몽(자유의꿈)’이다.

세 번째는 2005년 타이베이, 간질병을 앓는 칭(서기)과 클럽에서 노래부르는 ‘칭’에게 반한 첸(장첸)의 엇갈린 사랑을 그린 ‘청춘몽(청춘의 꿈)’이다. 주목할 점은 이 한 편 영화에서 허우샤오시엔은 자신의 영화적 포석을 들여다보고 마술사처럼 자유롭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창조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최호적시광’(最好的時光), 즉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음악 중 아프로디테스 차일드(Aphrodite‘s Child)가 부른 ‘빗물과 눈물(Rain And Tears)’ 일부를 불러본다.

빗물과 눈물은 같아 보여요/ 하지만 햇살이 비치는 날에는

눈물을 빗물인 것처럼 속일 순 없어요/ 마음에 상처를 입고 당신이 눈물 흘릴 때

그것이 단지 빗물일 뿐이라고/ 그런 척 할 수 없는 거잖아요ij07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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