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살기 성지, 치앙마이의 슬로우 라이프
A Taste of Chiang Mai
치앙마이는 ‘한 달 살기 신드롬’이 일어날 정도로 전 세계 장기 여행객에게 사랑받는 도시다. 자신의 속도와 행복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라이프스타일이 일상인 곳. 그런 삶의 여유와 함께 건강한 채식을 실천해온 이윤서, 강대웅 대표에게 치앙마이의 매력에 대해 물었다.
인왕산 입구 언저리, 부암동의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꼭대기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붉은 벽돌집이 있다. 채식 기반의 건강한 라이프를 전파하는 ‘뿌리온더플레이트’ 이윤서, 강대웅 대표의 보금자리이자 작업 공간이다.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은 자연을 품은 터에서, 환경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목재를 쓰는 등 3년간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지난해 6월 완공한 집이다.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에 꼭 맞춘 ‘건강한 집’은 예약제 티룸 및 워크숍, 팝업 공간으로 운영되는 지하 1층, 부부와 반려묘 두 마리의 생활 공간인 1층, 키친 및 쿠킹 스튜디오이자 다이닝룸으로 쓰이는 2층으로 이뤄졌다.
2층 키친에 들어서자 널찍한 통창 너머로 봄을 입은 북한산 자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목조 테이블을 중심으로 식물이 곳곳에 자리 잡은 공간은 따스한 자연광 속에서 생명력을 뽐냈다. 북한산을 그림으로 품은 집에서의 일상은 어떨까? “바쁜 일과를 마치고 이곳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며 ‘산멍’ 때리는 걸 좋아해요. 북한산이 보이는 저쪽이 북향이고, 동쪽과 서쪽에도 작은 창문을 내었는데, 남편은 동쪽 창의 햇빛을 보며 에너지를 얻어요.”(윤서)
부부는 채식으로 연을 맺었다. 아내 윤서는 어릴 때부터 앓던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남편 대웅은 명상을 통해 고교생 때부터 채식을 시작했다. 한 비건 매거진에 실린 대웅의 인터뷰를 읽고 그가 활동하던 ‘채식과 대안적인 삶을 나누는 모임’에 찾아온 윤서.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고, 윤서가 유기 농산물을 뿌리 및 껍질까지 최대한 조리해 먹는 매크로바이오틱(Macrobiotic) 리더십 과정을 미국에서 수료하고 온 이듬해인 2012년 결혼에 골인한다. 2013년, 남편은 비건 디저트를 선보이고, 아내는 매크로바이오틱 요리 수업을 하는 카페 겸 쿠킹 스튜디오 ‘뿌리온더플레이트’를 정식 오픈했다. 현재 부부는 플렉시테리언이자 건강한 음식을 요리하는 채식 연구가로서 채식 팝업, 쿠킹 클래스, 농부시장 마르쉐@ 출점 등 다양한 형태로 일을 이어오고 있다.
식물성 위주의 건강한 식사와 차를 여유롭게 즐기는 슬로 라이프는 부부에게 중요한 삶의 지향점. 태국 치앙마이는 이런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에 꼭 맞는 여행지다. 널찍한 나무 테이블 위에 이국적인 패턴의 테이블보가 고운 자태를 뽐냈다. 치앙마이에서 공수해온 자연 수공예품이라고.
“치앙마이는 방콕보다 여유롭고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매력적이에요. 예술가의 거리나 주말 마켓에서 독특한 수공예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유기농 망고 같은 다양한 열대 과일도 맛이 뛰어나고 저렴하답니다. 남편과 매일 땡모반 주스를 시원하게 마시며 거리를 산책하곤 했어요.”(윤서)
유기농 마트에서 보물 찾기
이들 부부에게 건강한 채식 먹거리를 찾는 일은 여행지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단순히 채소 요리가 아니라 유기농·친환경으로 재배한 식재료를 활용하고 MSG도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향신료와 조미료를 강하게 쓰는 태국에서 부부의 기준에 맞는 먹거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남편 대웅이 방문 전 꼼꼼하게 사전조사를 한 자료를 바탕으로 현지의 유기농 마트를 돌아다니며 직접 경험해보는 식으로 그간 보물 같은 먹거리를 찾아왔다.
“주말에 열리는 징짜이 마켓은 우리나라의 농부시장 마르쉐@와 같은 분위기예요. 각종 농산물이 다양한 가운데 채식 요리를 파는 가판들도 있어서 식사도 해결하며 기분 좋게 쇼핑할 수 있어요. 치앙마이 대학 후문에 위치한 로열 프로젝트 매장도 추천드려요. 품질 좋은 유기농 채소와 과일이 가득하고 한쪽에는 신선한 과일 주스를 파는 카페도 있어요.”(윤서)
로열 프로젝트는 양귀비 재배로 생계를 유지하던 마을이 과일 재배 등의 대안 농업을 통해 아편 생산, 빈곤, 삼림 벌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1969년 당시 태국 국왕이 개인 자금으로 설립한 재단이다. 국가는 마약 문제를 해결하고 농민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작물 재배를 통해 수익을 올린 성공적인 사업으로 꼽힌다. 재단은 현재 치앙마이를 포함한 태국 5개 지역에 개발센터를 두고 태국 농민들의 유기농업을 지원하고 있다.
이런 마트들에서 퀄리티가 뛰어난 양념류를 다수 발견한 부부는 이 보물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어 직접 수입하기에 이르렀고, 최근 내추럴 그로서리 스토어를 온라인에 오픈했다. 이름하여 대웅의 영어 이름을 딴 ‘데이빗스픽(@davids_pick)’. 이곳에서 판매하는 유기농 스리라차 소스와 레드 커리 페이스트는 부부의 까다로운 입맛을 충족시켰고, 재작년에 치앙마이의 현지 농장과 공장을 방문해 생산 라인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거래를 결정하게 됐다.
“가급적 가까운 곳에서 재배한 식품을 이용하자는 로컬리즘이 화두지만, 어쩔 수 없이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식재료가 있죠. 그중 맛과 성분이 뛰어나 믿을 만한 식품들만 선별했어요. 특히 레드 커리 페이스트와 스리라차 소스를 만드는 업체는 유기농 팜 슈거를 제외하고 모든 원료를 치앙마이 근교 농장에서 직접 재배해 제조하는 곳이에요. 땅에서 자라는 유기농 파인애플 등 다양한 농산물을 키우는 모습을 직접 보고 수입을 결심했어요.”(대웅)
윤서는 이런 유기농 식재료를 활용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비건 레시피를 개발했다. 팟타이에 흔히 들어가는 굴소스 대신 간장 누룩을 써서 감칠맛을 높이고, 레드 커리에는 유기농 커리 페이스트와 함께 코코넛 밀크를 풍부하게 넣어 동물성 재료 없이도 깊은 맛을 냈다. 최근엔 마르쉐@에 요리팀으로 출점해 이 요리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느림의 미학과 식물이 주는 기쁨
부부가 치앙마이 여행에서 누린 가치는 느림의 미학이다. 아침으로 마트에서 산 유기농 채소와 과일을 먹은 뒤 치앙마이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올드시티 지역을 유유자적하며 거니는 것을 좋아한다. 이 지역은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이나 일본 교토 기온 거리처럼 옛 정취가 가득해서 걷다가 지치면 근처 아무 사원에나 들어가 앉아 땀을 식히며 ‘멍 때리기’ 좋다고. 저녁 무렵엔 타이 마사지를 받으며 피곤을 풀고, 한국에서 꾸려온 다구들로 숙소에서 티타임을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남편 대웅에겐 여행 중 반려식물을 입양하는 독특한 취미가 있다. 뿌리까지 온전하게 살아 있는 식물을 화분째 구입해 이름까지 붙여준다. “제가 머무는 공간에 살아 있는 식물이 꼭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관리가 어렵다 보니 호텔 객실에 살아 있는 식물이 없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현지 식물원이나 꽃집에서 식물을 사는 것이 고정 코스가 됐어요. 재작년 치앙마이 여행에선 아이비를 구입해 ‘케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지요. 귀국할 때가 되면 여행 중 만났던 이에게 반려식물을 선물합니다. 케이는 친절했던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주었지요.”(대웅)
부부는 채식 위주의 건강한 여행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비건 호텔’도 추천했다. 비건 호텔은 호텔 내 요리가 식물성 기반으로 제공돼 채식 지향 라이프스타일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여러모로 적합한 숙소다. 치앙마이에도 몇 곳의 비건 호텔이 있는데 부부가 경험했던 곳은 ‘그린타이거 하우스’. 치앙마이 최초의 채식 기반 호텔로, 태양 에너지로 공급되는 온수 샤워 시설을 갖추고, 일회용 어메니티를 쓰지 않는 등 친환경 정책을 실천한다. 이곳의 백미는 채식 기반의 조식. 타이 전통 커리부터 서양식 캐슈너트 크림 파스타까지 다양한 채식 메뉴는 현지에서 조달된 유기농 또는 무농약 식재료로 조리한다.
건강한 채식, 티와 함께하는 여행의 기쁨을 좀 더 많은 이와 나누기 위해 윤서는 올 초에 ‘베지티트립(@veg.tea.trip)’이라는 여행사 겸 출판사를 차렸다. 치앙마이, 우붓, 타이베이, 교토 등 그간 직접 발굴해온 비건 여행 코스를 참가자들과 함께한다. 5~6명이 떠나는 소규모 여행이다 보니 참가자의 여행 목적이나 추구하는 스타일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운영하고 있다. 4월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8월엔 발리 우붓으로 떠날 계획. 이와 함께 자신의 파리 한 달 살기를 에세이로 쓴 <채식견문록>도 직접 펴내 판매 중이다.
“저에게 여행은 삶을 지속하기 위한 원동력이에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지쳐버리는 순간이 다가오거든요. 그때 여행을 떠나면 낯선 환경 속에서 내가 있던 곳의 소중함을 느끼고 새로운 에너지도 얻고 가는 것 같아요. 그 기운을 이어 지금의 부암동 집에서도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에 대한 영감을 주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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