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120조원에 워너 브라더스 인수... 영화 시장 대격변

넷플릭스가 스트리밍 시장에서 손에 꼽을 빅딜을 성공시켰다. 넷플릭스는 현지시각으로 5일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WBD)의 스튜디오/스트리밍 부문을 827억 달러(한화 약 121조 원)에 인수한다고 밝혔다. 양사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거래를 승인했고, 인수 무산 시 58억 달러 규모의 파기 수수료 조항까지 넣었다. 사실상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인수를 성공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이번 인수 대상은 워너 브라더스 영화, TV 스튜디오를 비롯해 HBO, HBO 맥스를 포함한 '스트리밍+스튜디오' 전체다. CNN,TNT 스포츠,유럽 지상파,디스커버리+ 등이 담긴 디스커버리 글로벌은 별도 상장사로 분할된다. 넷플릭스는 성장이 더딘 사업 부문을 따로 떼어낸 워너 브라더스의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WBD 역시 장기적인 부채를 덜어내고, 콘텐츠 생산에 집중할 수 있는 모양새가 됐다.

테드 사란도스, 그렉 피터스 넷플릭스 공동 CEO는 "세계 최고의 스토리텔링 회사 두 곳이 뭉쳤다"고 이번 인수 의의를 강조했다. 데이비드 자슬라브 WBD CEO는 "다음 100년의 이야기 방식을 정의하겠다"고 넷플릭스 측에 화답했다. 하지만 업계는 '스토리텔링의 미래 정의'만큼이나 부작용에도 주목하고 있다.

스트리밍 1위 기업의 사업 확장은 기회의 확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의 집중과 이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묘한 이야기 + 해리포터
한 지붕에 모이는 콘텐츠, 영화 산업은 우려
넷플릭스의 WBD 인수는 콘텐츠 측면에서 전에 없던 시너지를 낼 것으로 보인다. '기묘한 이야기', '오징어 게임', '웬즈데이', '원피스' 등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간판 시리즈와 라이선스 기반 오리지널 시리즈에 워너 브라더스와 HBO의 핵심 IP인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영화 시리즈, '왕좌의 게임', '빅뱅 이론', 그리고 DC 유니버스가 한 지붕 아래 모이게 된다.

여기에 넷플릭스는 워너의 극장용 영화와 HBO/HBO 맥스의 시리즈를 자사 서비스에 등록할 수 있게 됐다. 기존 작품이 넷플릭스를 통해 등록됐을 때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히 재소비됐기에 이를 기반으로 콘텐츠의 스핀오프/리부트 등 2차, 3차 활용까지 한 번에 노릴 수 있게 됐다. 특히 넷플릭스 오리지널과 워너/HBO의 라이브러리가 더해져 소비자를 묶어두는 락인 효과는 더욱 탄탄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극장 업계의 반발이 이번 인수 발표 직후 가장 빠르게 터져나왔다. 글로벌 극장사업자대표 단체 시네마 유나이티드는 성명을 통해 이번 거래를 "전 세계 상영 비즈니스에 대한 전례 없는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워너 브라더스 영화들이 넷플릭스가 추진하는 제한적 극장 개봉으로 전환될 경우, 미국 국내 박스오피스의 최대 25%가 한 번에 증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넷플릭스는 공식 발표 역시 불안을 키웠다. 넷플릭스는 극장 개봉 등 워너 브라더스의 기존 운영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동시에 소비자 친화적인 시청 옵션 등을 언급하며 기존보다 더 빠른 스트리밍 서비스로의 이동을 우려케했다.

시네마 유나이티드는 넷플릭스가 현재 자사 영화의 극장 상영을 일부 작품에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보통 17일 정도만 상영된 뒤 스트리밍된다며 이 모델이 워너 브라더스 전체 라인업에 적용되고, HBO 타이틀까지 맞물릴 경우 극장-배급-부가 판권 계약 구조까지 연쇄적으로 흔들린다고 지적했다.

미국감독조합도 인수 발표 이후 우려를 표했다. 조합은 성명을 통해 "창의성을 촉진하고 인재를 둘러싼 진정한 경쟁을 장려하는 활기찬 산업이, 감독과 팀의 커리어와 창작권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플랫폼과 스튜디오가 통합되면서 작품 통제력을 가진 슈퍼 '갑'이 탄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너무 커지는 넷플릭스
시장 경쟁력 약화,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나
다양한 콘텐츠를 한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만날 수 있지만, 반대로 시장 경쟁력 약화 역시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WBD는 HBO 맥스라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넷플릭스와 경쟁하는 동시에, 넷플릭스의 중요한 콘텐츠 공급자 역할을 했다. WBD급 대형 스튜디오가 넷플릭스와 가격과 서비스 조건을 두고 협상해오던 틀이 무너진 만큼, 다른 공급업체들이 넷플릭스와의 협상력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여기에 시장 경쟁 축소에 따른 구독료 인상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스트리밍 시장은 오랜기간 가격 인상 압력에 시달려왔다. 미국 내 상위 10개 유료 스트리밍 서비스의 평균 가격은 지난해보다 12% 상승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시장의 치열한 경쟁 탓에 회사들이 가격 인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 세계 3억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한 넷플릭스가 워너 브라더스의 콘텐츠까지 품으며 가격 인상에 대한 걸림돌을 제거했다는 분석도 이어진다.

가격 인상 요인은 또 있다. 넷플릭스의 인수 발표로 이미 미국 내 시장에서 생존 경쟁을 이어가는 컴캐스트와 파라마운트가 자사의 스트리밍 서비스 피콕과 파라마운트+를 통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넷플릭스의 시장 지위에 대응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생존형 합병에 시장 내 영향력을 가진 플랫폼 수는 더 줄어드는 상황이다. 특히 플랫폼 경쟁이 적어지면 가격 인상과 요금제의 다양화는 이전보다 더 쉬워질 전망이다.

요금제의 다양화는 광고를 포함하거나 저가 요금제의 추가로 시작되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리미엄 무광고 요금제와 인기 IP가 묶인 고등급 상품 가격의 인상 여지를 준다는 우려가 있다.

반독점 우려?
승인 가능성 있지만 구제조치에 초점
시장 지배력 우려가 커지는 만큼, 반독점 규제 당국의 승인을 얻을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앞서 713억 달러에 폭스를 인수한 디즈니 역시 인수합병에 많은 우려가 이어졌다. 당시에도 여러 미디어 그룹의 대응적 인수 논의가 이어졌고, 규제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미국과 EU 규제 당국은 더 큰 규모의 인수 합병, 나아가 스트리밍 1위 서비스 업체의 사업 확장을 더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가 인수 건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보도 역시 나왔다.

반면 거래 자체는 승인될 거라는 시각도 많다. 순수 미국 기업 간 합병에 EU 규제 당국이 금지 선언을 내릴 경우 근래 크게 확대된 지정학적 논란을 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또한, EU가 과거에도 이런 인수 합병 자체를 막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 역시 인수 가능성을 높이는 신호로 꼽힌다.

대신 인수 과정에서의 일부 구제조치 부과 가능성이 크게 점쳐진다. 워너 브라더스의 콘텐츠를 경쟁 플랫폼에서 서비스할 수 있도록 하거나, 해리포터, DC 유니버스 작품 등 인기 IP의 넷플릭스 독점 제공 제한, 콘텐츠 제작사간의 거래 조건 공정성 유지 의무 부과 등이 그 예로 언급되고 있다.

넷플릭스와 워너 브라더스의 합병 형태는 향후 이어질 규제 당국의 심사 결과를 통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