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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
이 글의 목적은 이 갤을 포함해서 도쿄에 간다면 한 번쯤 가볼만한, 시민공원화된 공간인 '메이지 신궁'이 어떠한 공간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임.
이에 대한 정치적 판단과 선악은 개인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가서 관광을 하건, 뭐 참배를 하건 신경 안씀. 내 일 아니니까.
그걸로 정죄할 생각도 없음. 그건 개인 자유지 내가 뭐라할 게 아님.
다만 관광지로 가더라도 어떠한 공간인지 인식하고 가는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단순히 가면 된다 안된다의 문제가 아니라, 관광으로 간다 하더라도 '이 곳은 이런 공간이구나', '이 공간에선 무엇을 새롭게 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줄 것이고, 그게 여행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줄거임.
간단히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메이지 신궁이라는 공간은 '야스쿠니 신사' 그 이상의 극우의 성지이다.
일본에서 극우들에게 추앙받는 3개의 공간이 있다.
이세 신궁은 일단 빼놓고 이야기하고.
1) 교토 '료젠 호국 신사' : 제국을 만든(메이지 유신) 사무라이들의 무덤
2) 도쿄 '야스쿠니 신사' : 제국을 지탱한 실무자들인 군부의 위령처
3) 도쿄 '메이지 신궁' : 제국의 정당성과 이데올로기(덴노주의) 그 자체의 상징
이렇게 요약 가능하다.
여기서 '료젠 호국 신사'가 가장 생소할거임. 그런데 일본 여행 가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모를 수가 없는 곳이다. 어디냐고?
교토 히가시야마 방면(기요미즈데라, 니넨자카 산넨자카, 고다이지 있는 곳) 가봤다면 저 무식하게 큰 관음상 한번은 봤을거임.
저 불상이 위치한 곳이 바로 료젠 고코쿠(호국) 신사이며, 사카모토 료마나 나카오카 신타로, 기도 타카요시 등 메이지 유신을 만들어 낸 사무라이들의 무덤이 있는 장소임.
이 장소도 마찬가지로 일본 극우의 상징이다.
아무튼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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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덴노는 뭐하는 놈인가?
메이지 신궁이 어떠한 공간인지 알려면 메이지 덴노가 어떠한 인물인지 간단하게 알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일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한 시기의 천황이며, 천황이 가장 힘이 강하던 시기의 인물이다.
이상하게 한국에는 위키 등을 통하여 '메이지 덴노가 실권이 없고 단순히 도장찍는 인물'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고메이 덴노는 정치적으로 미친 수준의 인물이었다. 아무런 실권이 없던 덴노가 쿠로후네 사건(흑선개항)과 어쨋건 명목상으로는 정치적 최고의 자리에 있다는 명분을 이용하여 막부를 정치적으로 휘둘렀고, 죠슈번과 사츠마번에게 밀서를 통하여 정국을 흔들 것을 지시하는 등 정치적으로 미쳐 날뛴 인물이다. 이로 인해 아버지 고메이 덴노때부터 덴노의 정치적 영향력은 미친듯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이지 덴노 대에 이르르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형식임에도 1867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쇼군과 막부 인사들을 덴노 앞에 무릎꿇리는 '대정봉환'을 실시함. 이는 정치적 쇼였는데, 사실상 덴노 중심의 신정부 수립을 선포한 것이고 동시에 단순히 덴노가 승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권력과 정권을 자신이 휘두르겠다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어 구 막부파를 숙청하는 보신전쟁, 자신이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써먹었던 장기말들을 숙청하는 '세이난 전쟁'에서 군사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병시키고 전황을 지휘함으로써 전쟁의 상징이자 정치적 주체로 활동한다.
이후 자신의 국가 재편성을 위해 단행한 도쿄 천도(1869)나 군인칙유(군 이념 설계), 교육칙어(교육제도를 덴노 중심으로 개편) 설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더 나아가 조미수호조약과 조선출병, 명성황후 시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합병 등 핵심 정치 주체이자 일본의 제국주의 체제 베이스를 마련한 인물이자, 동시에 군국주의 체제로 발전할 여지까지 남겨버린 인물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메이지 덴노는 조선 출병과 합병의 핵심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아버지. 그리고 동시에 일본이 1910~1950년 군국주의로 미쳐 날뛰게 만들 기틀을 잡은 아버지이다.
단순히 도장찍는 인물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메이지 덴노는 덴노의 실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의 인물이다. 15세의 나이에 대정봉환을 받아내고, 그 이후에 공무합체파 다 무시하고 막부파 일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인물이 정말로 실권이 없었을까? 이토 히로부미의 문신파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무신파를 휘두르면서 온갖 핵심적인 정치쇼에 자신을 다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시스템을 만드는 데 간여한 인물이?
이런 이미지가 나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메이지 신궁이 어떻게 일코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며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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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신궁은 어떠한 장소였는가?
메이지 신궁은 간단히 말하면 '메이지 덴노'를 신격화하여 모시는 장소이다.
1912년 사망한 메이지 덴노를 1920년 신궁을 설립하여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형성된 '국가신토'라는 체제로 덴노를 신격화하고 통합하려는 '신정국가 일본제국'을 드러내는 모습이며, 그에 따라 메이지 신궁은 이데올로기의 상징이며,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종교적 권위로 정당화하려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당시 식민지의 경제체제는 알아서 하는 체제였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대만과 일본 본토, 만주 등 식민지는 자체적으로 벌어들이는 수입금에서 일부를 세금으로 본국에 보내고, 그 중에서 일부를 제국의회의 승인을 받아 사용하는 체제였다. (물론 직접 벌어들이는 비용 등이 있었는데, 그걸 위해 총독부가 조선에서 시행했던게 '조선박람회'이다.)
그러나 메이지 신궁의 건립은 전 제국적인 프로젝트였고, 그에 따라 조선과 만주 등 모든 식민지에서 현금을 강제하거나 유도했다. 조선총독부 역시 한국인들에게 '조선도 일본의 일원'이라는 명목으로 건립 기금들을 강탈했다.
그에 따라 메이지 신궁의 건축적 요소와 주변 시설물들도 전부 신토국가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적 요소와 제국주의적 요소들로 들어찼다.
건축의 설계는 헤이안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 유시마 성당, 도요토미 히데요시 묘, 조선 신궁 등을 건축한 인물인 이토 츄우타(伊東忠太).
제국주의 건축의 거장으로, 그의 건축목록에서 보이듯이 그는 신토와 황국사관, 전통미학과 '자연풍광'을 결합하여 시설들을 디자인하는걸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에 따라 메이지 신궁 내부에는 숲을 조성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사할린과 만주, 조선, 대만 등지에서 '자발적으로 헌목'들이 이루어져 약 10만 그루의 나무를 식민지에서 받아내었으며, 약 11만명의 '자발적 봉사'를 통하여 숲을 완성시킨다.
입구의 대도리이는 대만 침공을 기념하여 대만산 나무로 지어졌으며, 1970년대에도 대만산 나무로 굳이 지으려다가 국제사회의 눈총을 받고 취소되었다.
덴노주의의 핵심인만큼 정원 곳곳에는 기미가요에도 나오는 '조약돌이 바위가 되는', 조약돌이 뭉쳐서 이루어진 바위들을 세웠다.
신궁 내에는 '지성관'이라 하여, 당시 일본제국의 교육 방침이던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에 맞추어 검도나 유도 등을 수련하는 공간을 조성하였다. 종교와 무술, 군사의 합치를 보이는 공간이다.
이외에 신궁 곳곳에는 각종 비석들이 서 있으며, 이 비석들은 당시 군부 핵심 인물들이 작성하였고
신궁의 남쪽에는 육군성 연병장이 있어 군사시설로도 활용되었다. (현재 올림픽을 거치며 공원이 되었다.)
신궁은 건립 후, 매년 덴노 탄생일과 전승기념일, 제국헌법 기념일 등 각종 국수주의 행사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전쟁 말기, 도쿄 인근 지역의 소년병 징집 후 이들이 출병하는 '출진학도장행회'를 포함하여 군사행사와 극우청년단 집회 및 소년병과 군인, 교사 공무원의 의무참배 등 군국주의의 충성과 충효 교육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이 구조는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조직된만큼 야스쿠니 신사보다 훨씬 체계적이며 일상적으로 국민들에게 녹아들었다.
즉, 신궁은 '덴노는 현신이며, 일본 제국의 정당성은 그의 존재에서 기원한다'는 일본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장소이고 물리적으로나 건축적, 의례적, 교육적으로 구현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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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은 어떻게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였는가?
가장 임팩트있는 사건은 1978년 야스쿠니 신사의 A급 전범 합사이지만, 단순히 이 사건 하나로 갑자기 극우의 상징이 메이지 신궁에서 야스쿠니 신사로 이동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 수십년에 걸쳐 메이지 신궁의 극우적 이미지를 점진적으로 희석시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상기한, 메이지 덴노가 '단순히 도장찍어주는 인물'의 이미지로 탈바꿈한것과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1946년 1월부터 벌어진 극동군사재판은 뉘른베르크 군사재판과 마찬가지로 그 시작부터 끝까지 결국 수많은 말을 남기었다.
이는 극동군사재판과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이 결국 냉전 체제의 격화로 인하여 전쟁의 명분적, 윤리적인 책임을 묻기 보다는 이후 정치 체제를 고려하여 국제 질서의 개편을 두고 손익을 따지며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극동군사재판에서 오늘날까지 남았던 가장 큰 이슈는 이것이다.
'덴노는 전범인가?'
메이지 덴노가 제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도장찍었던 '메이지 헌법(1889)'에는 '덴노는 군 통수권자이자 입법과 사법, 행정의 원천이다'라고 명시되어있다.
거기에 전쟁 수행 중 모든 칙령과 군사 명령은 덴노가 가장 강력하게 권력을 발휘하였던 시기였던 당시 덴노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며
개전 칙유, 교육 칙어, 군인 칙유 등 덴노는 국민 통제와 전쟁 이데올로기의 창설에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권력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그에 따라 극동군사재판 초기에는 연합국 측에서도 당시의 덴노인 히로히토(쇼와 덴노)를 전범으로 기소해야한다는 여론이 대세였다.
전후 일본은 점령군의 수장인 더글라스 맥아더와 GHQ에 의해 철저히 분해된다.
백인 쇼군이라고 불리었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일본 점령 통치 및 전후 소련의 견제를 통하여 일본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였고 이는 트루먼 대통령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하였다.
당시 한반도 38선까지 밀고내려온 소련의 견제에 일본의 부활은 미국에게 있어 필수불가결하였으며, 당시 전후에 일본에 퍼지던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사상을 경계한 미국은 기존 통치체제로 이미 자리잡은 권위인 덴노가 무너지면 일본은 혼란에 빠지며, 공산화 될 수 있다는 것에 두려워하였다.
그에 따라 일본 점령 통치의 안정과 효율성, 일본의 부활을 위하여 연합국 최고사령부(GHQ)는 덴노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46년 1월, 맥아더의 '덴노는 재판 대상이 아니다'라는 공식 선언을 통하여 덴노는 덴노의 면책이 확정되었다.
후줄근한 군복 차림의 맥아더와 정장을 입고 찾아온 쇼와 덴노.
이 충격적인 사진은 일본 국민에게 2가지를 시사하였다.
1) 일본은 미국에게 패하였다.
2) 덴노는 위대하지 않으며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동시에 일본 정부는 극동군사재판 초기부터 '일본정부는 군부에 의해 휘둘렸으며, 덴노는 실권이 없었다.'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내세웠고, 히로히토 본인도 동일한 주장을 적극적으로 맥아더에게 전달하였다. 그렇게 GHQ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 주장을 수락하였다.
그렇게 일본 정부와 황족, GHQ와 미국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전범의 가장 큰 책임은 '덴노'가 아닌 군부와 대신에게, 덴노는 '평화의 상징'으로 재설정되었다.
이후 1947년, 덴노는 '신헌법 제1조'에 의거하여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이 되었고, GHQ는 덴노를 '상징화'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하였다.
이에 따라 메이지 신궁의 운명도 재편성되었다.
신정 군사국가의 상징이던 메이지 신궁도 이 변화에 응할 필요가 요구되었다.
우선 1945년 12월, 신도지령에 의하여 국가신토는 해체되었고 신사는 국가와 완전 분리된 민간 종교시설로 격하되었으며 그에 따라 메이지 신궁도 국가시설이 아니라 '지원금을 받는' 시설이 되었다.
GHQ의 경제정책은 이를 뒷받침하였다. 본래 메이지 신궁의 참로로 발전했던 하라주쿠와 오모테산도. 인근의 신주쿠는 발전의 제1순위가 되었다.
GHQ의 자금유입과 함께 미국 문화가 미친듯이 일본에 몰려들었다. 1950년 신주쿠 가부키초에서 개최된 '도쿄 산업 문화 박람회'는 이 지역의 부흥에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더군다나 22만평에 달하는 광대한 녹지! 도쿄같은 고밀도 도심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녹지는 시민들에게 있어 엄청난 메리트였다.
참로와 주변지역을 통하여 최신문화가 유입되면서 외면적으로는 메이지 신궁의 정치적 이미지도 탈색되었다. 외면적으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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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신궁은 정말로 탈정치하였는가
1970년. 메이지 신궁 입구의 대도리이가 노후되어 교체가 결정되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도리이는 1920년대에 '대만 침공의 상징'으로 대만에서 공수한 삼나무를 활용하여 만든 도리이였다.
문제는 1970년에도 이 도리이를 대만산 삼나무로 제작하고자 한 것이었다.
한번 자리잡은 제국의 상징이라는 이미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대만은 일본 제국의 영광을 기리는 데 기여하는 속국'이라는 이미지'
'대만 총통부와 중화민국은 국제사회에서 일본과 반공 동맹 관계이며, 일본 극우 세력은 대만을 구 제국 동맹국으로 여겼다는 점.'
'우정의 표시로 해석한 대만 총통부'
이 세 박자가 어우러져 메이지 신궁 입구의 대토리이를 다시 대만산 삼나무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결국 정치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신궁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닌, 여전히 '제국으로의 회귀를 원하는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던 것이다.
덴노가 전쟁 중 핵심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일본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며, 그에 따라 비정치화 조치를 위에서 명령한들 쉽사리 별할 수 없었다.
메이지 신궁이 결국 '덴노와 국가'를 상징하는 점에서 비정치화를 시도한들, 이미지의 변경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본 우익에게는 메이지 신궁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성지'였으며, 그 이미지는 계속 공유되었다.
거기에 천황가가 메이지 신궁과 공식적인 관계를 단절하였음에도, 1960~1970년대에 여전히 전통 예식과 연중 제사, 황궁 행사와 연계한 행사들이 활발히 열어졌으며, 이 모든 것은 문화라는 외피를 쓴 정치적 통합의 상징이었고 이는 1920년대나 1970년대나 여전히 동일하였다.
메이지 신궁은 외면적으로는 정치색을 탈피하였으나, 여전히 극우 정치세력인 '일본 회의'의 활동 중심지이며, 신토 정치연맹과의 적극적인 움직임. 그리고 우익 정치인들의 메이지 신궁 방문은 여전히 메이지 신궁 측이 극우의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메이지 신궁 법인이 이들과 가까운 사이임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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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형식적 탈이데올로기와 비공식 이념의 지속
메이지 신궁은 1945년 패전 이후, GHQ와 일본 정부에 의해 국가 신토 체제에서 탈각되며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그리고 이념적 기능을 잃은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는 전후 일본이 '평화국가'로서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에 덴노 체제를 유지하되, 덴노와 그를 모시는 신사들을 비정치화하여 국민적 통합을 꾀한 결과였다. 그에 따라 메이지 신궁은 전통과 자연, 문화유산의 공간으로 포장되었고 하라주쿠와 요요기 등 일대의 도시 재편과 맞물려 관광지이자 결혼 명소로 변모해갔다.
그러나 이런 대외적 이미지 전환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신궁은 여전히 일본 우익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중심지로 기능했다. 1970년 대만산 삼나무 도리이 재건 논란은 제국주의적 기억과 식민지 서사의 연속성을 드러내었고, 2000년대 들어서도 일본회의, 신도 정치연맹 등 우익 세력의 이념적 활동 무대이자 덴노 숭배 사상의 상징으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결국 메이지 신궁은 전후 '비정치화'라는 외피 아래에 문화와 종교, 정치가 은밀하게 교차하는 이념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일본 우익의 무언의 상징으로 살아있는 장소이다.
도심 한가운데의 광활한 녹지와 일본 전통 건축. 많은 전통행사.
거기에 남쪽에는 시부야와 요요기 공원. 동쪽에는 하라주쿠와 오모테산도, 아카사카 이궁. 북쪽에는 신주쿠. 서쪽에는 시모키타자와.
도쿄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메이지 신궁은 분명 빼어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그러나 동시에, 메이지 신궁은 메이지 덴노의 신격화를 통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정당화,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강한 일본에 대한 숭배와 추구'. 이 흔적은 지금도 신궁 곳곳에 숨어있다.
도심 속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전통 건축들.
일붕이들이 메이지 신궁을 재방문하였을때 이런 관점을 가지고 둘러본다면 보이지 않았던 그 '이념의 자취'들. 그리고 전통과 기억, 권력의 레이어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복합적인 새로운 이미지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