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삐딱한 디자인의 시계와 똑바른 디자인의 시계 중 어느 시계를 좋아할까? 답이 정해진 문제다. 그런데 삐딱한 시계를 가져와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건 자동차 운전자를 위한 시계다."
손목에 매달린 크고 무겁고 아름다운 쇳덩이
손목시계가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다. 손목시계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800년대 중반이지만, '비싸고 충격에 예민한 시계를' 손목에 걸치는 것보다 품속에 넣어 휴대하는 것이 훨씬 안전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회중시계를 더 선호했다. 하지만 전투 중 시간을 확인해야 했던 장교들은 품속에서 꺼내기 번거로웠던 시계를 손목에 착용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깨닫았고, 어떤 이들은 전쟁 중 사용하던 손목시계를 이후에도 그대로 착용했다.
1910년대 자동차용 대시보드 클락
1900년대 초만 해도 시계는 제법 큼직하고 묵직한 물건이었고, 손목에 매달고 다니는 것이 마냥 편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인, 기술자, 레이서 등 시계를 품속에서 꺼내기 어려운 사람들은 손목시계의 편리함을 금방 깨닫았다. 이런 이들은 자기가 소유한 회중시계를 손목시계로 개조해서 착용하기도 했다.
회중시계를 손목에 매달려면, 즉 손목시계로 개조하려면 케이스에 고리를 부착하고 가죽 끈을 달아야 했다. 그런데 12시 방향에 가죽끈을 달려고 하니, 시간을 조정하고 메인스프링(태엽)을 감는 기구인 크라운이 그 자리에 있어 개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시계줄과 크라운이 간섭하지 않는 특수한 디자인의 시계 케이스를 사용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이런 특수한 케이스를 제작해서 시계를 개조하는 가격은 새로 사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 사용하는 일반적인 시계는 크라운이 12시에서 90도 돌아간 3시 방향에 있다. 즉 회중시계를 오른쪽으로 90도 돌린 다음 시계줄을 부착하면 불편하지 않게 착용할 수 있다. 그러나 숫자 12가 오른쪽을 향하기 때문에 다이얼의 숫자를 새로 찍어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시계를 오른쪽으로 30도~45도 회전시켜 시계줄을 부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개조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12시가 조금 삐뚜름한 것이 시계줄과 크라운이 걸려 문제가 발생하는 것보다는 낫다 생각했을 것이다. 시계 애호가들이 빈티지 회중시계를 구입해 손목시계로 개조할 때 지금도 간혹 사용하는 방법이다.
명예를 좌우하는 것은 명분이다
"자동차 운전과 시계가 삐딱한 것이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생각해보자. 당시의 자동차 대시보드에는 시계가 없었다. 운전자는 시계를 착용해야 했고, 오른손은 기어를 조작해야 하니 시계를 착용할 손은 왼손이다. 영국산 자동차라면 설명을 생략한다.
스티어링 휠을 잡을 때 양손은 팔(八)자 모양으로 벌어지는데, 오른쪽으로 슬쩍 삐딱한 시계를 운전자의 왼손에 올려보자. 숫자 12가 정확히 위를 향한다. 즉 이건 삐딱한 시계가 아니라, 자동차 운전자 전용 시계인 것이다.
1755년 설립된 스위스의 시계 제조사 바쉐론 콘스탄틴은 1921년 미국에서 '아메리칸 1921' 모델을 선보인다. 이 시계는 다이얼이 오른쪽으로 45도 기울어져 있는데, 1921년 미국의 한 보석상이 제작한 케이스에 1919년 생산된 바쉐론 콘스탄틴 회중시계를 넣어 손목시계로 판매했다. 단순한 개조 손목시계였다면 아메리칸 1921이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전자용 시계'라는 명분이 더해지며 아메리칸 1921은 바쉐론 콘스탄틴이 만든 역사적인 걸작 시계 중 하나로 이름을 남긴다.
이같은 발상의 전환으로 바쉐론 콘스탄틴은 저렴한 회중시계를 손목시계로 개조해 대량 판매에 성공하고, 미국 시장에서 신화를 써 내린... 것은 아니다. 아메리칸 1921은 럭셔리 워치로 상류층 고객에게 극소량 판매된 특별 모델이었다. 그러나 바쉐론 콘스탄틴은 2008년 히스토릭 아메리칸 1921 리이슈 컬렉션을 선보였다.
히스토릭 아메리칸 1921은 독특한 스타일로 일반적인 마니아가 선호하는 스타일의 시계가 아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을 대표하는 제품도 아닐 뿐더러 소량 판매되어 쉽게 구할 수도 없는 시계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미디어를 통해 5,000만 원짜리 시계로 등장하며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명품 시계가 되었고, 부끄러움은 시계를 소장한 이들의 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