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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사표 후 안해 본 게 없었다, 비로소 찾은 행복은"

조회수 2022. 9. 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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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빚는 성악가가 된 중년의 인생 2막 이야기
저 직업은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저 일을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궁금한 일이 있으셨나요. 직업별 궁금증을 해소하는 '그 일이 알고 싶다' 시리즈. 이번 편에선 경력이 단절될 뻔하다가 인생 2막을 맞이하는 데 성공한 중년의 반전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떡 빚는 성악가 신동주 씨.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에서 떡집을 운영하면서 아마추어 성악가로 활동한다. /더비비드

술떡 혹은 증편으로 널리 알려진 잔기지떡은 만들기가 까다롭다. 찌기 전에 발효를 세 번이나 해야 하고, 절묘한 타이밍에 시루에 넣어야 모양을 완벽하게 낼 수 있다. 넣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축 처지고, 이르면 보기 싫게 갈라진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신동주(58)씨의 삶도 완벽한 잔기지떡을 빚는 과정과 비슷했다. 대기업 간판을 일찌감치 내려놓은 후 짧지 않은 시간 엄혹한 현실 속을 배회했다. 한국이 미워 떠난 필리핀에서 행복했는데, 쉰 살이 넘어 귀국하자 고국은 그를 ‘오래 찐 떡’ 취급했다. 하지만 역경과 좌절을 반복하며 연마한 회복탄력성 덕분에 지금은 매일매일 완벽한 모양의 떡을 빚고 있다. ‘떡 빚는 성악가’ 신 씨가 인생 2막을 맞이하기까지의 여정에 관해 들었다.

◇아나운서 꿈꿨던 소년, 삼성 퇴사한 이유

2001년 한 가요제에 참가한 신 씨의 모습. /신동주 씨 제공

충남 서산에서 나고 자랐다. 중학교 2학년 때 대전으로 ‘유학’을 갔다. “시골에서 도시로 가는 걸 ‘유학’이라고 불렀던 시절인데요. 보다 좋은 기회를 위해 작은 누나와 함께 대전으로 갔어요. 가족 품을 떠나니 외로웠죠. 쓸쓸함을 달래 준 친구는 노래였어요. 친척 집에서 우연히 듣게 된 엄정행 선생님의 ‘목련화’라는 곡에 반했거든요. 레코드 가게에서 테이프를 사서 다 늘어지도록 재생하고 또 재생하며 곡을 따라 불렀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땐 수험 공부에 지쳐 잠든 친구들을 깨우기 위해 교실 한가운데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인생 첫 공연이었어요.”

삼성그룹 신라호텔 근무 당시 모습. /신동주 씨 제공

1982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낭랑한 목소리로 캠퍼스에서 이름을 날렸다. “신입생 환영회 때 동기와 선배들 앞에서 노래 솜씨를 뽐냈어요. ‘목련화’라는 별명도 얻었죠. 좋은 목소리를 살리고 싶어 아나운서를 지망했어요. 그런데 실기 전형의 문턱을 넘지 못했어요. 사투리 때문이었죠. 결국 1988년 삼성그룹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어요. 1지망이었던 신라호텔로 배정돼 8년 동안 신라호텔의 홍보실에서 근무했습니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누군가에겐 꿈인 것들을 척척 이뤄냈지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근처에 앉은 상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10년, 20년 뒤 제 모습일 테니까요. 존경심보다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앞섰어요. 저보다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거든요. 숨이 턱 막혔어요. 이게 삶인가 싶어서 1996년 퇴사했습니다.”

◇'7년의 대환란’ 후 필리핀으로 이주

전국노래자랑에 참가했던 신 씨. /신동주 씨 제공

진짜 삶을 찾아 떠난 여정은 험난했다. 회사 밖에서 본 미래는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다.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네트워크 마케팅을 잠깐 하다가 경력을 살려 호텔 운영 용역업체에서 3년 근무했어요. 그러다 외환위기가 들이닥쳐 회사를 관두게 됐죠. 이후 외식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중식 프랜차이즈, 양식 레스토랑 등을 운영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죠. 이 시기를 ‘7년의 대환란’이라고 부르는데요.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땐 정말 속상했어요.”

한국에서는 직장 생활도, 사회생활도 잘 안 풀리는 것 같았다. 2006년 새출발을 위해 필리핀 바기오로 떠났다. “하루에 천 번은 고민을 하다 떠났어요. 어학연수 온 한국 학생들 대상으로 홈스테이 사업을 했어요. 학생들에게 바비큐, 탕수육 같은 요리를 해주며 현지 부모님 노릇을 했죠. 그곳에서 노후까지 보내고 싶었어요. 아내의 생각은 달랐어요. ‘한번 이방인은 영원한 이방인’이라며 너무 외롭다고 토로하더군요.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오랜 필리핀 생활을 접기로 했어요.”

◇선택지가 줄자, 되레 선명하게 보인 것

10년 만에 귀국한 신 씨는 원치 않게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더비비드

2016년 9월, 10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지하철을 어떻게 타는지도 모르겠고, 버스정류장이 도로 가운데 있어서 의아했어요. 좀 쉬다가 영어 강사로 학원 몇 군데를 지원했는데 회신이 전혀 없더군요. 의아해서 학원에 전화를 걸어봤더니 ‘50대 남성이라 받아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어요. 자기들은 20대, 30대 젊은 선생님을 찾는다고요. 비로소 현실이 눈에 보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경력단절이 이런 거구나 싶었죠.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중장년 취업박람회를 통해 교보생명 보험설계사로 취업했습니다.”

이제 진짜 인생 2막이 펼쳐졌다고 믿었는데, 커다란 복병이 등장했다. 코로나19였다. “대면 영업을 기반으로 하는 일이다 보니 더 지속할 수가 없었어요. 2020년 10월, 일을 관두고 다시 진로 고민에 빠졌어요. 앞서 한 건 인생 2막 연습이다,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2막을 펼쳐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랬더니 용기가 샘솟더라고요. 이번엔 좋아하는 걸 하기로 했어요. 여태까지 한 일 중 제가 좋아서 한 일은 없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일은 딱 두 가지였어요. 노래하는 것과 요리하는 것.”

지금 와서 가수 준비를 하는 건 무모했다. 요리로 눈을 돌렸다. “나름 떡방앗간집 아들 출신입니다. 부모님이 20년간 방앗간을 운영하셨어요. 그 영향인지 어릴 적 운동장에서 공차는 것 보다 부엌에서 고구마를 찌고 밀가루를 반죽해서 도넛 튀기는 걸 더 좋아하는 아이였죠. 군대에서 취사병이 능수능란하게 칼질하는 모습에 반해 밤새 연습할 정도로 열정이 있었어요. 외식사업을 할 때도 직접 조리를 했고요. 그동안은 어깨너머 배운 지식으로 요리를 했으니 이제는 제대로 배워보기로 마음먹었어요.”

◇폴리텍대 입학 후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 취득

지역 주민들에게 떡 만들기 강습 중인 신 씨. /신동주 씨 제공

매제의 권유로 지난해 신중년특화과정으로 한국폴리텍대학 서울강서캠퍼스 외식조리과에 입학했다. “신중년특화과정이란 중년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4개월 동안 한식, 양식, 바리스타, 떡 제조, 제빵 5가지 분야를 배웁니다. 요리, 식재료 이론이나 칼질 등의 기본기를 다진 후 조리사 자격증 시험 과목 위주로 수학합니다. 저는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공부했어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업에 매진했다. 코로나19 때문에 학생을 두 개조로 나누어 대면/비대면으로 교차수업을 진행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에서 서울 강서구 등촌까지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가야 하니 지하철에서 화상 강의를 들은 적도 있어요. 집 부엌에서 강의를 재생해 따라서 실습 연습을 한 날도 많았죠. 방과 후에는 배운 내용을 토대로 가족들에게 반찬을 만들어 줬어요. 자격증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땐 생선구이처럼 난이도 높은 조리법을 집중 연습했죠.”

신 씨가 손주와 함께 집에서 떡을 만들고 있는 모습. /신동주 씨 제공

‘좋아하는 일’을 택한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 취득에 성공했다. 동료 수강생 27명 중에서 7명만 통과할 정도로 까다로운 시험이었다. “수료 후 수입산 양고기를 손질하는 회사에 취업했는데 1주일 만에 관뒀어요. 집에서 가까워서 입사한 건데, 비전이 없어 보였거든요. 이후 동네 샤부샤부 가게의 주방장으로 취업했는데, 글쎄 주방에 저 하나뿐인 거예요. 오전에는 6가지 채소를 채 썰고, 오후에는 고기를 손질하고 저녁에는 쌓인 설거지를 했어요. 출근 일주일 만에 3kg가 빠질 정도로 힘들었어요. 가장의 책임감과 자존심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로 진입하면서 매출이 뚝 떨어지니 사직을 권하더라고요. 솔직히 안도했어요.”

어렵사리 자격증도 땄는데,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았다. ‘나 하나 마음 붙일 곳은 있겠지’ 되뇌며 버티다, 작년 9월 한 떡 프랜차이즈와 연이 닿았다. “‘설화 잔기지떡’이라는 떡 가게에 입사했어요. 이곳에서 말 그대로 바닥부터 시작했어요. 매장 정리부터 떡을 발효하고 찌는 것까지, 모든 과정을 성심성의껏 수행했죠. 방앗간 집 아들의 숙명인 걸까요. 6개월간 한결같이 일하는 모습을 보더니, 사장님이 가게 인수를 제안하더라고요. 그렇게 올봄부터 떡집 사장이 됐습니다. 인생 참 묘하죠.”

◇'떡 빚는 성악가’로 인생 2막 맞이

신 씨는 인생 2막이 원했던 모양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더비비드

고대했던 인생 2막이 열렸음을 실감하고 있다. 환갑이 다 되어 발견한 새로운 자아가 마음에 든다. “두 곳의 합창단에서 테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식 레슨도 받고 있어요. 떡집을 운영한 후부터 노래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었어요. 발효한 증편을 찜기에 찔 때, 짬 내서 노래 연습을 한 덕인 것 같아요. 지난 5월, 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에서 공연을 했는데요. 요리사 복장을 입고 관중에게 스스로를 ‘떡 빚는 성악가’라고 소개했어요. 좋아하는 일 두 가지를 동시에 하다니, 감개무량한 순간이었죠. 2년 후에 ‘신동주 리사이틀’을 개최하는 게 목표예요.”

그래도 굳이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직은 떡이다. “저는 증편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저보다 증편을 잘 만드는 사람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 싶어요. 일각에서는 떡을 한식과 별개의 카테고리로 보지만, 저는 떡도 한식의 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한식처럼 손맛이 중요하죠. 지금은 체인점을 하고 있지만 독립 떡 브랜드를 만들 구상입니다. ‘자나 깨나 떡, 꺼진 떡 다시 보자’가 지금 제 사명입니다.”

신 씨는 기로에 선 중년들에게 일단 뭐든 할 것을 강조했다. /더비비드

자신이 겪었던 것과 유사한 고민에 빠진 중년들에게 ‘일단 뭐든 하라’고 조언했다. “떡이 예쁘게 잘 나오면 아주 기분이 좋아요. 반대로 터지고 주저 앉아 있으면 속이 타죠. 자식이 다친 모습을 본 것과 똑같은 마음이에요. 이런 감정과 애착을 매일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부디 은퇴해서 가만히 있지 마세요. 노후 자금이 충분하다면 봉사활동을 추천합니다. 활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새로운 것에 뛰어드는 게 두렵다면 아르바이트든 뭐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일단 배워본 후 판단하세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무엇보다 제발 남들 출퇴근하는 시간에 배낭에 막걸리 넣고 등산 가지 마세요. 다른 할 일 많잖아요.”

/진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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