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버림 받고도 후세를 먼저 걱정한 서애 류성룡은 세계 공직자의 표상”

허윤희 기자 2023. 3. 1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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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 허윤희 기자의 발굴]
서애 영문 전기 버클리大서 출간한
영문학자 최병현과 류진 풍산 회장
최병현 소장이 서울 충정로 풍산빌딩에 있는 연구실에서 자료를 들고 서 있다. 그는 최근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서애 류성룡의 영문 전기 '조선의 재상 류성룡'을 출간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IMF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어느 날, 영문학자 최병현은 퇴근길 꽉 막힌 도로에 갇혀 있었다. 라디오를 켜니 난데없는 설전이 흘러나왔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와 모 야당 인사가 외환위기의 원인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서로 네 탓 내 탓 하는 걸 들으니, 그의 머릿속에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쓴 ‘징비록’이 떠올랐다. “400년 전 임진왜란 때도 적과 싸우기도 전에 동인과 서인이 다투면서 책임 공방을 벌였죠. 가만 생각하니 과거와 현재가 너무 닮은 겁니다. 이름도 생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난데없이 쳐들어온 것이나 IMF라는 듣도 보도 못한 외환위기가 온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것이나, 상황도 흡사한데 국난을 두고 우리끼리 탓하는 것까지 똑같았으니까요.”

그는 집에 오자마자 서재에서 ‘징비록’을 꺼냈다. 서문을 영문으로 번역하고, 쭉 읽어보니 문장이 생동감 넘쳤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류성룡이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인 경북 안동에 내려가 임진왜란을 기록한 책이 ‘징비록(懲毖錄)’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같은 불행한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고 했다. 그도 ‘다시는 똑같은 위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과거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번역에 착수한 그는 5년 만인 2002년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징비록 영역본(The Book of Corrections)을 출간했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임진왜란 관련 한국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텍스트”(루이스 랭커스터 버클리대 교수)를 시작으로 미국 역사학계의 호평이 잇따랐다. 케네스 스워프 미국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임진왜란을 소개하는 책 10권을 꼽으면서 첫 번째로 이 책을 추천했다. 지금도 동양학을 가르치는 미국 주요 대학들이 필수 교재로 사용하고, 아마존 독자 평가에도 별 다섯 개가 붙어 있다.

‘징비록’의 성공은 영문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최병현(73) 한국고전세계화연구소장(전 호남대 교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우리 고전의 세계화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이후 본격적인 고전 번역 외길로 들어섰다. 한국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2010)를 10년 각고 끝에 영역해 캘리포니아대에서 펴냈고,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2014) 영역본을 하버드대에서,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의 ‘북학의’(2019) 영역본을 하와이대에서 출간했다. 고전 영역(英譯)의 개척자로 26년을 걸어오면서 그는 “물도 없이 헤엄치는 것 같고, 적도 없이 싸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 외로운 싸움 덕분에 우리 고전이 울타리 밖을 넘어 인류의 보배가 됐다.

최 소장이 이번엔 번역이 아닌 평전을 내놨다. 최근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출간한 서애 류성룡의 영문 전기 ‘조선의 재상 류성룡: 전쟁과 기억(Ryu Sŏngnyong, Chancellor of Chosŏn Korea: On the Battlefield and in Memory)’이다. 철저한 자료 조사와 연구를 통해 류성룡의 생애는 물론 16세기 임진왜란을 둘러싼 한·중·일 삼국의 갈등과 역사적 배경까지 560쪽 분량에 담았다. 퓰리처상을 탄 전기 작가이자 역사학자 존 미첨은 “류성룡은 정치가이자, 전략가, 학자로서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며 “저자는 고통스러울 만큼 철저한 연구를 거쳐 우아하게 써내려갔으며, 심오하게 분석적인 저술로 이 역사적 인물을 되살려냈다”고 추천사를 썼다. 서울 충정로 풍산빌딩에 있는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최병현 소장이 서울 충정로 풍산빌딩에 있는 연구실 책상에 앉아 최근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출간된 서애 류성룡의 영문 전기 ‘조선의 재상 류성룡’을 펼쳐 보이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책 표지 속 서애 초상화는 상상화이고, 실제로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남아있지 않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류성룡이 나를 찾아왔다

-그동안 계속 고전 번역을 해왔는데, 이번엔 왜 평전을 썼나.

“‘북학의’ 번역이 끝날 무렵 다음 작품을 고민하다가, ‘고전의 세계화’는 이만큼 밭을 갈았으니 이제 ‘인물의 세계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엔 훌륭한 역사적 인물이 많지만, 해외에선 여전히 무명(無名)에 가깝다. 영문 전기가 없기 때문이다.”

-왜 류성룡이었나.

“일단 전기를 쓰려면 강가에서 사금(砂金) 거르듯 자료 조사에만 엄청난 땀과 시간을 쏟아야 하는데, ‘징비록’을 번역하면서 서애에 대한 공부가 충분히 돼 있었다. ‘징비록’은 이제 미국 대학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텍스트는 알려졌지만, 정작 저자에 대해선 학생들이 잘 모른다. 게다가 서애는 다른 어떤 위인보다도 전 세계 독자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동아시아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카운터파트는 임금인 선조가 아니라 전쟁을 이끈 총괄 책임자 류성룡이었다.”

-집필 과정은 어땠나.

“전기는 이를테면 글로 그리는 초상화다.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서애의 초상화를 머릿속에서 그려보려니 임진왜란을 겪으며 고군분투하는 모습만 어른거릴 뿐 전체 형상이 이뤄지질 않았다. 그의 삶을 실물처럼 그리는 건 불가능했지만, 마음만은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마음을 그렸나.

“우선 서애집에 수록된 ‘잡저’를 비롯해 모든 기록을 읽었고, 그가 성장하면서 읽었을 법한 ‘전습록’을 포함해 ‘사기’ ‘통감’ ‘근사록’ 등을 읽었다. ‘선조실록’ 등 역사적 기록을 살폈고, 야사라 할 수 있는 ‘어우야담’이나 ‘임진록’ ‘간양록’ 등에서 일화, 전쟁 경험담 등을 수집했다. ‘선조실록’ ‘연려실기술’ 등에선 서애의 정치 행보나 당쟁 관련 상황을 면밀히 살폈다. 종가나 외가를 통해 가전되는 이야기, 동시대 인물을 다룬 문집에서 서애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대조해 객관적인 평가도 가늠했다.”

-보통 작업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A4 용지 자료만 쌓아놓으면 내 키에 닿을 정도였다. 서애가 겪었던 16세기 말 동북아시아는 격변의 시대였다. 명나라의 경우 북방은 몽골, 남방은 왜구가 기승을 부렸고, 일본은 100여 년 이상 전국시대가 지속된 끝에 히데요시가 경쟁자들을 진압하고 정권을 잡았으나 여전히 불안했다. 조선은 외척정치와 붕당정치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국방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국비기국(國非其國), 나라가 나라도 아니었다는 게 임진왜란을 계기로 드러났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서애의 초상화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이번 전기는 인물의 초상화이면서 시대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집필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

“임진왜란이 7년간에 걸친 전쟁인데, 이번 책 쓰는 데도 꼬박 7년이 걸렸다. 이 책은 나의 임진왜란이었다. 하하!”

-처음 ‘징비록’을 출간한 버클리대에서 출판됐다.

“제가 ‘태조실록’을 하버드대에서 냈을 때 이런 원고는 언제든 출판하겠다고 했던 그들이 이번 원고엔 별 반응이 없었다. 류성룡이 누군지 모르니까. 버클리대는 될 줄 알았다. 징비록이 거기서 출간됐으니까 가능했다. 20년 전에 ‘징비록’이 없었다면 이 책도 없는 거다. 지난 20년간 한류와 더불어 한국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최근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출간된 서애 류성룡의 영문 전기 ‘조선의 재상 류성룡’(왼쪽)과 2002년 출간된 '징비록'.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과거 아닌 현재, 로컬 아닌 세계의 이야기

최병현은 등단한 시인이다. 하와이대 재학 시절 쓴 영시 ‘고백’으로 이 대학 문학상을 받았고, 1977년엔 첫 한국어 시집 ‘피아노와 거문고’를 시인 박목월 추천으로 펴냈다. 컬럼비아대 석사, 뉴욕시립대 박사까지 18년간 유학하며 영문학을 전공한 이유가 “한국 문학을 깊이 하기 위해서”라며 “피아노와 거문고가 합주하는 시대가 반드시 오리라 예견했다”고 했다.

‘징비록’ 번역에 착수한 1997년, 그는 호남대에 적을 두면서 용산의 미국 메릴랜드대 서울분교에서 막 한국 문학 강의를 시작한 참이었다. 교재를 구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 그는 “영문으로 된 한국 문학이나 역사책조차 찾을 수 없었다”며 “당시 한국에 대한 영문 텍스트는 ‘6·25 전쟁’ ‘한강의 기적’ 같은 책뿐이었다”고 했다. “메릴랜드대 학생 중엔 미군뿐 아니라 한국 외교관 자녀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것 같았다. 책을 통해 조상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으니 이들이 어떻게 자기의 뿌리를 알까. 전 세계 700만 해외 교포 자녀들을 생각해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한국 고전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 절실해졌다.”

-해외에서 출판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나.

“텍스트 자체의 경쟁력을 믿었다. ‘징비록’은 16세기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인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고, 이 전쟁은 한·중·일 삼국의 군사적 충돌과 외교 갈등을 다루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 무엇보다 주제가 국가 위기에 관한 것이라 국제화 시대에 가장 적합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징비록’이 클래식(고전)이 된 걸까.

“과거 한때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지만 전 세계에 보편적인 스토리다.”

-어떻게 버클리대에서 출간됐나.

“1년 반 만에 초벌 번역이 끝났는데, 이대순 당시 호남대 총장이 전화를 주셨다. 미국의 저명한 불교학자 루이스 랭커스터 버클리대 교수가 서울에 오는데 만나볼 생각이 있느냐고. 랭커스터 교수는 만난 자리에서 원고를 끝까지 읽더니 ‘이걸 제가 가져가도 되느냐’며 흥분했고, 며칠 뒤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로부터 ‘출판하고 싶다’는 편지가 왔다.”

-출판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3년 넘게 걸렸는데.

“주석을 다는 데만 1년이 걸렸고, 버클리대 관례대로 저명한 한국학 전문가 3명의 검토와 추천을 거쳤다. 관직명, 지명 같은 용어도 엄정한 기준에 맞게 수정했다.”

-출간 이후 임진왜란에 대한 국제 인식이 달라진 게 있을까.

“그동안 서양에선 임진왜란을 16세기 국제 정세가 변하면서 중국과 일본이 벌인 패권 다툼으로만 보는 시각이 많았다. 조선은 아예 빠져 있었다. ‘징비록’이 한·중·일 세 나라의 관계성을 온전히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치욕을 처절하게 복기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 실상을 뼈저리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류성룡 전기를 펴내기까지 조력한 류진 풍산그룹 회장(왼쪽)과 최병현 소장.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풍산류씨 가문을 만나다

류성룡 전기가 출간되기까지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서애 류성룡의 13대손인 풍산그룹 류진(65) 회장이다. 2002년 ‘징비록’ 출간 후 학과장인 유명우 교수(서애 12대손)의 소개로 류 회장을 처음 만났다. “방에 들어갔더니 거의 십여 명에 달하는 분들이 좌우로 앉아 기다리다 일어섰다. 두루마기 차림을 한 분도 있었다. 류 회장님이 감사하게도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셨는데, 200여 명에 달하는 국내외 귀빈이 자리했다. 그 규모가 서애의 역사적 위상만큼이나 크게 느껴졌다. 이날 깨달은 건 조상은 자손이 만든다는 것이다. 조상은 자손을 낳지만 자손 또한 조상을 명예롭게 함으로써 다시 태어나게 만든다.”

류성룡 전기 집필 결심을 굳힌 것도 류 회장과의 만남이 결정타였다. 다시 유명우 교수의 주선으로 만난 자리에서 최 소장이 “만약 전기를 쓴다면 잭슨 대통령 전기로 퓰리처상을 받은 존 미첨이 모델”이라고 했더니, 류 회장이 갑자기 반색을 하며 “미첨은 내 친한 친구”라고 했다. 최 소장은 “그 순간, 이심전심의 전류가 흐르면서 주저했던 마음이 사라졌다”고 했다.

류진 회장에게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약속 잡기가 쉽지 않았다. 도쿄에서 전화를 받은 그는 “내일 인도 뉴델리로 갔다가 유럽과 미국을 거쳐 보름 후 새벽에야 서울로 돌아간다”고 했다. “ ‘징비록’을 멋지게 번역한 학자가 해외 독자들에게 서애 할배를 알릴 평전을 쓴다는데 후손으로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풍산빌딩 안에 있는 서애기념사업회 사무실을 내드렸다.” 출판되자마자 단숨에 책을 읽은 그는 감동해 초판 5000부를 전부 구입했다. 경북 안동의 풍산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나눠주고, 지인들에게도 선물할 계획이란다.

◇“선조에 누가 되는 일은 절대 해선 안 돼”

세계 30여 국에 각종 탄약 수출, 2008년 국내 방위산업 업체로는 처음으로 방산 수출 1억 달러 돌파, 2006~2010년 5년 연속 국내 방산수출 1위 기록…. 풍산이 갖고 있는 기록이다. 1968년 창업주인 고(故) 류찬우 회장이 구리를 판판하게 펴는 신동(伸銅) 산업으로 출발해 1973년 안강종합탄약공장을 준공하면서 방위산업에 진출했다.

-방위산업 진출이 류성룡과 관련이 있나.

“선친이 방산에 진출한 건 ‘징비록’에 나오는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자주국방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회사 이름도 풍산 류씨인 본관을 따서 지었다. 사업보국(事業報國) 신념으로, 방위산업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하는 거라고, 기업 이익의 일부를 반드시 사회에 환원하라고 하셨다.”

류 창업주는 병산교육재단을 세워 고향인 하회마을에 풍산중·고등학교를 세웠고, 사재를 출연해 육군사관학교에 서애관이라는 체육관을 세워 기증했다. 류 회장도 선친의 뜻을 이어 나눔과 상생의 가치를 추구한다. 최근에는 지진으로 피해를 본 튀르키예 이재민들을 위해 성금 50만 달러를 지원했다. 독립기념관 건립 후원, 다문화가정 지원, 소년소녀가장 돕기 등 문화체육진흥, 교육 장학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자랄 때도 류성용 후손이라는 걸 많이 의식했겠다.

“밖에 나가서 가문을 욕보이면 안 된다고 엄하게 가르치셨다. 늘 몸가짐을 조심해야 했다. 성인이 돼 사업을 하면서도 서애 할배의 겸손함을 본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별명이 ‘재계의 선비’다.

“아휴, 전혀 그렇지 못하다.”

미국통으로 재계 첫손에 꼽히는 그는 역대 여러 정권과 미국 간 가교 역할을 해왔다. 노무현 정권 초기에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 노 전 대통령의 첫 미국 방문을 성사케 도왔다. 이명박 정부의 방미단에 합류해 FTA 협상을 지원했고, 박근혜 정권 때는 미국 하원의원단과 한국 재계의 만남을 주선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회담에도 배석했다. 특히 부시 대통령 가문과는 오랜 인연을 쌓아왔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은 하회마을까지 방문했고,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도 안동 풍산고등학교에서 강의하고 피아노까지 쳤다.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자서전은 한국어로 제가 번역해 출간했는데, 너무 고생해서 다시는 번역은 안 하려고 한다.(웃음)”

서울대 영문과와 미국 다트머스대 MBA 출신으로 ‘미국인보다 더 아름다운 영어를 구사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해외 출장이 잦은 건 큰 거래선은 직접 뚫어야 하기 때문”이라며 “웬만한 해외 영업은 직접 맡아 처리한다”고 했다.

-‘나는 회장이 아닌 대표사원’이라고 말한다는데.

“오너이지만 능력 없으면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다행히 요즘 회사가 잘돼서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웃음)”

-재계에선 이번에 전경련 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더라.

“제가 맡기엔 아직 좀 부담이 있다. 절차를 밟으면 몰라도 저 혼자 나서서 맡는 것도 좀 그렇고. 대신 부회장을 다시 맡았다.”

◇왜 지금 류성룡인가

최 소장은 “이순신은 전장에서 싸웠지만, 류성룡은 기억 속에서 싸웠다”고 했다. 그래서 부제가 ‘전쟁과 기억’이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의 말처럼,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첫 번째는 전쟁터에서, 그다음에는 기억 속에서”.

-무슨 뜻인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죽음을 불사한 것은 어쩌면 그의 미션이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서애가 탄핵의 수모를 당하고도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징비록’을 써서 후세가 치욕스러운 국난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같은 과오가 반복되는 걸 경계하기 위해서. 죽음 앞에서 무사의 길과 선비의 길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2023년인 지금, 왜 류성룡을 읽어야 할까.

“서양에서 영웅은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같은 무사들이지만, 동양의 영웅은 문명을 일으킨 요순 임금이나 주공 같은 사람들이었다. 서애는 학문만 한 게 아니라 학문을 실현해 나라를 구했으니 진짜 영웅 아닌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나라에 버림 받은 상태에서 먼 훗날 미래를 기약하며 후세를 걱정하는 것. 전 세계 공직자들이 본받아야 할 롤모델이다.”

-이순신뿐 아니라 서애도 백의종군 정신이 있었다고 썼다.

“서애의 삶은 임진왜란 전과 후로 구분된다. 전쟁까지는 업적이고, 그 이후는 태도다. 영웅적인 면모는 탄핵 당한 이후에 더 드러난다. 전쟁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지만, 한마디도 반박하지 않고 물러나 꿋꿋하게 견디며 징비록을 썼다. 공을 세우고도 내세우지 않는다. 세상을 쫓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생각하는 의(義)를 따랐다.”

-그런데도 이순신에 비해 덜 알려진 이유는 뭘까.

“그에 대한 평가가 정적들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역사적 인물 평가는 정파, 혈맥, 학맥, 혼맥, 이 4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순신 동상만 있고, 서애 동상은 없는 거다.”

서애 동상이 없는 진짜 이유에 대해 류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가문에서 동상을 세우려고 한 적은 있었어요. 제가 반대했습니다. 겸손하고 늘 자신을 낮췄던 서애 할배가 싫어할 게 뻔하니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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