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날, 한양도성 순성길 남산 트레킹
서울의 한가운데서 역사와 자연을 돌아보는 길. 한양도성 순성길의 남산 구간을 걸으며 어느새 성큼 다가온 가을을 맞이했다.
거리 4.2km
소요시간 약 3시간(도보)
코스 장충체육관-우수조망명소-국립극장-나무 계단길-N서울타워-남산 팔각정(봉수대 터)-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잠두봉 포토아일랜드-한양도성 유적전시관-안중근 의사 기념관-백범광장
추억으로 쌓인 산
용산 토박이인 에디터에게 남산은 형제 같은 존재였다. 거실 베란다에서 남산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이 살았던 터라 막 걸음을 시작한 때부터 벚꽃, 단풍, 설산을 보기 위해 철마다 가족들과 남산에 올랐다. 주말은 말할 것도 없이 온 가족이 쉬는 날이면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싸 들고 남산에 올라 새 계절을 맞이했으며, 심지어 학창 시절에는 소풍으로도 종종 찾았다. 남산타워가 N타워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즐길 거리를 품기 시작한 때도, 거칠었던 산길에 나무 데크가 깔리기 시작한 때도 이 모든 순간을 지켜봤다. 기억이 닿는 나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서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봤으니, 같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눈을 감고도 남산 곳곳을 누빌 정도로 훤했던 지라, 오히려 생활 반경이 넓어지면서부터는 새로운 산길을 오르기 바빴다. 성인이 된 형제 사이가 으레 그렇듯, 다른 동네로 거처를 옮긴 후에는 강 건너 아득한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가 됐다.
매달 트레킹에 나서니 월초에 할 일 중 하나는 ‘이번 달 트레킹 장소 선정’. 청계산, 인왕산, 선자령 등등 국내 유명 트레킹 코스를 섭렵할수록 좁아지는 선택지에 고민은 깊어졌다. 출근길에서조차 어디로 트레킹을 가야 하나 생각하던 중, 아침햇살에 윤슬을 빛내는 한강 너머로 펼쳐진 남산이 눈에 띄었다. 고민은 곧장 남산의 품 안에서 보내던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이번 트레킹 코스가 결정됐다.
서울의 보물, 한양도성 순성길
1396년인 태조 5년,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건축됐다. 서울을 둘러싼 북악산과 낙산, 남산,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됐으며 그 길이는 18.6km에 달한다. 1396년부터 1910년까지,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 도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해 의미가 깊다. 한양도성에는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북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숭례문(남대문), 돈의문(서대문) 등 4개의 문이 차례로 자리하며 그중 돈의문은 터만 남아 있다. 여전히 예스러운 풍경과 유적지가 잘 보존돼 있어 선선한 날씨와 고즈넉한 풍경을 만끽하며 걷기 좋은 가을 트레킹 코스로 사랑받고 있는 한양도성 순성길은 백악구간과 낙산구간, 남산구간, 인왕구간 등 총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백악구간은 창의문에서 백악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으로 한양도성 축조 당시 기점이기도 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개방된 구간이다. 낙산구간은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길로 경사가 완만해 산책하듯 걷기 좋다. 남산구간은 장충체육관에서 남산공원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며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며 주변 성벽을 대부분 파괴한 것. 현재 성벽의 모습은 1970년대 이후 보존·정비 사업과 1990년대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을 통해 회복한 것이다. 마지막 인왕구간은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인왕산에 바위 구간이 많아 주의해야 한다.
익숙하고도 낯선, 남산
한양도성 순성길 남산구간은 장충체육관에서 시작된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장충체육관을 지나 장충동과 신당동 경계에 있는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걷는 것, 다른 하나는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시작해 장충단 길을 따라 남산 제이 그랜드하우스를 지나 국립극장으로 진입하는 방법이다. 한양도성을 따라 장충체육관 뒷길로 오르기로 결정. 잘 가꿔진 신라호텔의 정원과 정갈하게 늘어진 한양도성 사이, 아늑한 오솔길을 걸으며 트레킹을 시작했다. 도성 너머로는 한적한 장충동 마을이 청량한 가을 하늘과 어우러져 기분 좋은 풍경을 펼쳐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평탄한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갑작스레 시야가 뻥 뚫린 전망대가 나왔다. 사방은 초록빛 나무가 우거져 있고 저 멀리 도심의 풍경이 아득하다. 도심 한복판에서, 그것도 서울의 중심에서 이런 경치를 볼 수 있다니 한양도성을 쌓은 선조들에게 감사함마저 느껴진다.
조금 더 걸으니 큰 사거리가 등장하고 건너편으로 국립극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공식 명칭은 국립중앙극장. 1950년에 세워졌으며 아시아 최초의 국립 극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국립극장에는 해오름극장과 달오름극장, 별오름극장, 하늘극장 등 4개의 극장이 있으며 우리의 전통을 바탕으로 예술성 높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극장을 빠져나오면 분수대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길을 헷갈리기 쉽다. 사방으로 길이 나있는데, 이럴 땐 바닥을 보면 된다. ‘한양도성 순성길’ 마크가 코스를 따라 표시돼 있어 헷갈리거나 길을 잃어도 금세 다시 코스에 진입할 수 있다. 마크를 따라 걷다 보니 익숙한 남산 등산길이 나타났다. 널찍한 도로와 한쪽에 깔끔하게 마련된 인도가 정상까지 이어져 있어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종종 시내와 남산 정상을 오가는 해치 버스가 지나가며 땀을 뻘뻘 흘리는 등산객과 라이더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잘 닦인 길이 편하니 몸도 편했지만 그만큼 산행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샛길 입구가 눈길을 끌었다. 알고 보니 도로 옆 숨겨진 듯 자리한 샛길이 ‘진짜’ 한양도성 순성길. 이렇듯 한양도성 순성길은 발걸음이 엇나가려 할 때마다 친절하게 바로잡아준다. 샛길로 들어서니 마치 다른 세상으로 순간 이동한 듯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울창한 나무 터널 아래 벌개미취가 보랏빛 카펫처럼 깔려 있고, 잎사귀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빛줄기가 되어 쏟아진다. 오른편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절벽이 감탄을 자아낸다. 남산만큼은 모르는 곳이 없다고 자부했건만, 난생처음 보는 낯설고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돼 한참을 머물렀더랬다.
드디어 남산 정상.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어 익숙한 N타워가 코앞에 우뚝 섰다. 잠시 땀을 식히기 위해 들어갔다가 남산 주변 전망이 한눈에 담기는 카페에 앉아 시원한 음료를 들이켜 본다. 그래 이 맛이었지. 어린 시절 구슬땀을 흘리며 오른 정상에서 맛본, 어머니가 미리 얼려두었던 차가운 오렌지주스와 그제야 느껴지는 서늘한 산바람 같은 잊고 있던 감각이 절로 떠오른다. 어디선가 들었던, 추억은 옅어져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N타워 앞에는 너른 광장과 팔각정이 있고, 그 앞에 서울을 둘러싼 산과 그 안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도심이 한눈에 펼쳐지는 전망대가 있다. 두 발로 이곳까지 오른 이들이 모여 숨을 고르는 곳이기도 하다. 하산이 시작되는 곳에는 과거 전국 봉수가 전달되는 중앙 봉수소의 기능을 했던 봉수대 터가 남아있다. 남산 정상은 그야말로, 볼거리 천국. 매년 수많은 해외 관광객이 찾는다는 서울의 명소답게 이날도 외국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실 남산 정상은 관광명소의 시작점이다. 하산길에도 뜻깊은 역사적 명소가 이어지기 때문. 한양도성을 따라 계단을 차곡차곡 내려가면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안중근 기념관이, 조금 더 내려가면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자리한 백범 광장이 연달아 방문객을 반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안중근 기념관 주변은 1925년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곳인데, 서울시가 2013년 한양도성 보존 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발굴하면서 땅속에 묻혀 있던 성곽의 기저부가 모습을 드러낸 것. 조선시대 축성 기법과 석재石材의 변천 과정까지 가늠해볼 수 있는 소중한 유적지가 됐다.
한양도성 순성길 남산구간 주요 포인트
장충체육관
1963년 2월 개장한 국내 최초의 실내체육관. 2015년 1월 리모델링을 통해 재개장한 시립체육시설이다. 지하 2층부터 지상 3층까지의 규모를 갖췄으며 관람석은 4507 석이다. 외관은 원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돔 지붕을 갖고 있어 멀리서도 눈에 띈다. 배구, 농구, 핸드볼 경기가 펼쳐지며 각종 문화행사가 개최되고 있어 도심 속 스포츠와 문화복합시설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장충체육관 뒷길
평지부의 돌들은 대부분 세종 때 새로 쌓은 것인데,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했으며 상대적으로 큰 돌을 아랫부분에 놓아 균형을 유지했다. 이 형태의 성벽은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잘 볼 수 있으며 이 구간의 성벽은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국립극장
1973년 장충동에 건립된 국립 공연·예술 종합극장이다. 1974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 도중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해오름극장(대극장), 달오름극장(소극장), 별오름극장, 하늘극장(원형 야외무대) 등을 갖추고 있으며 전통 공연을 선보인다.
N서울타워
남산 정상에 자리한 전망 탑. 해발 480m 높이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서울시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관광명소다. 1969년 수도권에 TV와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는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가 1980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2005년 복합문화공간인 N서울타워로 재탄생했다.
남산 팔각정
남산 팔각정 자리는 본래 조선시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다. 조선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만 지낼 수 있게 했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은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졌다. 제1공화국 때 국사당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 불렀다가, 4·19 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봉수대 터
<기념물 제14호>인 남산 봉수대는 조선시대 전국 팔도에서 올리는 봉수의 종착점이었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정세를 알리는 시각 신호를 말한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한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세종 5년(1423)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500여 년 간 존속했으며 현재의 봉수대는 1993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남산 서쪽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 하여 예로부터 잠두봉이라 불렸다. 남산 하산길에 자리한 잠두봉 포토아일랜드 전망대에 오르면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도심의 빌딩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산 회현자락 유구 발굴현장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주변은 1925년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곳이다. 서울시는 2013년 한양도성 보존 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발굴했는데, 땅속에 묻혀 있던 성곽의 기저부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조선시대 축성 기법과 석재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백범광장 일대
남산의 백범광장 주변에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상 등 항일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념물이 많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일제 식민 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대체한 것. 백범광장 일대의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을 지을 때 모두 철거되거나 흙 속에 묻혔다가 최근 다시 쌓았다. 다만 지형 훼손이 심해 원형을 살릴 수 없는 구간에는 성벽이 지나던 자리임을 알 수 있도록 바닥에 흔적을 표시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