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차보다 비싼 중고차가 있다고?” 얼핏 말이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지금 국내 중고차 시장에서는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BMW X5 얘기다.

최근 중고차 온라인 플랫폼을 뒤져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주행거리 8199km짜리 2024년형 X5 xDrive 30d M 스포츠가 1억 4000만 원에 올라와 있었다. 같은 모델 신차 출고가가 1억 2200만 원인데 말이다. 무려 1700만 원이나 비싸다. 사이트에서는 아예 대놓고 ’신차 대비 124%’라고 표기해뒀다.

이게 끝이 아니다. 올해 6월 중고차 시세를 보니 X5(G05) xDrive 30d xLine이 한 달 만에 7.11%나 뛰어올랐다. 수입차 중 상승폭 1위다. 다른 차들은 다 떨어지거나 제자리걸음인데 X5만 홀로 치솟고 있다.

이 기현상의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뒤 서방의 제재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러시아로 가는 프리미엄 SUV 수출길이 거의 막혔다. EU는 2023년 6월부터 기준을 바꿔 1900cc를 넘는 차량의 러시아 수출을 금지했고, 일본도 8월부터 같은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러시아 바이어들이 다른 루트를 찾기 시작했다. 바로 한국이다. 공급이 줄어든 만큼 브로커 마진과 물류비가 덧붙어 “한 대당 30~50% 웃돈”이 붙는 구조가 형성됐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실제로 러시아 티멘 지역 중고차 시장에서는 BMW X5 평균 거래가가 1060만 루블(약 1억 7000만 원)까지 치솟았다. 2024년 1분기 기준으로 프리미엄 SUV 중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차가 됐다.

그런데 왜 하필 X5일까.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제재 정면타격을 받았다. 3.0리터급 엔진으로 1900cc 상한선을 훌쩍 넘어 EU와 일본 규제 대상에 100% 해당한다. 둘째, 대체재가 없다. 메르세데스 GLE나 아우디 Q7 모두 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중국 브랜드는 리세일 가치가 떨어진다.

셋째, 브랜드 파워다. 러시아에서 X5는 “가장 현금화가 빠른 프리미엄 SUV”로 통한다. 중고차라도 사두면 가격 방어가 확실하다는 인식이 박혀있다.

국내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감지된다. 신차 대기 기간이 4~6개월까지 늘어난 상황에서 수출상들이 ‘주행거리 1만 km 이하·무사고’ 조건의 차량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고 있다. 준신차급 매물에 웃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몇 가지 변수가 있다. 제재가 더 강화되면 물류비가 추가로 오를 수 있다. 반대로 터키나 UAE, 아제르바이잔 경유 루트가 자리 잡으면 운송비가 안정화돼 프리미엄이 꺼질 가능성도 있다.

확실한 건 전쟁이 끝나거나 제재가 풀리면 이 버블은 한순간에 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X5 준신차에 웃돈 주고 사려는 사람들은 이런 리스크를 감안해야 한다.

중고차를 팔려는 사람이라면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다. 딜러가 갑자기 나타나서 무사고·저주행을 강조하며 즉시 현금을 제시한다면? 십중팔구 수출 목적이다. 시세보다 비싼 값을 부른다면 팔아볼 만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극단적인 공급 부족과 우회 수요가 만들어낸 이 기현상은 신차를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과 수출 시장을 노리는 세력이 있는 한 당분간 더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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