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복·기습의 귀재 린뱌오 “전쟁해야 평화의 문 열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7〉
장쉐량은 중공과 말이 통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장쉐량 얘기만 나오면 가슴을 치며 눈시울을 붉혔다. 국민당 감찰원장 위유런 (于右任·우우임)은 더했다. 장제스 만나면, 옆에 사람이 있건 말건 연금 중인 장쉐량이 살아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며 물고 늘어졌다. 국·공 회담 국민당 대표 장츠증(張治中·장치중)은 후난(湖南)성 성장 시절 연금 중인 장에게 온갖 호의를 베풀며 경의를 표했다.
일 관동군 점령 전 동북은 장쉐량 천하
1949년 10월 신중국 선포 후 중공은 장쉐량을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공신(功臣)으로 추켜올렸다. 장쉐량은 중공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국·공 합작으로 항일을 주장했을 뿐, 친공분자는 아니었다. 항일전쟁 승리 후 장제스가 장쉐량을 동북에 보냈으면 중공의 적이 됐을 것이 확실하다고들 하지만 추정일 뿐이다. 장쉐량의 휘하였던 동북군은 일본 패망 후 갈팡질팡했다. 동북자치군 선택은 사령관 린뱌오(林彪·임표)의 전략 때문이었다. “우리는 새로 편성한 부대다. 기율이 엉망이고 정치공작이 뭔지도 모른다. 실탄과 의복은 물론, 신발조차 성한 것이 없다. 마적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장기전을 펴려면 토비(土匪)부터 섬멸해야 한다. 토비는 오합지졸들이다. 저들의 창고에 있는 물건을 지역민들에게 분배하고 정치교육에 매진해라. 유격대에서 정규군으로 발전할 유일한 방안이다. 두위밍이 지휘하는 적들은 미군 장비로 무장한 최정예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해야 다음이 수월하다.”
린뱌오 “두위밍, 동북 한파 못 견딜 것”
슈수이허즈(秀水河子)에서 첫 번째 전투를 준비하던 린뱌오가 경호원 두 명을 불렀다. “이 집 저 집 다니며 중학교 화학 교과서가 있으면 빌려달라고 부탁해라. 반납할 때 돌려 달라며 내 이름으로 차용증을 써줘라.” 경호원들은 20여 가구를 돈 끝에 현(縣) 중학교 2학년 학생 류수화(劉樹華·유수화)에게 화학 교과서를 빌렸다. 옆에 있던 류의 모친이 차용증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온 동네 다니며 수다를 떨었다. “살다 보니 별꼴 다 보겠다. 처음 보는 군인들이 우리 집에 와서 아들 교과서 빌려 가며 차용증까지 써주고 갔다. 그간 닭 잡아먹고 내빼는 군인만 봤지 이런 군인은 처음 본다.” 현 전역에 소문이 퍼졌다. “우리를 지켜줄 믿을 만한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왔다.”
린뱌오는 매복과 기습의 귀재였다. 3일 만에 두위밍 군을 섬멸했다. 큰 전투는 아니었지만 첫 번째 승리였다. 잡군(雜軍)이나 다름없던 동북자치군의 사기를 충천시키고도 남았다. 1968년 랴오닝(遼寧)성이 린뱌오의 동북 시절 자료와 물건을 수집했다. 류수화는 보물처럼 다루던 화학 교과서 들고 성 정부로 달려갔다. 1971년 9월 린뱌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시골 화학교사 류수화는 25년 전을 회상했다. 3일간 두부 9모 먹으며 훌쩍거렸다. 지금도 동북에 가면 이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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