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목적'은..나를 길어 내는 일, 나를 길러 내는 일[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김유진 2022. 9. 12.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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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책 읽는 계절
글자를 읽는 고양이 ‘서꽁치’ 엄마가 재능과 성공을 결부하는 생각을 염려하듯
다니엘 페나크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지 않을 권리도 주장하며 ‘자유’를 강조하듯
독서는 책 속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이 아닌 ‘책 밖의 삶’을 깨치는 과정이어야

■ 문자와 처음 만나던 경이로운 순간

<책 읽는 고양이 서꽁치>(이경혜, 문학과지성사, 2022)에는 제목처럼 책을 읽을 줄 아는 아기 고양이 서꽁치가 등장한다. 엄마 고양이 서명월로부터 이어받은 능력이다. 시조 할아버지 고양이가 우연히 딱 정확한 양으로 먹은 독풀이 마법을 일으켜 한 세대에 단 한 마리씩 저절로 글 읽는 능력을 갖게 됐다. 한글 공부 없이 하루아침에 줄줄 책을 읽는다는 설정은 동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여서 그러려니 싶었는데 영어, 일어, 스페인어 같은 외국어 또한 저절로 읽을 수 있다니 눈이 반짝 뜨이며 이 고양이가 갑자기 부러워진다.

책 서(書)자를 성으로 삼는 서꽁치는 책을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책 읽는 걸 즐긴다. 독서가 취미인 고양이다. 꽁치는 고향 섬에서 배를 타고 나와 항구의 서점과 도서관에서 책장 빼곡하게 들어찬 책을 마주할 때마다 허겁지겁 책 속으로 빠져든다.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인 꽁치를 먹을 때처럼 허기와 갈증을 채우듯 책을 흡입한다. 책을 찾으려 위험을 무릅쓰고 예전 살던 집으로 가는 길에 꽁치는 생각한다.

“오래 굶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뭐든 먹어야 했는데 예전 집에 있던 책들이 눈앞에 생선처럼 아른거렸어. 그 집에 살 때는 그게 책인지 뭔지도 몰랐는데 이젠 진짜 펄떡펄떡 뛰는 꽁치를 봤을 때처럼 그것들이 읽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다니!”(<책 읽는 고양이 서꽁치>, 103면)

어린이들도 꽁치처럼 글자를 깨치거나 책을 읽고 싶어 안달하는 시기가 저마다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양육의 수많은 순간을 거의 잊은 듯하지만 아이가 한글을 읽는다는 걸 알게 된 순간만큼은 또렷이 남아있다. 뒷자리 카시트에 앉아 차를 타고 가던 어린이가 ‘약… 약… 약…’이라길래 왜 의미 없는 소리를 반복하나 뒤돌아보았더니 약국마다 크고 붉은 글씨로 적힌 ‘약’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날이 기억난다. 아직 작은 어린이가 눈앞의 모든 글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도 되는 양 또박또박 큰 소리로 읽는 걸 보면 인간이 문자를 깨달으며 느끼는 경이로움이 대단하구나 싶다. 게다가 어린이들은 얼마나 줄기차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지. 책을 읽어주는 시간에 먼저 그만 읽자고 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똑같은 책을 수십 번 읽어주거나 혹은 한자리에서 수십 권의 책을 읽어주다가 어른이 먼저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지겹고 힘든 내색을 가능한 한 숨기면서 말이다.

■ 마음대로 읽을 권리

그러던 어린이들이 어느 날 책 읽기를 더 이상 재미있어 하지 않으며 그만두기 시작한다. 자발적인 놀이였던 독서를 의무적인 숙제처럼 여긴다. 대체 왜 어느 시점에 어린이는 독서를 일거리처럼 여길까. 옛날 어린이의 바람직한 성장을 방해하는 원흉이 비디오 게임이었듯 오늘날 원흉인 스마트폰 때문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린이에게 책 읽는 것을 권유하고 가르치는 어른의 태도나 방법에 먼저 돌아볼 부분이 있겠다.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는 이유에는 아마 이런 목적이 있을 테다. 지식과 교양을 쌓기 위해, 공부를 잘하기 위해, 호기심과 상상력을 일깨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생각을 나누기 위해, 비판 정신을 기르기 위해. 다 훌륭하고 꼭 필요한 목적이지만 그래서 좀 부담스럽기도 하다. 독서가 마냥 놀이이던 유아 시기처럼 독서가 목적이나 실용과 관계없는 일로 느껴질 때 오히려 독서에 몰입하고, 목적이 아닌 결과로써 저 목적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26년간 중등 교사로 일했던 프랑스의 유명 작가 다니엘 페나크(Daniel Pennac)는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 2018)에서 숙제로 주어지는 독서가 아닌 즐거운 독서를 강조한다. 소설은 이야기고 인간은 언제나 이야기에 굶주려 하기에 소설은 그저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고양이 서꽁치가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인 꽁치를 먹어대듯 책을 읽는 것처럼.

다니엘 페나크는 “독서 지도를 한다면서 청소년들에게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던” 모든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에 관한 그 권리들의 목록은 이러하다. 책을 읽지 않을 권리,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소리 내서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등이다. 곰곰이 따져보니 어른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책을 읽으면서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이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권장 도서 목록에서 골라, 모르는 낱말을 찾아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문장에 주의를 기울여, 인물·사건·배경 정도는 정확히 요약할 정도로 읽은 후, 다양한 독후 활동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면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어른도 책 한 권 읽는 일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테니 어린이의 독서에도 좀 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지 30년이 지났다. 예전에는 <소설처럼>의 주장이 다소 이상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오늘날 변화한 미디어 환경에서는 어린이, 청소년 독자에게 더 많은 권리와 자유를 허용하자는 태도가 오히려 더 현실적인 접근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 활자 시대를 지나 문자와 영상이 공존하는 시대에 더 이상 독서는 당위성만으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독서는 학교에서 수행하는 학습 영역에 해당하는 일로만 여겨지고, 어린이와 청소년은 책이 아닌 웹문서와 동영상에서 지식과 정보를 찾는다. 독서 교육과 문학 교육의 방향성에 대해 “교육의 과제란 본래 아이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고 문학을 일깨워줌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자유롭게 ‘책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소설처럼>, 195면)는 제안을 돌아보고 우선해야 할 시대이다.

책 읽는 고양이 서꽁치 이경혜 지음 | 이은경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 책에 대한 책

우리나라 성인의 독서량은 적은 편이고 갈수록 적어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최소한 어린이에게는 독서가 꾸준히 장려되고 있다. 책에 대한 책들로 책 읽기가 권장되기도 한다. 아동문학 작품 중에는 책이나 도서관을 소재나 배경으로 하는 책이 하나의 주요 테마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많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소금과 후추를 뿌려 꿀꺽 먹어치우거나, 책 속으로 들어가 모험을 하거나, 한 작가의 전작을 읽어나가며 성장의 계기를 발견하거나, 책이 가득한 도서관이나 책이 만들어지는 현장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이야기가 꾸준히 출간된다. 책에 대한 책은 어린이에게 독서를 장려하려는 어른들의 목적에 힘입어 좀 더 주목받고, 좀 더 잘 팔리기도 한다. 하지만 책에 대한 책이 어른인 내게는 갈수록 큰 매력이 없어 보였다. 그냥 재미있는 책을 쓰면 되지 굳이 책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책으로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책 읽는 고양이 서꽁치> 역시 그런 책이려니 했다. 고양이가 책을 읽게 되면서 일어나는 모험을 아무리 재미있게 이야기해봐야 결론에 가서는 ‘여러분, 독서는 이렇게 좋은 일이니 책을 읽으세요’라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전 책들과는 다른 이야기로 흘러가는 걸 흥미롭게 따라가며, 읽지 않은 책을 두고는 늘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이 책은, 꽁치가 생선만큼 책을 좋아해서 책 읽는 시간을 가장 행복해하는 걸 보여주면서도 책이 꽁치의 삶을 행복하게만 만들어 주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꽁치가 책 읽을 줄 아는 고양이라는 걸 알게 된 엄마는 꽁치의 동생에게 “책 읽는 능력이 꼭 좋은 건 아냐. 꽁치는 행운아지만 동시에 불운한 고양이일 수도 있어. (중략) 괴롭고 힘든 일이 잘 생긴다는 뜻이야”(<책 읽는 고양이 서꽁치>, 44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꽁치에게는 ‘재능을 쓰며 행복하게 살아라’라고 말하는 대신 ‘재능을 행복하게 쓰며 살아라’라고 축복한다. 재능과 행복을 곧장 연결시키지 않는 생각은 사람이 아닌 고양이가 책을 읽으며 일어나는 위험을 이야기하느라 생겨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재능에 대한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견해 같지도 않다. 여기서는 책이 학업 성적과, 학업 성적이 능력과, 능력이 성공과, 성공이 행복과 자동 연결되는 시대에 대한 비판적 감각을 읽을 수 있다. 꽁치는 새끼 가을이가 자신처럼 책 읽는 고양이인지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달음질치다 ‘아버지의 마음’을 되찾고 가을이가 더 자란 다음에 물어보고 결정하기로 다짐한다. 어린이의 재능에 조바심치며 앞날을 나서서 결정짓지 않는 어른의 마음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아무것도 없는 책 레미 쿠르종 지음 | 이성엽 옮김 | 주니어RHK | 2021년

책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책을 버리고 책 밖의 삶으로 나아가는 이 이야기는 그림책 <아무것도 없는 책>(레미 쿠르종, 이성엽 옮김, 주니어RHK, 2021)을 떠올리게 한다. 책장에 책이 가득하고 소파까지 책으로 만들어진 서재에서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이른다.

“알리시아, 이제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아서 네 곁에 있을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단다. 그래서 너한테 미리 선물을 주고 싶은데…. 저 서랍을 열어보렴.” 서랍에는 ‘아무것도 없는 책’이라는 제목의 책이 한 권 있다. 책에는 아무 글자나 그림이 없지만 할아버지는 그게 공책이나 수첩이 아닌 책이라고 한다. 책을 펼칠 때마다 생각이 가득 떠오를 거라며. 알리시아는 이 책에 자기만의 아이디어를 적어 나가고 결국 그것은 알리시아의 책이 되고, 인생이 된다.

수많은 책 중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주신 단 한 권의 책. 책 속에 빼곡하게 적힌 지식과 정보의 습득이 독서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이 책은 말한다. 책에 비추어 자신을 길어내는 일이 마지막 목표라고. ‘아무것도 없는 책’의 역설은 바로 그것이다.

하얀 밤의 고양이 주애령 지음 | 김유진 그림 | 노란상상 | 2022년

■ 놀이이자 위로인 책

<책 읽는 고양이 서꽁치>처럼 책과 고양이가 함께 등장하는 그림책인 <하얀 밤의 고양이>(주애령, 노란상상, 2022)도 나란히 읽어볼 수 있겠다. 엄마와 둘이 사는 아연이에게 동네의 작은도서관은 집보다 소중한 보금자리다.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엄마가 아연이를 돌봐주지 못하는 시간에 도서관은 집이 되고, 그림책은 밥이 된다. 도서관의 도어록 비밀번호를 우연히 알게 된 아연이는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기 시작하다 엄마가 일하느라 들어오지 못할 때 밤을 새우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도서관 책장 사이에서 나타난 눈부시게 흰 고양이와 아기 고양이들을 만나는데…. 이 그림책은 가난하고 외로운 어린이에게 책이 유일한 놀이이자 위로가 되는 슬픔과 희망을 말한다.

물론 실제로 많은 어린이들의 안식처는 책보다는 스마트폰에서 만나는 유튜브 등의 콘텐츠겠다. 그처럼 구텐베르크 활자 시대가 끝나가고 이제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자와 영상은 인간의 사고와 감각을 구성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문자로만 가능하거나 효율성을 지니는 추상적 사유와 그 역량의 영역이 있다. 책이 줄 수 있는 놀이와 위안 역시 남아있다. 그러기에 오늘날 별로 중요할 것 같지 않은 문해력이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의 우위를 좌우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 때문에 사교육을 많이 하는 어린이들은 여전히 체계적인 독서나 글쓰기 사교육을 받는다고도 한다.

지금은 모든 어린이가 문자를 읽을 수 있지만 문자를 제대로 혹은 고도로 읽을 수 있는지 여부는 과거 지식 교육 시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교육의 평등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문해력 교육을 포함해 체계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에서 소외된 채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준의 영상 콘텐츠에 빠져드는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책이 놀이이자 위안의 방편이 될 수 있을까. 책 읽는 고양이 꽁치에게라도 그 비결을 물어보고 싶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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