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리가도(고맙습니다), 꼬리아" 동티모르의 각골난망 20년

"꼬리아! 안녕하세요!"
5일 오전 동티모르 오에쿠시(Oecusse)주 빨라반(Palaban) 중학교. 운동장 양 옆으로 길게 줄지어 선 수백 명 학생 사이로, 전통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들이 환영한 특별한 손님들은 19년 전, 동티모르로 파병됐다가 임무 수행 중 순직한 한국군 상록수부대 장병 5명(민병조 중령·박진규 중령·백종훈 병장·김정중 병장·최희 병장)의 가족들이다. 주동티모르한국대사관은 올해 양국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순직 장병 유가족 10명 등을 동티모르에 초청했다.

동티모르는 1999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했지만, 친인도네시아 민병대가 유혈사태를 벌이는 등 혼란을 겪었다. 이후 한국 정부는 UN(국제연합) 요청을 받아들여 상록수부대를 파병했다. 1999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5년간 3천200여 명이 동티모르 라우템주(州) 로스팔로스와 오에쿠시주(州)로 떠나, 지역 재건 지원과 치안 회복, 교육·계몽·의료와 같은 각종 인도적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UN(국제연합) 평화유지군 자격으로 동티모르 오에쿠시에 파병됐던 상록수부대가 동티모르를 떠난 지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오에쿠시 시내를 비롯해 차로 수 시간 떨어진 외곽 지역 어디를 가도 "안녕하세요", "꼬리아?"하며 반갑게 인사말을 건네거나, 한국과 상록수부대와의 인연을 언급하는 현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었다.
동티모르 내 한인들은 "상록수부대가 오래전 동티모르에 뿌린 밀알이, 오늘날 현지에서 활동하는 한인들에게 지금껏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20여 년 전 이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며 헌신한 3천여 명의 상록수부대원들에게 공을 돌렸다.
■ 국경분쟁 조정·치안·교육·문화·의료 지원까지…20년 넘게 상록수부대를 기억하는 사람들

대한민국에 신생 독립국 '동티모르'를 처음 인식시켜준 것이 상록수부대였다면, 동티모르에 '대한민국'을 새긴 것 역시 5년간 8번에 걸쳐 파병돼, 지역민 속에서 동고동락했던 상록수부대였다.
동티모르는 452년간 포르투갈 식민지로 있다가, 1975년 독립하자마자 다시 인도네시아에 강제 병합됐다. 이후 1999년 동티모르 사태를 겪는 등 끈질긴 저항과 UN(국제 연합)의 도움으로, 2002년 비로소 독립국으로 거듭난 신생 국가다.
갓 걸음마를 떼고 있는 동티모르가 설 수 있도록, 상록수부대 장병들은 내전과 갈등으로 상처 입은 동티모르 주민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헌신적인 치안 유지 활동과 봉사를 펼쳤다. 태평양의 푸른 바다와 같이 넓고 깊으며 천사처럼 기쁨과 희망을 주는 파병 활동을 의미하는, 이른바 '블루 엔젤(Blue-Angel·푸른 천사)' 작전이다.

이들은 지역 고아원뿐만 아니라 산악지역에 있는 외진 마을까지 찾아가 의료 서비스, 위생 교육과 이발에서부터 영화 상영과 같은 문화 활동, 농기구 정비, 구호품 전달 등 적극적이고 다양한 대민 지원 활동을 쏟았다. 누런 흙먼지를 마시며 울퉁불퉁한 길을 건너고, 험한 풀숲과 정글을 헤쳤다. 차량으로 오를 수 없는 고지대는 장병들이 수십㎏에 달하는 구호물품을 등에 짊어지고 '걸어 올라가서' 구호품을 전했다.
머리를 제대로 감지 않아 떡이 진 채로, 이가 드글거리는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도중에 이발 기계 날이 나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지만, 현지 주민들의 냄새가 고약한 머리카락을 손수 잘라주고 감겨주면서, 위생교육을 하고 정을 쌓은 이들은 오직 한국에서 온 군인들이었다. 이러한 헌신 덕에 동티모르 오에쿠시에선 '한국에서 온 푸른 천사'들을 만나지 않은 주민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신호등은 고사하고 교통 안내판 하나 없던 지역인 탓에, 상록수부대는 오에쿠시 주요 교차로에 한글과 현지어로 지명을 표기한 도로표지판을 만들어 세우고, 급경사와 낙석 지역 등에도 한국 기준으로 '경고 표지판'을 만들어 설치했다. 차량 통행량이 점차 늘어나는 현지 도로 운전자들에게 꼭 필요한 도로 안전 시설이었다.
문화 생활이라곤 경험해보지 못한 현지 주민들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영화 보는 날'도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 중 하나였다. 매주 목요일 밤마다 상록수부대원들이 VCR을 이용해 영화를 상영했다.
상록수부대 정훈·공보 요원들이 부대 평화유지 활동과 현지 소식 등을 정리해 현지어(떼뚬어)와 영어로 방송 뉴스를 만들어 이를 영화 상영 전 현지인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지역 소식을 전하는 변변한 방송 뉴스 매체 하나 없는 상황 속에서 이 같은 대민 활동 역시 UN(국제연합) 관계자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 '부부싸움' 중재도 "도와줘요, 상록수부대"…현지 주민 절대적 신뢰 얻어
오에쿠시 지역에서 화재나 교통사고가 나거나 응급환자가 발생해도 주민들이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은 현지 행정기관이 아닌 '상록수부대'였다. 여기에 각종 도난 신고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부부 싸움 해결(?)'까지 위병소를 찾아와 부탁할 정도로, 당시 현지 정부나 UN 경찰보다도 한국군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상록수부대 7진 단장이었던 김영덕 예비역 대령은 "사소한 부분까지 주민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정성을 다해 조치해준 결과였다"고 말했다.
상록수부대는 특히 이 같은 지원 활동이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민들의 자생력을 기르고자, 7진 파견에 들어서는 '블루 엔젤 작전'에 지역 관공서 등 행정 관리, 인권·교육·여성단체 등 국내외 NGO 단체와 독립운동가 등을 동참시켰다. 현지 경찰에게는 순찰과 기초 수사 요령 등도 가르치며, 권위 있게 치안 활동을 할 수 있는 틀을 닦았다. 포르투갈, 영국, 일본 등지에서 온 수많은 학자와 언론인들이 '평화유지 활동의 모델'이라며 찾아와 연구하고 학술지에도 게재할 정도로, 상록수부대의 블루 엔젤 활동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그 명성이 더 컸다.
여기에 한국군의 철수 이후에도 현지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오쿠시 군청의 추천을 받은 현지인 수십 명을 대상으로 발전기와 굴삭기, 페이로더 등 중장비 운전·조작과 정비법을 가르치는 교육 수료 과정을 운영하기도 했다.

■ "상록수부대가 연 '도전 골든벨' 우승 계기…고향에서 의사 됐어요"
상록수부대는 지역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도 가까이 다가갔다. 지역 중·고등학교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상록수부대장배 축구대회뿐만 아니라 '도전 골든벨'에서 착안한 장학퀴즈 대회 등을 마련해 큰 호응을 얻었다.
또 내전으로 교실 대부분이 불타 없어진 탓에, 우기(雨期)가 되면 장대비가 안으로 쏟아지는 학교 건물 안팎을 보수하고, 새 칠판과 지붕을 달아줬다. 바로 옆에 호주군이 더 좋은 자재로 보수해 준 교실 2개 동이 있었지만, 마무리 작업과 정성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고 당시 부대원들은 회상했다.
2003년 1월, 빨라반 중학교에 다녔던 카타리나 아누노(37·2003년 당시 17살) 씨는 그해 추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빨라반 중학교에서 상록수부대 주최로 열린 '도전 골든벨' 퀴즈 대회의 우승자다.

아누노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도 딜리의 고등학교에서 유학한 뒤, 동티모르국립대(UNTL) 의대에 진학했다. 그는 2012년 의대 졸업 후 고향 오에쿠시로 돌아와, 10여 년째 산부인과·소아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아누노 씨는 "당시 500명이 넘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골든벨' 퀴즈 대회에 참가하고, 축구대회도 했다. 우승자는 학용품과 신발, 장학금 등을 상품으로 받았다"며 "'골든벨'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의대 진학을 결심하게 됐다. 상록수 부대원들이 오에쿠시에 와서 여러 행사를 열어주셔서 정말 즐겁고 감사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2002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상록수부대장이었던 김영덕 예비역 대령은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대령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신생 독립국이다 보니 청소년들의 놀이 문화가 별로 없는 데에서 착안한 행사였는데, 동티모르 교육계도 학생들에게도 이 같은 교육문화 행사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학생과 선생님 할 것 없이 다들 즐겁고 기뻐해 줬다"고 말했다.
그는 "행사가 끝난 뒤에도 '다른 친구들도 이 행사를 체험하게 해 달라, 정기적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쇄도했는데, 그해 10월 한국군 철수가 예정돼 있던 터라 약속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아쉬워했다.

상록수부대가 갓 독립국으로 첫발을 뗀 동티모르의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겨주고, 독립의 의미를 일깨워주기 위해 기획한 '나라 사랑 웅변대회', '국토순례 대행진'과 같은 행사도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호평을 얻었다.
상록수부대원이 인솔자로 나선 국토 순례는 학생, 교사, 교육단체 관계자들이 함께 2박 3일간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 국경 116㎞를 직접 돌아보는 프로그램으로, 낮에는 다 같이 국경선을 걷고, 밤에는 함께 머리를 맞대며 동티모르의 장래를 논하는 일정으로 꾸렸다.
이들의 국토 순례 코스에는 독립 운동 당시 순국한 선열들이 묻힌 튜민 묘역을 참배하는 순서도 있었는데, 장래 나라를 이끌어 갈 청소년들에게 '한때 잃어버렸던 나라'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놀이 문화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소풍이나 수학여행과 같은 단체 나들이 문화도 없는 지역 청소년들에게, 이 같은 교육 문화 행사가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2003년 오에쿠시주에서 근무했던 퇴직 외교관 비키 총 씨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국경 출입국 관리소(Checkpoint) 업무를 담당했는데, 한국군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면서 "한국군은 주민들에게 진정으로 다가간(approached to people) 친구와도 같았다. 동티모르 사람들이 한국군 덕분에 안전함을 느꼈다(felt safe)"며 회상했다.
탄 욱 짐(TAN Huck-Gim) 2003년 당시 UN 평화유지군(PKF·Peace Keeping Force) 사령관은 이 같은 한국군 활동에 대해 "오쿠시의 평화뿐만 아니라 오쿠시의 발전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상록수부대의 노력은 동티모르 주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의 모델로서 세계에 빛날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동티모르 역시 4년에 걸쳐 헌신한 상록수부대에 '파병국가 중 최고'라는 '말라이 무띤(다국적군의 왕)'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 한인회 "20년 전 상록수부대가 황무지에 뿌린 밀알에 감사"
동티모르에서 활동하는 한인들은 "20여 년 전 동티모르에서 헌신한 상록수부대의 활동이 지금까지도 한인 사회와 현지인들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며 그 공을 돌리고 있다.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섬 아따우로(Atauro)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선교사 한경훈 목사는 "공항에서 입국 대기를 위해 긴 줄이 서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따로 불러내, 좀 더 빠르게 입국 절차를 밟아줄 정도"라며 "상록수부대, 그리고 이후에 동티모르에 들어와 각종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 코이카(KOICA) 덕분에 이곳 한인들이 그 열매를 따서 먹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재권 동티모르 한인회장은 "20년 전 상록수부대의 활동이 지금까지도 한인들의 사업에 영향을 미칠 정도다. 상록수부대의 노고가 없었다면 한인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상록수부대의 희생과 헌신은 동티모르 어디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상록수부대가 한국에 대한 인식을 심어줬고, 현지인과 한국인들을 맺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재훈 동티모르 한인회 부회장도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우리도 한국처럼 할 수 있다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게 해준 것이 20여 년 전 동티모르에 왔던 상록수부대"라면서 "한국을 존경하게 되면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 한국에서 일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열망도 매우 크다. 근래 많은 나라가 '한류' 열풍으로 한국에 관심이 있는 것과 달리, 동티모르는 20여 년 전 '상록수부대'를 계기로 한국과 연을 맺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티모르에서의 상록수부대 활동은 단순히 '6개월간의 임무 수행'이 아니라,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았던 21세기 첫 신생 독립국 동티모르를 향한 사랑과 헌신이었다.


[연관 기사] 동티모르서 순직 상록수부대 장병 5명, 19년 만에 훈장 받는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526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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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소영 기자 (missionalist@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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