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건강서비스'는 성립, '보편적 스포츠카'는 글쎄…
생태전환의 요구는 우리 사회에 상당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의 폭과 깊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쟁이 있다. 그저 화석연료 에너지를 어느 정도 감축하고 생산방식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을 지속하는 '생태적 현대화' 관점에서 지구의 수용한계를 고려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탈성장' 관점, 자본주의 자체의 변혁이 필수적이라는 '생태 사회주의' 관점까지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이 입장들에는 생태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 차이는 물론, 과학기술을 통한 생태 문제 해결 가능성, 성장의 지속 가능성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놓여 있다.
아직까지 이 입장들 중 어떤 입장이 더 현실에 가까운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생태전환을 보는 그간의 지배적 입장은 가장 적은 변화를 상정하는 '생태적 현대화' 관점에 가까웠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것이 현실에 대한 객관적 분석에 기초했다기보다는 변화가 적기를 '바라는' 긍정편향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는 복지국가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생태전환이 분명 복지국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임을 알면서도 정작 노동전환에 따른 실업정책이나 에너지 빈곤층, 주거빈곤층 문제 대응을 넘어서는 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생태전환이 요구하는 변화는 개별적인 복지정책이 아닌 복지국가 수준의 좀 더 근본적인 체제전환에 이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기존의 복지국가와 사회정책, 그리고 그 근간에 있는 민주주의의 변화가 요구된다. 이 글에서는 그 중 일부의 과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생태전환은 복지국가의 표적 전환, GDP에서 '삶'으로
복지국가든, 아니면 좀 더 넓은 의미의 자본주의 국가든 체계전환을 위해서는 그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은 1950년대 국민계정체계가 자리 잡은 이후로 국내총생산(GDP)을 한 국가의 사회경제적 성취를 가리키는 가장 중요한 지표로 여겨왔다. 물론 GDP 외의 다른 지표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지나친 왜곡이겠지만, 우리의 경제적 삶을 가리키는 단 하나의 지표를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이 개인 수준에서는 '소득'을 그리고 국가 수준에서는 'GDP'를 꼽을 것이다. 이는 심지어 '분배'를 지향해온 복지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복지국가의 규범적 정당성은 그것이 성장과 분배를 조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 기초해 왔으며, 90년대 이래 복지국가론의 지배적 패러다임인 '사회투자론'은 사회적 투자가 GDP로 측정할 수 있는 더 나은 경제적 성취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근래 들어 GDP가 실제로 우리의 삶을 가리키는 정도는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GDP는 사회적 관계나 비공식 돌봄과 같은 비시장적 활동을 측정하지 못하고, 경제적 가치 외에 사회적 가치가 큰 공공서비스, 사회적 돌봄, 사회적 경제 등을 평가절하하며, 경제주체들 간의 분배 문제를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행복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개인의 소득이나 국가 수준의 GDP 증가가 실제 우리들의 삶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정도는 제한적이라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GDP 중심의 세계관에 결정타를 날리는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기후위기가 불러오는 지속가능성 위기다. "당신이 경제 바깥에 환경이라는 경계선을 그리는 순간, 당신은 경제가 영원히 팽창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허먼 데일리의 말처럼 지속가능성 위기는 우리가 GDP로 상징되는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최근의 우려는 '포용적 성장' 혹은 '지속가능 성장'이라는 여전히 성장주의적인 해법이 불충분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 적어도 지구 전체적으로는 – 탈성장에 기초한 진보의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해지고 있다.
생태위기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앞서 언급한 GDP의 여러 문제들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어차피 소득, GDP 그리고 그 뒤에 자리한 성장주의 패러다임은 우리의 삶을 매우 제한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많은 가치 있는 활동들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평가절하 한다. 그렇다면 생태위기의 요구에 따라 우리의 궁극적 조준점을 GDP에서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와 함께 평가절하되었던 관계와 돌봄의 가치를 되돌려놓고, 성장의 한계선 안에서 모두의 삶을 지키는 '정의로운 전환'이 가능하도록 분배의 기준을 재설정하고, 소비 능력으로 모두 표현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삶과 행복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사실 GDP의 한계는 이전에도 지적되어 왔고 이를 보완하거나 대신하기 위한 시도는 다양하게 이루어져왔다. GDP가 측정하지 못하는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하는 지표로서의 사회지표 운동이나 아마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접근을 기반으로 한 인간개발지수(HDI), 사르코지 위원회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마련된 더 나은 삶의 질 지수(Better Life Index), 그리고 최근 국내외에서 GDP를 대신하기 위한 지표로 제안되고 있는 참진보지수(GDI)나 참정장지표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어떤 시도도 GDP의 지배적 위치를 위협할만한 위치에 서지 못했다.
물론 대안적 지표가 반드시 GDP의 지배적 위치를 흔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전히 GDP가 측정하는 성장에는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다른 지표들을 통해 GDP가 측정하지 못하는 것들을 측정하고 이를 통한 보완이 이루어진다면 충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생태위기가 심화될수록 성장에 대한 생각을 재조정할 필요성도 증가한다. 마침내 우리가 지향점 자체를 재조정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면, 이는 GDP가 기존의 지배적 위치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정책의 근간으로서의 필요(needs)
소득과 GDP가 상징하는 소비능력이 개인의 삶의 질이나 행복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고는 해도 여전히 '어느 정도의 소비능력'은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측면이다. 이 점은 성장주의에서 벗어난 복지국가가 어떻게 개인들의 필요를 분배하는지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의 바깥에 한계선을 긋는 순간 우리는 개인들의 삶을 '파레토 효율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체제전환 시대의 분배정치는 – 물론 언제나 어느 정도는 그랬지만 – 더욱 분명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수반하게 된다.
그 충돌을 관리하는 것이 분배정치의 몫이라면, 사회정책의 몫은 개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분배의 기준으로서의 '필요(needs)'를 더욱 정교하게 측정하고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필요의 부족' 뿐 아니라 '필요의 과잉'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현된 사례는 적지만 '최저임금'을 넘어 '최고임금'을 상상했던 것처럼 지속가능성 시대의 사회정책의 '필요' 개념은 필요의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필요의 과잉을 관리해야 한다. 영국의 사회정책학자 이안 고프가 설명한 것처럼 우리의 욕구 충족은 현 세대는 물론이고 다음 세대까지를 고려한 바닥(floor)과 천장(ceiling)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논의와 민주적 합의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해진다.
사회정책의 기초로서 '필요'를 정교하게 측정한다는 것이 그간 '보편주의'를 지향해온 방향에서 이탈해 '잔여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흔히 '필요'라고 하면 자산조사를 떠올리지만, 자산조사는 필요를 측정하는 여러 방법 중 한 가지일 뿐이다. 바닥과 천장 사이에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접근은 그보다는 보편주의의 실현이 대체로 모든 시민들의 욕구가 유사하다는 '동질성(homogeneity)' 가정에서 벗어나 개개인들의 역량이나 상황에 따라 욕구가 그 정도나 유형에서 모두 이질적이라는 '다양성(diversity)'을 수용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상한과 하한 안에서의 분배는 개개인이 어떤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주어진 자원을 역량과 기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환요인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까지 고려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속가능성 시대의 보편주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욕구를 가지기에 비슷한 자원을 보장하면 된다는 동질성 가정에 기초한 보편주의가 아니라, 그 유형과 정도에 있어 모두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개개인들에게 비슷한 수준의 욕구충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원과 역량을 보장해야 한다는 개별화된 보편주의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 수준에서의 '좋은 삶'에 대한 모색
사회정책의 '필요' 개념은 경제학의 '선호' 개념과 다르다. 사회정책에서 필요의 개념은 개인의 주관적 만족감 뿐 아니라 그 필요가 동시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기후위기 시대의 맥락에서는 후세대 관점에서 볼 때 객관적 타당성이 있는지를 고려하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사회정책에서 '보편적 건강서비스'는 성립하지만 '보편적 스포츠카'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며, 체제전환의 시대에 우리가 다시 한 번 검토해야 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정책의 목표를 소득과 GDP에서 우리의 삶(의 질)으로 재조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정책에서 '필요'의 개념을 정교화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공동체적인 함의를 담을 수밖에 없다. 개개인의 주관적 효용이 아닌 필요에 기초한 정책을 단지 소비능력의 보장이 아닌 삶의 번성(flourishing)을 목표로 펼친다는 것은 '무엇이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가?' 나아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검토와 합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간 자유주의 국가가 전제해온 (개인의) 권리가 좋은 삶에 우선하며, 따라서 공동체는 개인이 좋은 삶을 정의하고 추구하는데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탈할 것을 요구하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비록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개인의 권리'를 가장 중요한 공동체의 근간으로 삼아온 자유주의적 기획은 '소득과 소비'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하고 성장을 추구하는 체제와 함께 발전해왔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는 적어도 개인의 호기심을 위해 우주로 로켓을 쏘아 보내는 행위를 개인의 재산권의 실현이라고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한다. 지속가능성 위기의 시대에 우리의 목표를 GDP에서 삶으로 재조정한다는 것은 - 물론 철저히 민주주의적인 숙고와 합의에 기초해서 - 무엇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좋은 삶의 방향이며, 이를 위해 어떤 필요를 보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검토를 요구한다. 어쩌면 이것은 GDP로부터의 이탈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전환인지도 모른다.
[남재욱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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