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없었다면 포항제철은 없습니다” 포스코 초대 사장 박태준

이한수 기자 2025. 12. 1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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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11년 12월 13일 84세
박태준 별세. 2011년 12월 14일자 1면.

‘철인(鐵人) 잠들다’.

조선일보 2011년 12월 14일 자 1면 별세 기사 제목이다. 부제는 ‘제철소 지으며 마신 모래의 상흔 때문인가… 박태준, 폐 질환 별세’였다. 관련 기사는 4페이지에 걸쳐 실렸다. 10면 ‘84년 뜨거운 인생’, 11면 ‘철강왕의 소대장 정신’, 12면 ‘빈소 스케치’, 34면 ‘정준양 포스코 회장 기고’였다.

포항제철(포스코) 사장·회장을 지낸 박태준(1927~2011)은 정치인이기도 했다. 11·13·14·15대 국회의원, 여·야 정당 대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화려한 정치 이력에도 정치인 행적 관련 기사는 미니박스 한 건뿐이었다. 그것도 ‘철강 인생에 하나의 오점… 정치 입문’이란 제목을 달았다.

2011년 12월 14일자 A10면.
2011년 12월 14일자 A11면.

박태준은 1968년 4월 1일 설립한 포항제철(포스코) 초대 사장으로 ‘철강 한국’을 일으킨 주역이다. 1970년 4월 포항에 제철소를 짓기 시작해 1973년 6월 첫 쇳물을 뽑아냈다. 1970년대 이후 선박·자동차·건설·기계 같은 중공업의 융성은 이때 ‘산업의 쌀’ 철강을 생산한 덕분이었다. 포스코는 2024년 조강 생산 4197만톤 세계 4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무(無)에서 창조한 기적이었다. 세계은행과 국제 차관단은 “한국이 철강 산업을 하는 건 시기상조”라며 자금 지원을 하지 않았다. 제철소 건립은 좌초 위기에 빠졌다. 박태준은 한·일 국교 정상화로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소 건립에 사용한다는 계획을 건의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대일 청구권 자금 8000억원 중 1200억원을 제철소 건립에 투입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의 3배 규모였다.

첫 쇳물 뽑고 1년 후인 1974년 7월 ‘세계 무대 진출한 ‘공업 한국’ 기사는 자긍심이 묻어난다. ‘포항종합제철 준공 한 돌/ 첫해 232억 흑자, 21개국 수출’ 제목을 달았다. 박태준은 인터뷰에서 “공장 가동까지 3번 눈물을 흘렸다”고 고난을 회고하고 각오를 다졌다.

1974년 7월 3일자 3면.

“이제 기존 공장은 궤도에 오른 셈이니까 내후년까지 260만톤으로 늘리고 3차로 850만톤까지 늘려야겠습니다. 모든 일을 정성을 들여서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회사만은 민족 회사로 고수하고 키워갈 각오입니다.”(1974년 7월 3일 자 3면)

박태준은 포항제철 설립 10주년을 맞은 1978년 4월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를 만나 대담했다. ‘철강 한국… 집념의 10년’이란 제목에서 성공 신화를 쓴 긍지가 읽힌다. ‘세계의 비관 씻어낸 ‘예외 성장’/ 차관단도 세은(世銀)도 “투자 못하겠다”/ 두 차례 연기… 규모 늘려 ‘무모한 삽질’/ 81년 6월엔 세계 12위 제철소로’ 부제를 달았다.

박태준은 “오늘과 같은 기적적 성과가 이룩된 까닭을 무엇으로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해방 후 우리나라는 돈도 없는데 묘하게도 학교가 제일 먼저 생겼어요”라고 운을 뗐다.

“우리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 자원이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본적 요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바로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수한 사람을 골라낼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례를 들면 소위 이공계통의 우수한 사람을 골라낼 수 있는 여건이라든지, 기계나 전기·토목·야금(冶金)을 잘 아는 사람을 얻을 수 있는 여건, 이런 것이 결국 일을 성취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1978년 4월 16일자 3면.

또 하나의 성공 요인으로 국민 개병제를 꼽았다.

“우리나라의 징병 제도인 개병(皆兵) 제도 자체가 오늘날 공업화를 지향하는 경제 각 분야에 플러스가 되는 방향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1978년 4월 16일 자 3면)

당시 군대가 외국의 앞선 기술을 받아들이고 근면한 노동을 배우는 학교 역할을 한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박태준은 육군 소장 출신이지만 선비 같은 풍모였다고 김동길 교수는 회고했다.

2018년 3월 17일자 B2면.

“본디 군인으로 시작한 인물이지만 군인 같지 않고 선비 같았다. 강철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격은 부드러웠다. 누구에게도 교만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남들을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는 겸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김 교수가 박태준에게 물었다. “박정희의 전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포항제철이 있을까요?” 박태준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포항제철이 없습니다.”(2018년 3월 17일자 B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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