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곡이 그해의 운세를 좌우한다는 속설처럼 어쩌면 새해 첫 책이 우리의 한 해를 안내해 주진 않을까. 출판인들의 선택을 나침반 삼아 펼쳐 보는, 새해의 첫 페이지.

[바이 하트] (티아구 호드리게스, 알마)
여기 시력을 잃어가는 할머니를 향한 사랑으로 시작된 아름다운 책이 있다. 가난했지만 평생을 책과 함께해 온 그녀는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자, 손자에게 ‘마지막으로 읽을, 영원히 마음으로 기억할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마음에 새겨진 문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이 하트]는 ‘기억한다’는 것은 소멸해 가는 존재를 향한 가장 아름답고 헌신적인 사랑의 실천이자 폭력에 저항하는 일, 그리고 곧 삶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책이 점점 사라져 가는 시대에 바치는 헌사 같은 책.
- 안지미 알마 대표
[책으로 가는 문: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다우출판사)
2025년은 눈앞에 주어진 일에만 신경 쓰느라 스스로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래서 2026년은 ‘좋아하는 걸 깊이 탐색’하는 해로 보내려 한다. 지브리에 대한 본능적 끌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감정의 근원을 찾아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책으로 가는 문]을 읽으며 하야오 감독에게 영감을 준 어린이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 보려 한다. 모두 지금껏 바빠서 스스로에게 소홀했던 날들은 흘려보내고, 올해만큼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 박지현 비제이퍼블릭 편집자
[A가 X에게: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열화당)
얼마 전 존 버거가 팔레스타인 작가 가산 카나파니의 1956년 소설 [가자에서 온 편지]를 낭독한 2008년 영상을 봤다. 이 영상에서 존 버거는 미출간 최신작을 카나파니를 기리기 위해 썼다고 밝힌다. 바로 ‘편지로 씌어진 소설’이라는 부제가 달린 [A가 X에게]. 유튜브에 ‘가자에서 온 편지’를 검색해 낭독을 들어본 뒤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만일 독서가, 특히 새해 첫 독서가 더 나은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행위의 하나라면, 우리는 ‘편지’와 ‘소설’로 전해야 했던 두 작가의 절박하고 아름다운 진실에 다가가야만 한다.
- 강소영 출판사 겸 북 살롱 ‘얼굴들’ 운영자
[겨울 정원 - 2025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주란 외 5명, 은행나무)
겨울에는 단편소설집 읽는 걸 좋아한다. 작은 온기마저 소중해지는 계절이라 그런지, 소설 속 따스함을 더 잘 포착해 내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이주란 작가가 써 내려가는 인물들의 담담한 슬픔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많이 무너져 내리곤 한다. 거대한 슬픔을 겪었기에 조금만 슬퍼하게 된 사람, 정말 오래 울어 모든 감응이 잔잔해진 사람.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은 마음의 본체를 확인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수록된 다른 소설들도 모두 좋다. 새해 첫 책으로, 소설가들이 남겨 둔 작은 온기를 차곡차곡 수집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 정지연 돌베개 마케터
[아뇨, 아무것도] (최제훈, 한겨레출판)
새해엔 뭔가 대단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택시 기사가 “어디 가세요?”라고 묻는데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편의점 직원이 48시간째 일하고 있는 것 같을 때, 어제까지 하던 일이 갑자기 하기 싫어질 때. 그런 순간 느끼는 이상함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복잡하다. 웃기다가도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15편의 이야기 앞에서 새해 결심 따윈 저만치 뒷전이 된다. 그냥 재밌게 읽고, 재밌게 살면 되니까. [아뇨, 아무것도]로 가볍게 시작하자.
- 김준섭 한겨레출판 부편집장
[마이너 필링스: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캐시 박 홍, 마티)
지난해에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나의 힘듦에만 골몰하며 살았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체력도 없었던 탓이다. [마이너 필링스]는 한국계 미국인이 겪은 미세하지만 전혀 가볍지는 않은 ‘차별’에 관한 책이다. 책을 읽으며 다짐했다. 그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고, 곧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러므로 더는 냉소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해서는 안 되겠다고. 새해에는 뾰족한 가시 대신 따뜻한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신수빈 사이드웨이 편집자
[전쟁은 속임수다: 리링의 「손자」 강의] (리링, 글항아리)
처음으로 [손자병법]을 읽기 시작한 건 5년 전 겨울이다. 한자만 가득한 책을 펼치면 왠지 마음이 평안했다. “이 책을 20대에 읽었더라면!” 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요즘 한문 동아리에서 [손자병법] 원문을 낭송하고 새로 뜻을 새기고 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유일한 규칙: 손자의 투쟁철학]과 이 책이다. 새해, 손자를 읽을 일련의 시간이 준비됐다.
- 이옥란 출판 커뮤니티 ‘올차캠프’ 대표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유홍준, 눌와)
30년 전 우리나라에 답사 열풍을 불러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이자 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인 유홍준. 입담이 가장 센 사람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책은 어느 것 하나 가볍게 흘려버릴 수 없는 진지함으로 가득하다. 전문성과 대중성을 모두 담아낸 [화인열전]과 [완당평전]은 나 같은 출판인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의 신작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가 올해 나의 첫 독서 목록이다.
- 김남중 한권의책 대표
ㅣ 덴 매거진 2026년 1월호
에디터 조윤주(yunjj@mcircle.biz)
사진 김덕창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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