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복·기습의 귀재 린뱌오 “전쟁해야 평화의 문 열려”

2023. 3. 1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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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7〉
이동 중인 동북자치군 치중대(輜重隊). [사진 김명호]
아직도 이런 말을 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일본 패망 후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슝스후이(熊式輝·웅식휘)와 두위밍(杜聿明·두율명)에게 동북 접수를 맡겼다. 두 사람은 동북과 아무 인연이 없었다. 장쉐량(張學良·장학량)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큰 실책이었다.”

장쉐량은 중공과 말이 통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장쉐량 얘기만 나오면 가슴을 치며 눈시울을 붉혔다. 국민당 감찰원장 위유런 (于右任·우우임)은 더했다. 장제스 만나면, 옆에 사람이 있건 말건 연금 중인 장쉐량이 살아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며 물고 늘어졌다. 국·공 회담 국민당 대표 장츠증(張治中·장치중)은 후난(湖南)성 성장 시절 연금 중인 장에게 온갖 호의를 베풀며 경의를 표했다.

일 관동군 점령 전 동북은 장쉐량 천하

전국의 대소도시에서 벌어진 내전 반대 시위. [사진 김명호]
일본 관동군이 동북을 무력으로 점령하기 전까지 동북은 장쉐량의 천하였다. 부친 장쭤린의 폭사로 20대 중반에 동북의 군·정을 장악한, 동북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장제스는 시안(西安)에서 자신을 감금하고 국·공 합작으로 일본과 전쟁을 촉구했던 장쉐량을 믿지 않았다. ‘동북을 해방시킨 소련군이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와 장쉐량을 내세워 선양(瀋陽)에 정부 수립을 기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유의 의심증이 발동했다. 소련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장징궈는 공산당 입당 경력이 있었다. 장쉐량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중공의 접근을 봉쇄하고 장징궈와의 관계를 단절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1946년 내전이 격화되자 연금장소를 대만으로 옮겨버린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만 시찰 나간 장츠중이 장쉐량의 연금지까지 찾아가 훌쩍거렸다는 보고를 받고 마시던 찻잔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워낙 의심이 많다 보니 부자(父子)간을 이간질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1949년 10월 신중국 선포 후 중공은 장쉐량을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공신(功臣)으로 추켜올렸다. 장쉐량은 중공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국·공 합작으로 항일을 주장했을 뿐, 친공분자는 아니었다. 항일전쟁 승리 후 장제스가 장쉐량을 동북에 보냈으면 중공의 적이 됐을 것이 확실하다고들 하지만 추정일 뿐이다. 장쉐량의 휘하였던 동북군은 일본 패망 후 갈팡질팡했다. 동북자치군 선택은 사령관 린뱌오(林彪·임표)의 전략 때문이었다. “우리는 새로 편성한 부대다. 기율이 엉망이고 정치공작이 뭔지도 모른다. 실탄과 의복은 물론, 신발조차 성한 것이 없다. 마적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장기전을 펴려면 토비(土匪)부터 섬멸해야 한다. 토비는 오합지졸들이다. 저들의 창고에 있는 물건을 지역민들에게 분배하고 정치교육에 매진해라. 유격대에서 정규군으로 발전할 유일한 방안이다. 두위밍이 지휘하는 적들은 미군 장비로 무장한 최정예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해야 다음이 수월하다.”

린뱌오 “두위밍, 동북 한파 못 견딜 것”

1945년 12월 20일 중국에 온 마셜은 1년간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1946년 2월 25일 국민당 대표 장츠중(오른쪽), 중공 대표 저우언라이(왼쪽)와 회동해 난감한 표정 짓는 마셜. [사진 김명호]
린뱌오는 퇴각을 계속했다. 중앙의 압력이 심하자 이유를 설명했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우리 부대는 사방팔방에서 온 병력이다. 생각이 제각각이다. 휴식과 교육이 절실하다. 아직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패잔병의 퇴각이 아니다. 적장 두위밍은 동남아 열대 지역에서 장기간 지원군을 지휘했다. 동북의 한파를 견디기 힘들다. 우리에게 기회가 올 날이 머지않았다.”

슈수이허즈(秀水河子)에서 첫 번째 전투를 준비하던 린뱌오가 경호원 두 명을 불렀다. “이 집 저 집 다니며 중학교 화학 교과서가 있으면 빌려달라고 부탁해라. 반납할 때 돌려 달라며 내 이름으로 차용증을 써줘라.” 경호원들은 20여 가구를 돈 끝에 현(縣) 중학교 2학년 학생 류수화(劉樹華·유수화)에게 화학 교과서를 빌렸다. 옆에 있던 류의 모친이 차용증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온 동네 다니며 수다를 떨었다. “살다 보니 별꼴 다 보겠다. 처음 보는 군인들이 우리 집에 와서 아들 교과서 빌려 가며 차용증까지 써주고 갔다. 그간 닭 잡아먹고 내빼는 군인만 봤지 이런 군인은 처음 본다.” 현 전역에 소문이 퍼졌다. “우리를 지켜줄 믿을 만한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왔다.”

장제스는 마셜이 요구한 헌정실시는 수용했다. 국민당 원로 우츠후이(吳稚暉)에게 헌법 전문을 전달받는 장제스. [사진 김명호]
린뱌오는 중학 시절 화학 시간을 좋아했다. 화학책을 받고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중요한 곳에 동그라미 치고 메모도 한 줄 남겼다. “모든 물건은 복합물이다. 화합물은 원래 모습과 다르다. 분해해야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1946년 2월 2일 농력(農曆) 새해 첫날, 참모들과 세찬을 들며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미국 대통령 특사 마셜이 난징(南京)과 옌안을 오가며 평화를 노래하는 중이다. 참모들은 내 앞에서 평화를 거론하지 마라. 전쟁해야 평화의 문이 열린다.” 경호원에게도 지시했다. “화학책을 두부 9모와 함께 주인에게 반납해라. 원자(原子)와 분자(分子)편만 봐서 아쉽다.”

린뱌오는 매복과 기습의 귀재였다. 3일 만에 두위밍 군을 섬멸했다. 큰 전투는 아니었지만 첫 번째 승리였다. 잡군(雜軍)이나 다름없던 동북자치군의 사기를 충천시키고도 남았다. 1968년 랴오닝(遼寧)성이 린뱌오의 동북 시절 자료와 물건을 수집했다. 류수화는 보물처럼 다루던 화학 교과서 들고 성 정부로 달려갔다. 1971년 9월 린뱌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시골 화학교사 류수화는 25년 전을 회상했다. 3일간 두부 9모 먹으며 훌쩍거렸다. 지금도 동북에 가면 이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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