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왜 햄릿인가...우문에 조승우가 현답
유주현 2024. 10. 30. 11:16
올해 한국 연극계는 ‘햄릿 천하’다. 지난 6월부터 연극 명가 신시컴퍼니가 무려 3개월간 장기 공연을 펼쳤고, 7월 국립극단도 햄릿 공주를 내세운 이색적인 ‘햄릿’으로 화제몰이를 했다. 최근 개막한 예술의전당 버전은 조승우라는 최고의 스타캐스팅으로 티켓 오픈 즉시 전회차 전석매진 기록을 세웠고, 결과물인 무대도 기대 이상으로 예술성과 대중성 모두 정점을 찍었다.
1601년 영국 런던 글로브극장에서 초연된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매일 세계 어딘가에서는 공연된다고 할 만큼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연극의 대명사’다. 국내에서도 연극사의 큰 별 이해랑 선생이 1951년 전쟁통에 첫 전막 공연을 올린 이래 다양한 재해석 버전이 꾸준히 나왔지만, 최근 들어 대작 공연은 드물었다. 2016년 이해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신시컴퍼니와 국립극장이 손진책 연출과 유인촌·정동환·전무송·박정자·손숙·김성녀·윤석화 등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들만 초빙해 만든 원로 버전이 화제를 부른 이후 한동안 잠잠했다.
6년만인 2022년 신시컴퍼니가 주역들을 젊은 배우들로 교체해 리바이벌했고, 올해 그 버전이 순수연극으로선 몹시 이례적인 장기공연에 돌입했다. 거기에 대표적인 공공 예술기관인 국립극단과 예술의전당 버전까지 가세했으니, ‘지금 왜 햄릿인가’를 따져볼 만 하다. 시대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연극이 지금 이토록 햄릿을 찾는 이유가 뭘까.
일단 3편의 ‘햄릿’은 접근법이 제각각이다. 총 4024행으로 셰익스피어 중에서도 가장 긴 희곡을 그대로 무대화한다면 6시간이 넘어갈 정도로 방대한 분량인 만큼, 연출가의 방향성에 따라 방점이 다르게 찍힐 수밖에 없다.
신시컴퍼니 버전은 2016년부터 거장 손진책 연출이 굳건하게 중심을 잡고 있으니 ‘우리 시대의 클래식’이라 하겠다. 손 연출이 “죽은 자들의 시선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법'을 고민하는 작품으로 구성했다”고 말했지만, 이 버전은 내용보다 형식에 주목하게 된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배우들이 조연과 단역으로 무대를 지키고 선 가운데 소수의 주연급들만 젊은 세대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올 시즌도 연기 잘하는 배우 강필석·이승주가 더블캐스팅되어 ‘사느냐 죽느냐’를 외쳤지만 대배우들 사이에서 원톱 주인공의 존재감이 빛날 순 없었다. 하지만 명배우들의 연기 열전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욕망의 화신 클로디어스,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거트루드, 처세의 달인 폴로니우스, 가치관 사이에서 갈등하는 햄릿…. 이들이 각자 보여주는 인간군상이 삶과 죽음에 관한 대하드라마를 그리고 있었다.
국립극단 버전은 꽤 정치적 해석을 했다. 햄릿을 왕자가 아닌 공주로, 오필리어를 여자가 아닌 남자로 변환한 ‘젠더 벤딩’(gender-bending) 캐스팅으로써다. 진보적 성향의 정진새 작가와 부새롬 연출은 ‘지금 시대에 맞는 햄릿’을 고민했고,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 대표되는 원작의 근원적인 여성 혐오를 전복시켜 버렸다. 해당 대사를 “약한 자의 자리는 항상 악한 자한테 빼앗기지 (…) 악한 자여,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로 바꿨다. “햄릿은 어때야 한다는 편견 속에서 깨나가는 작업”이었다고 한 ‘햄릿 공주’ 이봉련 배우의 말처럼, 창작진은 고전의 프레임을 깨트리는 쾌감을 얻기 위해 셰익스피어를 택한 듯하다. 툭하면 진실규명을 한다며 진상조사위원회가 열리지만 아무 소득이 없는 등,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도 생생히 담았다.
엔딩에 덴마크 왕가의 자멸 후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는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에게도 “원작에는 햄릿이 어떤 왕이 되고 싶은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누락돼 있다”는 정진새 작가의 문제의식이 반영됐다. 그런데 포틴브라스의 버전별 해석이 몹시 흥미로운 지점이다. 신시컴퍼니 버전에선 아예 등장하지 않고, 예술의전당 버전에선 거의 백마 타고 온 초인처럼 등장하기 때문이다.
메타적으로는 연극이 배우의 예술임을 웅변하는 무대였다. 극중극의 비중을 키워 새삼 연극의 존재이유를 강조하기도 하는데, ‘연극이야말로 왕의 양심을 낚아챌 유일한 방법이다’‘배우란 각 시대를 보여주는 연대기와 같다’는 햄릿의 대사가 유독 와닿는 건 연기장인 조승우의 입을 통해서라서다.
그 모든 얼굴을 연기한 후의 커튼콜. 천천히 계단을 오르며 멀어지는 조승우가 거인처럼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AI와 대화해야 하는, 인간의 체온을 잃어가는 시대. 조승우의 햄릿을 통해 인간을 본다. ‘왜 햄릿인가’라는 우문에 조승우는 현답이 됐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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