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상캐스터들에게 바랐던 것들
[이슬기의 미다시 (미디어 다시 읽기)]
[미디어오늘 이슬기 프리랜서 기자]

3·8 여성의날 하루 전날인 지난 7일, 서울 광화문에서 제41회 한국여성대회가 열렸다. 5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마련한 시민참여 부스에는 많은 이들로 북적였다. 전국여성노동조합의 부스도 있었는데 거기에는 '가장 우선순위로 변화시키고 싶은 곳에 스티커를 붙여달라'는 투표판이 눈에 띄었다.
투표 항목들은 다음과 같았다. '①여성 노동자의 임금을 높여요', '②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찾고 차별을 없애요', '③직장 내 성희롱, 괴롭힘을 바로잡고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어요', '④5인 미만 사업장, 계약직/파견직/간접고용 프리랜서 등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확보해요', '⑤여성 노동자의 기준에 맞는 안전한 일터를 만들어요', '⑥차별금지법, 성평등 공시제 법 등 여성 노동자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요'.
스티커를 들고서 오래 망설였다. 이 가운데 무엇 하나 시급하지 않은 게 있을까. 한국에서 여자의 얼굴을 한 '기상캐스터'라는 직업도 그렇다. 반복되는 단기 계약과 꾸밈 노동에의 압박으로 인한 상시적 저임금 상황, 육아휴직 등이 적용되지 않는 프리랜서 신분, 고 오요안나 MBC 기상캐스터의 사망으로 드러난 직장 내 괴롭힘 문제까지.

최근 MBC가 기상캐스터 직군을 폐지한 자리에 '전문성'을 앞세운 기상분석관을 채용, 방송을 시작했다. 단 한 명, 남성이었다. 오 캐스터가 사망한 지 1년 6개월 만의 일이며, MBC가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한 지 5개월 만의 일이다. MBC는 기상분석관 직군을 만들면서 기존의 여성 기상캐스터들과 계약을 종료했다. 27일 간 단식 투쟁에 나섰던 오 캐스터의 어머니 장연미 씨가 MBC에 재발 방지를 촉구하며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의 정규직화를 요구했던 것과는 거리가 한참 먼 대책이다.
MBC 보도자료에 나온 '기상분야 전문성'이라는 말에 앞서 우리는 지금껏 압도적 여초 직업이었던 기상캐스터들에게 요구해 온 전문성은 무엇이었는지 들여다 봐야 한다. 제목 자체가 '기상캐스터와 성역할 고정관념'(홍숙영, <인문사회21>, 2022)이라는 논문이 존재할 만큼 기상캐스터는 젠더화된 직업이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한국에서 기상캐스터는 '미모와 몸매를 갖춘 젊은 여성'을 의미하는 하나의 기호가 됐다.
지난 5일 토론회에서 프리랜서 아나운서와 기상캐스터의 노동 실태를 발표한 김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장도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이들은 선발 과정과 업무 전반에서 외모가 중요한 요소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외모 관리에 대한 심한 압박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특히나 화면에 전신이 나오는 기상캐스터는 몸매까지 더욱 가열찬 평가의 대상이 되며, 그 바람에 뉴스 수용자들로부터 성희롱에도 자주 노출된다. 외모가 곧 자기 관리의 영역인 시대에, 기상캐스터는 외모가 곧 전문성으로 여겨져온 직업이다. 여기에는 여성을 성 상품화하는 대중들의 시각과 함께 이를 고착화하는 방송사들의 채용 행태가 한몫했다.
[관련 기사 : 미디어오늘) 차별·성희롱 노출된 여성 프리랜서 아나운서·기상캐스터들 (3월5일)]

그렇다면 기상캐스터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직무 전문성'은 없는 이들일까. 기상캐스터라는 직업 또한 방송 전문가다. 홍숙영(2022)에 따르면 기상캐스터는 1분의 날씨 뉴스를 위해 예보문을 분석하고 직접 원고를 쓴다. 컴퓨터그래픽(CG) 구성이나 의상과 소품 선택에 이르기까지 손수 기획하는 경우가 많다. 방송사들은 기상 지식보다는 대중과의 상호 소통과 전달력에 방점을 두고 지금껏 기상캐스터들을 선발해왔다. 그것이 기상캐스터가 가진,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전문성이다.
'여초 직업' 기상캐스터들이 겪은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 직장 내 괴롭힘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았던 작업장의 현실은 '고 오요안나 사태'를 낳았다. 그 결과 대책을 강구하겠다던 MBC가 '기상분야 전문성'을 강화하겠다며 기상분석관으로 단 한 명만의 남성을 채용한 현실은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이는 그간 열악한 노동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사의 날씨 뉴스를 책임졌던 여성 노동자들의 노고와, 기상캐스터들이 노동자성을 인정받길 바랐던 고 오 캐스터 유족들의 바람을 모두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기상캐스터 없앤 MBC, 남성 정규직 기상전문가 투입>(조선일보, 2026년 3월4일) 같은 기사 헤드라인은 여성 기상캐스터는 '비전문적'이며 남성 기상전문가는 '전문적'이라는 일련의 통념을 강화한다.
오늘도 뉴스 화면, 특히나 스튜디오에 출연한 여자들은 굽 높은 펌프스에 전신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타이트한 핏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상대적으로 넉넉한 핏의 바지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남성 출연자와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MBC의 행태를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가 기상캐스터들에게, 화면 속 여성들에게 가혹하게 바랐던 것들을 돌아본다. '외모가 곧 경쟁력'이라며 '얼평'과 '몸평'을 상시적으로 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쉽게 그들의 전문성을 폄훼하지는 않았는지. 오 캐스터의 죽음과 어머니 장연미 씨의 투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이런 결말은 아니리라 생각하면서, MBC의 날씨 뉴스에서 여자들을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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