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나 출근 어떡해?" 전쟁터같은 공항 달렸다…수습기자의 제주 탈출기

"24일 출발 예정이던 제주 ->서울(김포) 항공편은 제주공항 악기상(강풍/강설)으로 인해 결항했습니다."
이런 휴대전화 문자를 받은 건 23일 오후 5시30분 숙소에서였다. 잠시 몸을 씻고 아버지와 함께 밖으로 나가 고등어회와 딱새우를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자를 받자 마자 머리가 하얘졌다. 잠시 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회사에 뭐라고 말하지'였다.
설 연휴 한달 전에 계획한 여행이었다. 올해 59세 아버지는 등산 마니아지만 한라산만큼은 오른 적이 없었다. 항상 궂은 날씨가 문제였다. 기자로 언론사에 입사한 지 4개월. 새해를 맞아 아버지와 백록담에 오르기로 했다. 설 당일인 22일 오후 4시쯤 제주도에 도착해 이튿날 등산한 뒤 24일 오전 비행기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여행을 일주일 앞둔 지난 16일. 서울로 돌아오는 24일 제주도에 강풍과 폭설이 예상된다는 예보가 나왔다. 살짝 불안했지만 이제 와 여행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악천후에 제주도까지 가서 한라산 등산을 포기한 횟수만 세번이었다.

캐리어에 짐을 때려 넣었다. 문자를 받고 30여분이 흐른 오후 6시쯤 공항으로 출발했다. '지금 공항에 도착하면 비행기를 탈 수 있지 않겠나'는 생각했다.
한번도 본 적 없지만 '전쟁이 나면 이런 풍경이겠구나' 싶었다. 오후 6시30분쯤 제주공항 300m 부근에는 차들이 3~4열로 길게 줄지어 있었다. 운전자를 차에 두고 사람들이 조수석과 뒷자리에서 내려 공항으로 달렸다.

공항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각 항공사 카운터로 사람들이 몰려서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항공사 직원들은 "지금 표를 끊어주고 싶어도 대체편이 마련되지 않았다" "우선 숙소로 돌아간 뒤 내일 아침 7시에 다시 찾아와 달라"고 했다.
항공사 애플리케이션(앱) 7개를 깔고 하나씩 들어가 예약을 시도했지만 목요일인 26일까지 모든 항공편이 매진됐다. 가장 빠른 게 27일 오전 11시40분 아시아나 항공 비행기였다. 비즈니스 좌석이었다. 1인당 18만원 짜리 좌석 두개를 결제했다. '이거라도 타자'는 생각이었다.
오후 7시30분 선배 기자에게 '제주도에 고립됐다'고 문자를 보냈다. 불호령이 떨어질까 걱정됐다. 그러나 선배는 혼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선배는 "24일 하루 제주도의 현 상황을 기사로 쓰고, 25일 하루 휴가를 줄 테니 그날 올라오라"고 했다.

공항 안에 사람들이 빼곡했다. 이들은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약한 항공사 카운터 앞에 미리 줄을 섰다. 오전 6시 기준 B모 항공사 카운터 앞에 사람 10여명이 줄 서 있었다.
가족들은 짐을 내려놓고 공항 이곳저곳에 앉아 있었다. 기둥 뒤에 돗자리, 이불을 깔고 앉은 가족도 있었다. 한 가족은 "새벽 4시부터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오전 7시가 되니 에어부산 항공사 카운터로 직원들이 출근했다. 이들은 김포공항으로 1편, 김해공항으로 1편씩 대체 항공편이 마련됐다고 알렸다. 김포공항행 항공편 좌석은 180석이다. 같은 시간 카운터 앞에 줄 선 승객은 300명을 족히 넘어보였다.
잔여 좌석이 10석쯤 됐을 때 두 좌석을 예약했다. 1~2시간 기다린 성과였다. 등뒤에 아직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했다. 당시 항공사들이 대체 항공편을 마련했지만 고립된 승객 4만3000명을 다 태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람들도 몸을 숙인 채 휘청이며 걸었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파도가 해안 벽을 넘어서 지나가는 차들을 때릴 정도였다. 운전하던 아버지는 "60여년 살며 TV로만 보던 걸 이렇게 직접 경험한 건 처음"이라고 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제주공항 주변엔 순간 최대풍속이 초속 40~60m 내외였다. 바람과 눈은 갈수록 세졌다. 오후 2시쯤에는 차 문이 바람에 스스로 닫힐 정도였다. 몸을 숙이고 바람에 저항하며 걷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오른쪽 골반에 멍이 들었다.
도로에도 눈이 쌓였다. 차들은 비상등을 켜고 시속 10~20km쯤으로 움직였다. 시내를 오가는 버스는 바퀴에 스노체인을 끼웠다.

공항 분위기가 전날보다 살벌했다. 전날(24일) 대체 항공편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공항에서 밤을 새웠거나 새벽 3시쯤 공항에 왔다고 한다. 공항 이곳저곳에서 고성이 들렸다. 한 승객은 "새치기 한 사람 나가요. 나가라고. 아까 저기서 들어온 사람 끄집어내"라고 외쳤다.
항공사의 서비스에 불만을 터뜨린 사람도 있었다. 한 고령 남성은 "사장이 나와서 사과하라"며 "앞으로 이런 항공사는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소리쳤다.

오전 7시쯤 수하물을 부치고 탑승장에 들어갔다. 그래도 불안했다. 전광판 속 일부 항공사의 비행기들이 모두 지연됐다는 알림이 나왔다. 탑승장 게이트 곳곳에서 "연결편이 지연돼 출발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게이트 앞에 줄을 서고 창밖을 봤다. 활주로 양옆으로 흰 눈이 쌓여 있었다. 이·착륙하는 비행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돌아갈 수 있을까.'
15분 뒤 비행기는 이륙했다. 창밖을 보니 강풍과 폭설이 몰아쳤냐는 듯 제주도 상공에 구름 한점 없었다. 오전 10시30분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승객들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서 "이제 살았다", "하루밖에 연차를 안내서 다행이다"는 얘기가 들렸다. 몇몇 승객은 박수를 쳤다.
오전 10시 50분 김포공항을 나왔다. 당초 48시간만 보내려던 제주에서 3박 4일을 머물렀다. 공항에 주차했던 차에 타면서 전날 예매했던 27일 항공편 예약을 취소했다.

박상곤 기자 gonee@mt.co.kr, 김성진 기자 zk00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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