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진보도 보수도 아닌 ‘정신 승리’에 입각한 가짜 역사

송평인 논설위원 2024. 10. 1.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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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당시 여권에 조선인 국적은 다 일본
일본 아니라는 증거도, 대한민국 국적도 없어
거짓은 나라 안 잃었다는 ‘정신 승리’에서 비롯
국적과 국적보유자 간 차별도 구별 못한 무식
송평인 논설위원
일제 시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임을 명시한 여권은 다수 남아있다. 반면 일제 시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 아니거나 대한민국임을 보여주는 여권은 하나도 없다. 당연히 없다. 나라를 잃었으니까.

조선인의 국적은 1910년 일본의 조선 병합 이전에, 이미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대외적으로 일본이었다. 1907년 전라도 해남군에 주소를 둔 박창규라는 조선인의 여권에는 ‘일본제국 해외여권’ ‘조선신민(臣民)전용’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미국의 보호령인 괌의 주민이 대외적으로 미국 국적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

병합 이후인 1916년 하와이로 이민 간 천현희라는 조선인의 여권에는 ‘일본제국 해외여권’, 1938년 역시 하와이로 이민 간 이동진이라는 조선인의 여권에는 ‘대일본제국 여권’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다만 병합이 된 다음이어서인지 ‘조선신민전용’이란 말은 사라졌다.

이종찬 광복회장과 정청래 등 더불어민주당 몇몇 의원들이 국민을 상대로 겁박하듯 일제 시대 조선인의 국적에 대해 묻기 전까지 대다수는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마라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도 있고 해서 당시 국적은 대외적으로 일본이지 않았겠나 추측하는 정도였다. 상식적인 추측이 옳았다.

내가 일제 시대 조선인의 국적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본 것은 2009년이다. 당시 보훈처발로 일제 시대 국내에 호적이 없어 ‘무국적자’로 취급받던 독립유공자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제 시대 국내에 호적이 있던 사람은 1948년 대한민국 국적법 제정 이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자동 계승됐지만 호적이 없던 사람은 계속 무국적자로 남았던 것이다.

세계가 한 나라라면 국적은 필요 없다. 국적은 상대할 외국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그래서 국적이라고 하면 여권을 떠올린다. 물론 여권에 기재되는 국적은 그 나라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는 자료에 기초해서 주어진다. 그 자료가 일제 시대에는 호적이었다.

지금의 우리는 전근대적인 신분 사회에 산 것도 아니고 제국주의를 경험한 것도 아니어서 한 나라에 두 종류 이상의 내국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잘 못한다. 일제하에서는 호적이 있는 곳에 따라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등으로 나뉘었다. 조선인 대만인 등은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온전한 형사사법절차 등은 물론이고 외국적 취득 등 일본인에게 적용되는 국적법의 혜택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대외적으로 당시 조선인과 대만인이 일본 국적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시민권과 국적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 그들은 미국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누리지 못했지만 국적은 미국이었다. 일제 시대 조선인 국적 문제는 스스로도 대내적인 권리의 문제와 대외적인 국적의 문제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이를 한데 뒤섞어 불러일으킨 혼란이다.

동아일보는 1923년 일제 시대 만주 간도 용정에서 일어난 탈적(脫籍) 운동을 보도했다. 그해 2월 용정에서 한 조선인이 중국인 병사에게 살해당하자 그곳 조선인들은 대회를 열어 중국 정부에 항의함과 동시에 일본 국적에서 벗어나자는 운동을 벌였다. 일본이 조선인을 보호해 주지도 않으면서 일본 국적에 매어 놓았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조선인은 간도에 있는 조선인까지 국내에 호적을 두고 있는 한 일본 국적이었고 그 사실을 조선인 스스로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일제 때 나라 잃은 설움을 말하면 매국노 취급받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한일병합이 국제법적으로 원천 무효이기 때문에 소급해 일제 시대에도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는 주장은 법적(de jure) 상태와 사실적(de facto) 상태도 구별하지 못하는 치기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삶이 법으로 환원되지 않듯이 역사는 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한일병합이 무효이든 아니든 일본은 조선을 강점했고 그 사실이 선조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한일병합이 무효라고 해서 그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일제 시대 나라를 잃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일제 시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 아니라거나 대한민국이라는 주장은 치기가 치기를 낳은 끝에 생겨난 거짓말이다. 그것은 진보 사관에 입각한 것도, 보수 사관에 입각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정신 승리’에 입각한 가짜 역사일 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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