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정치권에선 통용되지 않는 격언[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슬픔에 빠져 있거나 시련이나 실연을 겪는 이들에게 우리는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 말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같은 격언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심적 고통이나 개인 간 갈등이나 쌓인 감정 등도 어느 정도 완화된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말이지만 최근 정치권을 보면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테마로 세 가지 이슈를 다뤄봤다.
● 의료개혁, 성공한 개혁으로 평가받을까
최근 대통령실에선 의료개혁과 관련해 “시간이 지나면 국민들에게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개혁엔 저항이 있게 마련인 만큼 뚝심있게 추진하면 시간이 지나 필수·지방의료 살리기와 의사 부족 문제 해결 등 의료개혁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할 때 국민들이 재평가할 것이라는 의미다.
정부는 단기적으로는 생활고 등을 못 견딘 의대생과 전공의가 결국 의료 현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고 2025학년도 의대 정원 재조정 문제도 올해 대입이 끝나면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이야기인 만큼 일단 시간을 끌자는 식이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8월 29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6개월만 버티면 이긴다”고 했던 발언도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속내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의정 갈등을 몇달째 지켜보는 국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의료계의 반발은 예상보다 컸고 의대생과 전공의는 학교와 병원을 이탈했다. 의료 공백도 장기화되고 있다. 물론 경증·비응급환자의 상급종합병원행이 줄어들고 비상진료대책을 통해 추석 연휴 ‘응급실 대란’은 막았지만 “아프지 말자”는 말이 덕담으로 회자될 정도였다.
개혁엔 저항이 뒤따른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책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조정하고 설득해 타협을 이끌어는 게 바로 정치의 영역이다. 2025학년도 의대 정원을 1508명 증원하고 이후 매년 2000명씩 늘리겠다는 방침을 금과옥조처럼 고수하니 과격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의료계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에 추산한 증원 규모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탓할 게 아니라 속도를 늦추는 식으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당초 의료개혁은 윤석열 정부 국정 지지율에 긍정 평가 요인이었지만 이제 부정 평가 요인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만약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이 팬데믹 수준으로 재유행하면서 의료수요가 급증한다면 어떻게 될지, 정부가 대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늘어난 학생들이 충분히 교육받을 환경이 마련돼 있는지 등 의문점이 드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국민들이 의료개혁의 성과를 체감하기까지 시간은 멀고 변수는 수만 가지일 텐데 과연 시간이 윤석열 정부의 편이 될 것인가.
● ‘골든 타임’ 놓친 김건희 여사 사과 문제
이른바 ‘영부인 리스크’도 여권이 미적거리는 사안 중 하나이다. 최근 친한(친한동훈)계를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는 김건희 여사 사과 문제 등에 대해서도 용산은 정면 대응하기보다는 회피하면서 일단 지켜보자는 분위기다. 디올백 수수 및 공천 개입 의혹 등 김 여사 사과 이후에도 국정감사에서 또 다른 이슈들이 제기될 수 있고 사과 한 번으로 여론을 돌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 반영됐을 것이다. 용산 참모들이 윤 대통령에게 이 문제에 대해 직언하기 어렵다보니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가 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올해 초 불거진 디올백 수수 논란과 관련해 김 여사의 사과 등으로 선제적 대응을 했다면 총선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윤 대통령은 논란이 불거진 뒤 2월 “시계에다가 이런 몰카(몰래카메라)까지 들고 와서 (촬영을) 했기 때문에 공작이죠”라며 사과 대신 유감 표명을 했고 총선이 끝난 뒤 5월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들께 걱정 끼쳐드린 부분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고 있다”고 밝혔다.
김 여사는 올해 초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에게 보낸 문자에서 “제가 사과를 해서 해결이 된다면 천번 만번 사과를 하고 싶다. 단 그 뒤를 이어 진정성 논란에 책임론까지 불붙듯 이슈가 커질 가능성 때문에 쉽게 결정을 못 하는 것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대통령실은 이 문제와 관련해 “여러 이야기를 듣고 있다”며 가능성을 일부 열어두는 모양새다.
시간이 지나면 뜨거웠던 이슈도 냄비처럼 식을 것이라는 기대는 문제 해결의 ‘골든 타임’을 놓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아야 되는 일이 생긴다. 영부인 리스크는 정부 출범 이전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정부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만큼 적당한 시점에 의혹에 대한 직접 해명과 진솔한 사과 등을 통해 리스크를 희석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법원의 시간’… 기우제 지내는 듯한 야당
야권도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이후 본격화된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끌어안은 채 이 대표의 ‘1인 체제’를 공고히 해왔다. 민주당 구성원들은 검찰의 편파·짜깁기 수사와 억지 기소로 이 대표가 고난을 겪고 있지만 법원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기우제 지내듯 2년 넘게 ‘희망회로’를 돌린 것인지도 모른다.
기다림 끝에 거대 야당의 운명은 이제 법원이 쥐고 있는 형국이다. 다음달 15일과 25일 각각 열리는 이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재판과 위증교사 혐의 재판의 1심 결과가 1차 관문이 될 것이다. 이 대표가 선거법 재판에서 벌금 100만 원 이상 벌금형을, 위증교사 재판에서 금고 이상 형을 확정받게 되면 이 대표는 의원직이 상실되고 피선거권이 박탈된다. 1심에서 의원직 상실형이 나오면 이 대표 체제는 물론 차기 대선 구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특히 이 대표가 선거법 재판에서 100만 원 이상 벌금형을 받으면 민주당은 지난 대선에서 보전받은 선거자금 434억여 원을 반환해야 된다. 민주당이 사실상 파산 위기에 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민주당 인사들은 아무런 대비 없이 “법원이 정치적 후폭풍과 비판 여론을 감당하기 어려워서라도 100만 원 미만 벌금형을 선고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 대표는 두 사건 외에도 대장동·백현동·위례·성남FC 의혹 및 쌍방울그룹 대북송금 의혹 재판도 받고 있어 ‘11월 운명의 시간’을 넘기더라도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건의 등장인물이 많지 않고 비교적 덜 복잡한 선거법 사건과 위증교사 사건이 기소 이후 1심 선고까지 각각 2년 2개월과 1년 1개월 걸린 점을 감안하면 나머지 사건들은 2027년 대선 전에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필자는 2년 전 칼럼에서 선거법 재판 관련해 “법원은 이미 1라운드에서 대장동 핵심 관계자인 김만배 씨와 친분이 있는 권순일 전 대법관이 무죄 결론을 유도했다는 ‘재판 거래’ 의혹으로 상처를 입었다. 그런 만큼 법원은 이번 사건을 명예회복의 계기로 삼아 엄정하게 증거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재명 재판 2라운드로 다시 시험대 오른 법원[광화문에서/황형준]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922/115590611/1
바야흐로 ‘법원의 시간’이다. 법원이 결자해지해야 한다. 이 대표와 민주당도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법원 판단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최근 이 같은 모습을 보면서 우리 정치권에 앞을 내다보는 전략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격언처럼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갖고 ‘플랜 B’ 없이 기우제식으로 원하는 결과만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지나친 낙관과 방치는 자칫 상처만 곪게 만들어 환부를 키우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의정 갈등이 몇 달째 이어지는 가운데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9월 30일 전공의를 향해 “매우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라고 처음 사과했습니다. 사과가 능사는 아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하는데 일부 기여하기를 희망해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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