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제주 한 바퀴, 437km..."길 위의 사색, 나를 향한 여정" [걷자, 올레 ①]
# 길은 언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또 안겨줍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목적지로 이끄는 경로일 뿐 아니라, 우리를 내면의 깊은 곳으로 안내하는 공간이며 인생 그 자체의 은유이기도 합니다.길 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풍경 속으로 떠나지만, 동시에 나 자신과 만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유명 시인 마차도(Antonio Machado, 1875~1939)는 "캄난테, 노 아이 까미노(Caminante, no hay camino)"라며 "길은 걷는 자에 의해 만들어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미리 정해진 답도, 누구도 정해준 경로도 없는, 오직 걷는 자의 경험과 선택에 의해 비로소 길이 생겨난다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역시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가고 있는 사람은/까닭 없이 이 세상에서 가고 있는 사람은/나를 향해 걷고 있다"('엄숙한 시간' 중에서)라며 모든 길은 스스로를 향해 걷는 길이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걷고, 나를 찾기 위해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게 한 발 한 발 내딛습니다. 제주의 자연 속에서 홀로 걸으며 고독을 만끽하고, 바다와 숲, 마을을 지나며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확장해보는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제주올레는 바로 그런 길입니다. 제주의 바람 속에서 고독과 마주하고 파도와 숲,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 속에서 발걸음을 옮기며 마침내 진정한 나를 발견합니다.
437km 올레길은 하나의 거대한 '시(詩)'와 같아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해안길, 초록이 내리는 숲길, 따스함을 느끼는 마을길을 따라가며, 자연과 인간이 맞닿아 함께 이야기를 써 내려가다 한묶음 실타래로 어우러집니다. 올레길을 걷는 발걸음 하나하나는 단순한 이동이 아닌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를 덧씌우는 여정을 닮았습니다.
다가오는 '2024 제주올레걷기축제'가 이런 길의 매력을 더욱 다채롭고 풍성하게 풀어낼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의 가장자리에서 느끼는 끝없는 여정의 스릴, 자연 속에서 스며드는 미래에 대한 사색, 함께 걸으며 홀로 마주하는 즐거움,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이 만들어가는 따뜻한 힘, 그리고 길 위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문화의 순간들까지. 이 모든 것이 제주올레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다시금 조명하며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글 싣는 순서>
① 걸어서 제주 한 바퀴, 437km : "길 위의 사색, 나를 향한 여정"
② 따로 또 같이 걷는 즐거움 : 마을과 함께 만드는 축제
③ 제주의 미래를 걷다: 친환경으로 이어가는 축제
④ 올레길 위에서 문화를 만나다 : 올레 위 문화 공연
⑤ 자원봉사와 후원의 힘 : 올레꾼, 봉사자들이 같이 흥겹게 만들어가는 축제
■ '번아웃'이 만든 길, 걷는 이에 '치유의 여행' 선사
27개 코스 437km. 지난 2007년 가을 제주 동쪽 시흥-광치기를 잇는 첫 코스가 생긴 지 15년 만인 지난 2022년 비로소 완성된 '제주올레'의 길이입니다. 제주에서 서울까지의 거리와 맞먹습니다.
올레는 예부터 제주에서 사용해 온 말입니다. 본래 마을 안 큰길과 집을 잇는 좁은 골목을 의미했는데, 이제는 제주를 대표하는 트레일 코스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그간 올레를 걸은 사람만 1,200만 명. 연간 제주도 전체 방문객 수와 비슷한 규모입니다. 이 가운데 27개 코스를 모두 완주한 이는 2만 5000명에 달합니다.
트레일 코스 '제주올레'의 창시자는 20년 넘게 기자생활을 해온 (사)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씨입니다.
'번아웃'을 겪게 된 그는 2006년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홀연히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습니다.
걷기 여행을 마치고 온 그는 이듬해 제주올레를 만들었습니다.
산티아고 길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제주에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입니다.
'번아웃'이 잉태한 결과물 답게 제주올레는 '한달살기', '제주이주민'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도보 여행자에게는 느림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치유의 여행을 선사했습니다.
■ 제주올레 "개별 여행객 트렌드 활성화"
관광버스 단체객으로 대표됐던 제주의 여행패턴은 제주올레 탐방객들에 의해 개별 관광객 흐름으로 변화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특히, 코로나19 집합금지 조치는 기름을 부었습니다. 지난 2020년 '따로 함께'를 슬로건으로 진행된 제주올레 걷기축제는 코스당 20명 안팎의 사전 신청 참가자들이 각자 흩어져 걷는 방식이었습니다.
코로나 시국 와중에도 연인원 1만 명 가까이 참여한 성공적 축제라는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축제로 인한 확진자는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지난해 제주도를 찾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제주관광공사 실태조사에선, 응답자의 25%가 가장 선호하는 활동으로 '산·오름·올레 트레킹'을 꼽히기도 했습니다. '자연경관 감상(16.4%)'이나 '해변활동(15.0%) 등을 제치고 당당히 제주에서 가장 하고 싶은 활동 1위에 오른 것입니다.
단순히 '걷는 것이 돈이 되겠냐'는 일각의 시각은 이제 올레를 걷기 위해 제주를 찾는 시대가 오면서 힘을 잃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에 내년에는 제주올레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을 수치로 볼 수 있는 연구가 제주연구원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제주올레 관계자는 "올레길 덕분에 여행자들의 발길이, 전에는 미치지 못했던 구석까지 닿으면서 올레길 위의 전통시장 매출이 올랐고, 코스가 지나는 마을과 기업들을 연결하는 사업으로 마을의 콘텐츠가 소득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모델을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제주올레가 제주도에 가져온 변화는 제주 구석구석을 걸으며 선으로 여행하는 장기 체류 여행, 자연 및 로컬 콘텐츠 체험 여행, 게스트하우스, 재래시장 활성화, 가치 추구형 여행 문화, 오고 또 오는 제주, 장소·계절에 따라 다시 찾는 여행지를 만들었다"고 덧붙였습니다.
■ 제주올레 걷기축제의 첫 시작
'더 많은 사람과 함께 걷고 싶다.' 제주올레가 첫돌을 맞은 2008년. 올레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축제 개최. 그러나 축제 공모에 도전했다 돌아온 것은 '걷기가 무슨 축제가 되겠냐'는 핀잔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기회는 찾아왔습니다. 이듬해인 2009년 서귀포시에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원하겠다고 밝혀온 것입니다. '맨땅에 헤딩' 식으로 새로운 올레 문화를 일궈온 데 대한 감사 차원이었습니다.
행정의 도움을 받아 가장 먼저 한 것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서 깊은 소도시인 나이메헨을 찾아가는 것. 이 도시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걷기대회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축제에선 나흘간 코스를 이어가며 10개가 넘는 마을을 지났습니다. 해가 뜨기 전부터 오후까지 걷는 내내 낯선 이들을 환영하는 사람들, 마을의 민속잔치, 과일과 사탕을 바구니에 담아와 건네는 꼬마들. 관현악단의 음악, 서커스와 연극 등 공연.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들썩였습니다.
다만, 군대의 행진으로 시작된 행사답게 목적지를 향해 분주하게 발을 움직여야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참가자들의 구성도 동양인은 거의 없고 서구권 백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세계평화의 섬 제주와 어울리는 다양성과 쉼이 있는 걷기행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듬해인 2010년 제주올레 걷기축제가 시작됐습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나이메헨 걷기대회를 보면서 길 위에 사는 사람과 길을 걸으러 온 여행자들이 어우러져 같이 걷고 같이 즐기는 축제를 해보고 싶었다"라며 "제주올레 길에서는 '놀멍 쉬멍 걸으멍(놀면서 쉬면서 걸으면서의 제주어)' 자기 내면도 들여다보고 자연도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고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종점까지 빨리빨리 걷곤 해서, 축제를 통해 놀멍 쉬멍 걸으멍 하는 문화를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코스에서 5코스까지 모든 마을을 찾아다니며 축제를 같이하자고 요청했고, 길 중간중간 체험과 공연을 넣으면서 도보 여행자들이 놀멍쉬멍걸으멍 할 거리들을 넣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2024 제주올레 걷기축제는 오는 11월 7일부터 9일까지 제주도 서쪽 한경, 한림, 애월에 있는 올레 14, 15-B, 16코스 일원에서 열립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 (jhkim@jibs.co.kr)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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