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눈치 보여 못해” 암·치매 논문 다 멈췄다…전공의 떠난 의대 연구 실적 ‘추락’
방사선종양학회 한산…논문 접수 6분의 1
“임상 연구, 전공의 없으면 절대 불가능”
“연구에 투자하던 야근, 지금은 당직 서기 바빠”
[헤럴드경제=박혜원·안효정 기자, 김도윤 수습기자] #.지난 11일 오전 11시께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대한방사선종양학회 추계학술대회는 참석자 자리가 절반 이상 비어 있었다. 교수들의 연구 성과 발표가 끝난 뒤 관계자들이 자리를 뜨면서다.
예년 같았다면 연구 발표를 전공의들이 주도해야 했다. 전공의 발표 후에는 교수들의 평가와 조언도 이뤄지곤 했다. 그러나 이날은 “질문 하나씩만 짧게 받겠습니다”라는 형식적 절차로 마무리됐다.
전공의들의 발표가 사라지며, 대형 강당 2곳에서 반나절 이상 걸렸던 발표 시간은 1시간30분으로 줄었다. 발표된 연구도 3건에 그쳤다. 논문 접수도 작년 385개에서 올해는 6분의 1 수준인 63건으로 쪼그라들었다. 박희철 방사선종양학회장은 “올해는 어찌 학회를 열었지만 내년은 가망이 없다”며 “세계 병원 순위를 따질 때 연구 실적도 따지는데, 이제 추락할 일밖에 남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의대 정원 증원 정책에서 비롯된 의정갈등이 길어지며 의료 분야 연구도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련병원에서 진료를 보조하며 교수들의 연구에도 참여하는 전공의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다. 남아 있는 교수들마저 전공의 대신 당직 근무에 투입되며 전문 분야 연구를 대부분 중단한 상태다.
17일 국회 교육위원회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전국 의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37개 의대 중 16곳에서 연구 성과를 의미하는 Science Citation Index(SCI)급 및 SCOPUS 학술지 실적이 올해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 각 대학들의 연구 실적은 과학 기술 분야 주요 학술지를 뜻하는 SCI급 인용 횟수 및 우수학술논문 인용지수인 SCOPUS로 평가된다.
대학별로 들여다보면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경우 올해 8월까지 연구 실적이 1.1점으로, 지난해 8월까지 실적인 46.5점으로부터 97.1% 감소해 가장 타격이 컸다. 다음으로는 경북대가 308.4점에서 60.0점으로 80.5%, 경희대는 191.0점에서 47.7점으로 75.0% 줄었다.
충남대는 134.9점에서 38.6점으로 71.3%, 가톨릭대학교는 976.1점에서 340.2점으로 65.1%, 충북대학교는 74.6점에서 34.1점으로 54.2% 감소했다. 총 6개 대학의 연구 실적이 절반 이상 깎인 것이다.
전공의는 의대 임상과 연구에 필수적인 인력이다. 전공의는 의대 임상 교수들의 지시에 따라 연구 관련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통계로 만들고, 영어로 논문을 작성하는 일 등을 맡는다. 교수들이 전공의 공백으로 연구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하는 이유다.
금웅섭 연세대 의대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는 “환자 등록, 치료, 치료 결과 일체를 발표하는 임상연구는 결코 전공의 없이 할 수 없다”며 “전공의 대신 진료도 보고 있기 때문에 예전엔 연구 하느라, 지금은 진료 보느라 야근을 한다”고 털어놨다.
모든 교수가 진료에 투입된 현장에서 연구는 ‘사치’로 치부된다. 정재호 연세대 의대 외과학 교수는 “밤마다 교수들이 당직을 서는 상황에서 연구만 해왔던 교수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눈치가 보인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주말마다 논문을 읽을 정도로 연구에 몰두해왔지만, “심리적 위축이 전반적으로 심각한 상태”라고 전했다. 정 교수 뿐 아니라 의료계 전반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의료계에서는 내년에 연구 타격이 더욱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 실적에는 2~3년 전부터 시작된 연구까지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사실상 모든 대학에서 연구를 진행하지 못해, 내년 실적은 올해보다 더욱 처참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한양대의 경우 올해 8월 기준 연구 실적이 536.0점으로 전년(329.1점) 대비 62.8% 올랐지만, 내부 사정은 비슷하다. 한양대는 올해 교수들의 연구가 불가능해지면서 승진 기준에서 연구 관련 항목을 제외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70% 이상 비중을 차지하던 주요 항목이었다.
한양대병원에선 전공의 4명이 의사과학자 양성 사업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중 2명이 사직하며 중단되기도 했다. 정승준 한양대 의대 연구부문학장은 “임상 교수들은 전적으로 진료만 봐야 하는 상황”이라며 “정부로부터 받던 연구비 지원도 기간 안에 결과를 낼 수 없어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의대 연구 중단은 쉽게 말해 질병 치료 연구 중단을 의미한다. 예컨대 방사선은 암 치료에 가장 많이 쓰이는 기술이다. 미국에서는 암 환자 50%가량, 한국에선 30%가량이 방사선 치료를 받는다. 관련 연구는 수십 년간 이뤄져 왔으나 올해는 당연히 중단됐다.
금웅섭 연세대 의대 교수는 “방사선으로 암 치료를 할 때 방사선 강도를 어느 정도로 높여야 안전한지에 대한 연구를 올해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올해 포기했다”고 말했다.
한양대병원 신경과 소속인 김영서 교수는 올해 공대와 협력해 경동맥 질환의 혈류역학(혈액의 흐름을 다루는 학문)을 연구하기로 했으나 포기했다. 의학연구지원센터 차원에서 진행하던 의대 교수와 공대 교수 간 연결도 모두 끊겼다.
신경과는 주로 뇌와 관련된 질병이 이뤄지는데, 이 역시 중단 상태다. 김 교수는 “급성 환자로는 뇌졸중, 뇌전증 환자 연구가, 만성 환자로는 파킨슨, 치매, 루게릭병 환자 연구가 대부분 중단됐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의정갈등 속에 전공의들이 병원 현장을 떠나게 되면서 의대 교수와 연구진이 과제를 따놓고도 연구나 논문작성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연구 중단은 한국 의학계가 쌓아온 글로벌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므로 대한민국 의료계 미래와 국민을 위해 정부가 하루빨리 의료대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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