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자
마운드 위 투수가 빛나는 순간, 그 뒤에는 묵묵히 공을 받아 주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불펜에서 하루에도 수백 개의 공을 받고, 공 끝의 사소한 움직임까지 점검하며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해낸다.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시합을 지켜보는 위치. 그 자리에 있기까지 그는 경기장을 한 번 떠나야 했다. 육성선수로 시작한 프로 생활에서 방출의 아픔을 겪었고, 다시 야구장에 돌아오기까지 큰 용기를 내야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의 배경에 있던 건 순수한 아이처럼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지현은 묵묵히 공을 받으며 조용히 팀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 그의 야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Photographer Mino Hwang Editor Eunbin Yang Location Daejeon Hanwha Life Ballpark

반갑습니다! <더그아웃 매거진>과는 처음이에요. 불펜 포수라는 역할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 부탁해요. (6월 6일 인터뷰)
불펜 포수의 가장 큰 업무는 투수들의 몸 푸는 과정을 돕는 일이에요. 시합 전에 선수들과 함께 캐치볼도 하고, 경기 중에는 선발 투수와 불펜 투수들의 공을 받으면서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것을 돕고 있어요.
시합 전후로도 할 일이 많아서 무척 바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루를 보내나요?
홈 경기가 있는 날엔 선수들보다 한 시간 반 정도 일찍 출근해서 몸 푸는 환경을 만들어요. 훈련이 시작되면 운동을 보조하는데, 주로 투수들의 피칭을 돕죠. 경기 시작 30분 전쯤부터는 선발 투수들이 몸을 풀고 등판을 준비하거든요. 그때부터는 불펜에서 본격적으로 공을 받습니다. 경기 후에는 추가 훈련을 하려는 선수들의 보조 역할도 하고 있어요.
#이제는 이글스맨
이번 시즌부터 한화 이글스에 합류하게 됐어요. 입단하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나요?
작년까지 육성선수로 있던 SSG 랜더스에서 방출된 후에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어요. 리틀야구단에서 잠깐 코치 생활도 했고요. 사실 처음에 SSG 측에서 불펜 포수를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해 주셨는데, 다른 쪽 진로도 고려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정중히 거절했거든요. 그 후에 다양한 길을 열어두고 고민하다가, 한화 측에서도 연락을 주셨고 (김)서현이도 한 팀에서 생활하면 든든할 것 같다고 말해 주더라고요. 부모님께서도 서현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지 않겠냐고 하셔서 한화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투수들의 공을 직접 받으며 컨디션 파악이 가능하겠어요. 불펜 피칭 때 투수의 당일 컨디션을 파악하는 방법이 있나요?
투수들의 컨디션을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기준은 공에서 느껴지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미트에 공이 꽂힐 때 느껴지는 힘의 정도가 보통은 컨디션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더라고요.
컨디션이 별로인 투수의 공도 받아야 하잖아요. 그런 투수의 멘탈을 케어해 주는 본인만의 비법이 있어요?
우선 부정적인 피드백은 최대한 피하는 편입니다. 사실 컨디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공을 직접 던지는 투수 본인이거든요. 부족한 부분은 이미 공을 뿌리는 과정에서 느끼기 때문에, 되도록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서 말하고 있어요. 또 투수들이 가진 특징이나 성격이 각각 다르다 보니 개개인이 가지는 습관을 미리 기억해 두게 됐어요. 투수에 따라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그런 부분을 미리 고려하는 편입니다.
평소 텐션이 남들보다 높은 투수가 있나요?
경기장에서는 다들 진중한 모습을 보이지만, 평소 성격을 보면 (코디) 폰세와 (라이언) 와이스의 텐션이 정말 높아요. 특히 와이스는 대부분의 불펜 피칭을 저랑 하거든요. 그래서 대화도 자주 하고 장난도 많이 칩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 와서 툭툭 치기도 하고, 농담도 하는 식으로요.
직접 공을 받아 본 입장에서, 가장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는 누구인가요?
캐치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폰세의 공이 정말 좋아요. 스프링캠프 때부터 지금까지 공을 받으면서 컨디션이 별로라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항상 좋고요. 최근에는 서현이 공에도 힘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동욱이가 최근에 정말 좋아졌어요. 이전보다 직구에 힘도 붙었고, 변화구가 움직이는 각도 예리해져서 성장이 기대되는 투수입니다.
하루에 수백 개의 공을 받고 있잖아요.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선수 인생의 대부분을 포수로 보내기도 했고, 오랜 시간 공을 받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크게 힘들다는 느낌은 받지 않아요. 물론 체력적으로 부담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공을 받으면서 중간중간 휴식도 취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그리고 프로들의 공을 받다 보니 힘듦보다는 재미가 더 커요.
불펜 포수로서 가장 뿌듯함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제가 공을 받은 투수가 마운드에서 이닝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때 가장 보람차요. 무실점으로 이닝을 막고 내려오는 투수를 보면 ‘내가 몸 푸는 걸 잘 도와줬구나!’라는 마음이 들어서 뿌듯합니다.

#둘도 없는 형제
많은 팬이 김서현과 김지현을 함께 기억하잖아요. 동생으로서의 김서현은 어떤 사람인가요?
정말 어려운 질문이네요… (고민) 서현이는 알아갈 부분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서현이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었는데, 팀에서는 말도 많고 장난기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서현이에게 이런 면도 있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저희가 6살 터울 형제다 보니 예전에 동생이 저를 좀 무서워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한화에 합류할 때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 걱정했는데, 의외로 새로운 모습들을 알아가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불펜에서 김서현의 공을 받을 때 감회가 남다를 듯해요.
사실 제가 한화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서현이의 공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포수고 동생은 투수니까 서현이가 공을 던지는 걸 받는 상상은 했었는데, 막상 실제로 그렇게 되니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최근에 서현이가 정말 좋은 공을 던지고 있다 보니, 동생이 성장했다는 걸 직접 느낄 수 있어서 더 기쁩니다.
동생과 야구 이야기도 자주 나누는 편인가요?
피칭 내용이나 밸런스처럼 디테일한 측면에서 얘기를 주로 나누는 편이에요. 시합이 끝나고 나면 서현이가 항상 제게 불펜 피칭은 괜찮았는지, 마운드 위에서 밸런스나 구위는 어때 보였는지를 물어봐요. 그럼 제가 지켜보고 느낀 내용을 자세히 얘기해 줍니다.
김서현이 시즌을 앞두고 등번호를 44번으로 바꿨잖아요. 그 소식을 처음 듣고 어땠어요?
처음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지난 비시즌에 열린 프리미어12에서부터 제 등번호를 달고 뛰었는데, 직접 들은 게 아니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거든요. 사실 팀에 합류해서 같이 생활하기 전까지는 그 정도로 형을 어려워하는 동생이었어요. 어머니께 이유를 여쭤 봤는데, 서현이가 제 방출 소식을 듣고 너무 아쉬움이 커서 저와 함께 뛴다는 생각으로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거예요. 그 뒤에 서현이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왜 자기 말을 못 믿냐면서 진짜라고 하더라고요. 장난 섞인 말투로 대화하긴 했지만, 내심 감동했어요.
어렸을 때 태권도를 배운 김서현에게 발차기를 맞은 전적도 있다고 들었는데, 당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기억나요?
그날 부모님께서 밖에 일을 보러 나가셔서 저랑 서현이, 그리고 누나가 집에 있었는데요. 서현이가 어릴 때였는데, 같이 장난을 치다가 갑자기 저한테 싸우자는 거예요. 먼저 발차기를 하더니, 자기가 태권도를 배워서 잘 싸울 자신이 있으니까 한번 대결을 해 보자는데 6살이나 어린 애가 그러니까 귀엽더라고요. 제가 때리진 않았고, 팔로 머리를 잡으면서 하지 말라고 툭 밀쳤는데 갑자기 울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하더라고요. (황당) 전화로 형한테 맞았다고 일러서, 졸지에 혼났죠.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6살이나 어린 동생을 때린 형이 된 거예요… 엄청 억울했지만 참았어요.
어릴 땐 자주 다퉜어도, 지금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된 듯해요. 동생과 같은 팀에 있어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거리감이 줄어들었다는 게 좋죠.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다 보니 얘기도 자주 하면서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서현이가 제게 의지할 수 있고, 가까이에서 도움과 조언을 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은 점입니다.
김지현에게 김서현이란?
‘어렸을 때는 마냥 아기 같았지만, 성숙하게 성장해 버린 동생’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아직 행동은 어려 보이는 면이 있긴 한데, 고민을 해결하려 노력하고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제법 성숙해졌다는 걸 느껴요. 비슷한 결의 질문을 해도 예전보다 수준이 높아졌더라고요. (웃음) 함께 팀 생활을 하기 전에는 진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눈 기억이 많지 않거든요. 함께 지내면서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 진중한 면들도 봐서 신기했어요. 말 안 듣고 까부는 동생인 줄만 알았는데, 이젠 제법 어른답게 행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가족이 있었기에
평소 쉬는 날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요?
불펜 포수들은 쉬는 날이 고정돼 있지는 않아서 휴식의 개념도 모호한 편입니다. 시합이 없는 월요일에도 다음 날에 선발 등판을 앞둔 투수들이 훈련을 소화하는 경우가 많아서 출근할 때도 있고요. 간혹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에는 침대에서 안 나오고, 누워서 드라마를 봐요. (최근에 재밌게 본 드라마 중 추천작이 있나요?)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을 최근에 봤는데, 진짜 재밌더라고요. 원정 경기를 다니면서 버스에서도 보고, 쉬는 날에도 계속 봐서 결국 정주행했어요.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스트레스를 푸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나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요. 굳이 뭘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진 않아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시간이 그 스트레스를 해결해 주길 기다립니다. 일상을 잘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괜찮아지더라고요.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대형마트에서 파는 장난감 중에 유아용 방망이랑 공이 있잖아요. 어렸을 때 그걸로 아빠가 던져 주시는 공을 치면서 놀았어요. 조금 크고 나니까 아빠가 야구를 해 보겠냐고 권유해 주시더라고요. 집에서 장난감 방망이를 갖고 재밌게 놀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경기장에도 한번 가 보겠다고 했죠. 그날이 평생 야구를 놓지 못하게 만든 계기가 됐네요.
육성선수로 입단 후 방출의 아픔을 겪기도 했잖아요. 그 시기를 견디게 해 준 가장 큰 힘은 뭐였어요?
사실 제 인생에는 우여곡절이 정말 많았어요. 두 번의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럴 때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부모님이 위로해 주시고, 격려도 해 주셔서 견딜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 때 도전했던 드래프트에서 입단에 실패했을 때도, 부모님은 묵묵히 저를 지지해 주셨어요. 빨리 다른 길을 알아보라거나, 뭐라도 해 보라고 말씀하실 법도 하잖아요. 근데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으니 이젠 좀 쉬면서 천천히 고민해 보라고 기다려 주셨어요. 그 뒤에 사회복무요원으로 군 생활을 하던 시기에는 생활 체육 야구를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서 경기장에 다녔거든요. 그라운드를 밟으니 다시 야구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께 고민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부모님도 제가 야구에 좀 더 도전해 봤으면 좋겠다고 해 주셨어요. (이 자리를 빌려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해 볼까요?) 저 이런 거 진짜 못 하는데… (비장) 부모님, 힘들 때마다 함께 슬퍼해 주시고 언제나 응원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구를 포기할 수도 있던 상황에서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왔잖아요.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세워둔 로드맵이 있나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경기장에서 일하고 있고, 한화 이글스를 응원해 주시는 팬들을 매일 보잖아요. 열정적인 팬분들과 그 응원을 받으면서 뛰는 선수들을 보면서 ‘나도 경기장에 나가고 싶다’라는 마음도 들고요. 서현이랑 같이 배터리를 이뤄 보고 싶은 마음도 커서 여러 방면으로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뭔가 확실하게 정한 건 없지만, 우선 제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진로도 고민해 보려고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김지현에게 야구란 무슨 의미인가요?
‘제게 많은 시련과 아픔을 줬지만, 쉽게 놓을 수 없는 존재’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저는 야구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야구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너무 큰 부분이 돼 버렸어요. 운동을 쉬던 시절에 ‘경기는 절대 안 봐야지’라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제 손이 스포츠 채널을 틀고 있더라고요. 제 삶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어요.
불펜 포수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을 위해 헌신하는 역할이잖아요. 이런 이유로 힘든 점은 없나요?
선수단이나, 함께 불펜 포수로 일하고 있는 형들도 너무 잘 챙겨 줘서 좋은 분위기 속에 일하고 있거든요. 큰 고충은 없어요. 팀 관계자분들도 저를 비롯한 경기 진행 스태프들이 잘 지낼 수 있게끔 물심양면 신경 써 주시고 편한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요.
불펜 포수끼리는 서로 어떻게 힘이 돼 주고 있나요?
팀원 모두가 가까운 사이여야 조직이 큰 문제 없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해요. 이글스 불펜 포수진은 대화도 많이 하고, 각자 힘든 상황일 때 서로의 일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끈끈한 사이입니다.
소중한 동료들에게도 한마디 남겨볼까요?
항상 내 고민을 들어주고 감정 표현도 잘 받아 줘서 고마워. 언제나 살뜰하게 챙겨 주고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점도 정말 힘이 돼. 앞으로 더 잘 지내 보자!
마지막으로 한화 이글스와 김지현을 응원해 주시는 팬분들께 인사하면서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언제나 큰 응원을 보내 주시는 이글스 팬분들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요. 제가 살면서 이렇게 큰 관심과 응원을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엄청난 격려를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이 응원에 보답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5년 171호 (7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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