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의 배우 김성녀의 뮤지컬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이 초연 20주년을 맞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다. 2005년 송승환의 PMC프로덕션 기획 ‘여배우시리즈’ 중 하나로 출발했지만 전회 기립박수 기록 등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동아연극상·대한민국예술상을 수상했다. 지난 20년간 코로나 팬데믹 2년을 제외하고 한해도 빠짐없이 국내외 무대를 누빈, 공연계 전무후무한 레퍼토리다.
1950년대 말, 좌우익 이념 대립 속에서 반정부인사로 몰려 벽 속으로 피신해 숨어살게 된 아버지와, 아버지를 ‘벽속의 요정’이라고 믿으며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는 여인을 축으로 무려 32명의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2시간짜리 이야기를 변신의 귀재 김성녀가 홀로 춤추고 노래하며 풀어내는 무대다. 판소리를 전공하고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지내며 창극 대중화를 이끈 주인공이 꾸미는 ‘현대판 판소리’라 할 만하다.
원전은 스페인 내전 당시 이데올로기 문제로 40년간 벽 속에 갇혀 살았던 반정부 인사의 딸 마리아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이를 일본 극작가 겸 연출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모노드라마로 무대화했는데, 원래 한국판의 주인공은 작고한 김민기 연출과 배우 김혜자가 될 뻔했다. 그런데 일본 제작자가 김민기에게 판권을 넘긴 지 5년이 되도록 공연 소식이 없자, 극단 미추의 손진책 연출과 김성녀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춤과 노래까지 자유자재인 김성녀에게 딱 맞는 작품”이라면서다.
‘벽 속의 요정’이 김성녀의 인생작이 된 경위다. 김성녀는 이 작품을 “나의 월계관이자 가시관”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김성녀는 마당놀이로 워낙 유명해진 터라 연극배우라는 인식이 엷어졌던 게 사실이다. “여자 연극배우들이 모노드라마를 하나씩 갖고 있을 때인데, 나는 55세에 처음 하게 됐어요. 남편의 극단에 있다보니 오히려 내 모노드라마를 제작하기 어려웠던 건데, 송승환씨가 판을 깔아준 덕분에 할 수 있었죠. 공연 첫날 예상치못한 웃음이 터져서 실수도 하고, 모노드라마의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었는데 커튼콜에 기립박수가 터져나온 거예요. 그때만 해도 기립박수가 잘 없었거든요. 그 쓰나미 같은 감동을 잊지 못해 지금껏 겁 없이 달려왔습니다. 내게 연극배우라는 위상을 돌려준 작품이지만 2시간 동안 활화산처럼 타올라야 하거든요. 혼자 감당하기에 고통스럽고, 조바심이 나서 도망가고 싶기도 해요.”
6·25 한국전쟁 직전부터 90년대까지를 배경 삼은 오래된 무대인데다 초연 그대로 20년간 수정된 부분도 없지만, 모든 시즌에 꾸준히 찾아오는 마니아 팬덤이 있을 정도로 변함없는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손진책 연출은 “창작에 가까운 배삼식의 대본과 박동우의 미술, 최보경의 의상, 안은미의 안무까지, 이 작품은 묘하게 20년 동안 수정이 필요없었다. 생명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라는 게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주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천의 얼굴’ 김성녀의 1인 32역은 늘 변화하고 있고, 그 신들린 변신을 보는 재미가 바로 변함없는 인기의 비결이다.
꾸준한 인기 덕에 20년간 공연을 이어오면서도 한번도 스스로 제작한 적 없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지방 투어와 중국, 일본, 미국까지 모두 초청을 받아 갔고, 20주년 기념 공연은 세종문화회관이 공동주최로 나섰다. 2006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처음 이 공연을 봤다는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도 그 연기에 매혹된 마니아 중 하나다. “연기가 어찌나 찰지고 변신이 능수능란한지 혀를 찼다. 이런 배우가 있구나 싶어 팬이 됐고, 거의 맹신자 또는 숭배자가 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5살 어린아이부터 20대 여인, 70대 노부부까지 버라이어티한 변신에 “커튼콜에 32명이 나올 줄 알았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5살부터 여성국극 무대에 섰고, 판소리로 단련된 그에게 변신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다. 연극 ‘햄릿’에서 호레이쇼를 맡는 등 남장에도 탁월하고, ‘남자 연기를 할 때 유독 멋있다’는 게 정설이다. “판소리로 발성훈련을 해서 남자목소리 내기에 적합해요. 마당놀이 때 이도령을 했던 것이나 내 다양한 경험들이 조각처럼 맞춰져서 벽 속의 요정이 된 거죠.”
변신이 쉽다지만 “죄송스러운” 역할이 하나 있다. 스무살 처녀 역할이란다. “20대 예쁜 아가씨가 되야 하거든요. 70살 넘어서 요염부리고 춤추고 연애하는 씬이 그렇게 죄송스러울 수 없네요. 징그럽지 않을까 싶고.(웃음) 그래도 관객이 다 용서해 주셔서 하고 있습니다.”
55세 시절의 김성녀와 지금의 그가 결코 같지 않은 것처럼, ‘벽 속의 요정’의 20년간 337회 무대도 한번도 똑같은 적이 없단다. 어쩌면 그게 이 무대의 생명력 아닐까. “전국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한번도 똑같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매번 다른 장면에서 눈물이 나고, 같이 놀아주시는 관객의 추임새도 매번 다르니까요. 너무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 무대라 힘이 들지만, 나이 들면서 힘조절이 가능해졌어요. 12곡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이제 높은 청이 안 나오는 대신 깊어진 연기로 나이에 맞게 하자는 생각이에요.”
모노드라마를 쉼없이 20주년 이어왔다는 것은 거의 없는 기록이다. 74세 배우 김성녀의 도전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배우 혼자 춤추고 노래하는 공연을 몇 살까지 할 수 있을지 도전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지만,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있거든요. 이번 열흘 동안의 공연이 잘 되면 30년까지 가고, 내 맘에 안 들면 이걸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