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비적대국"…이란이 먼저 내민 '유화 신호'의 정체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란이 한국을 향해 예상 밖의 메시지를 던졌다. 사이드 쿠제치 주한이란대사는 3월 26일 주한이란대사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비적대적 국가에 해당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는 미국-이란 전쟁 발발 이후 이란이 한국을 '비적대국'으로 명시한 첫 번째 공식 언급이다. 이란 측은 호르무즈 해협이 미국과 그 동맹국을 제외한 '비적대적 선박'의 통과를 허용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어, 한국 선박의 안전 통항 가능성이 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화적 메시지 뒤에는 예상치 못한 조건이 뒤따랐다.

"선박 제원 정보 내놔라"…이란의 요구에 담긴 속내
쿠제치 대사는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국 선박의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위해 "선박 제원 정보를 사전에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이란군과 관계 당국의 조율 및 검토를 거쳐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란 정부·군과 조정이 있어야만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할 수 있고, 사전에 그런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신고를 넘어, 선박 정보와 항로 관련 데이터까지 포함된 리스트 제출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표면적으로는 안전 확보 조치지만, 실제로는 해협을 지나는 선박 흐름 자체를 사전 선별하고 관리하겠다는 통제 의도가 엿보인다.

외교부 "요청받은 바 없다"…한국 정부의 신중한 대응
그러나 한국 외교부는 이란의 선박 정보 요청에 대해 "요청받은 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2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선박에 관해서 통항 문제를 양자적으로 협의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외교부는 한-이란 외교장관 통화 당시 호르무즈 해협에 정박 중인 한국 선박에서 "보급품이 떨어지는 등 인도적 상황이 발생할 경우 신경 써 달라"고 요청한 것이 전부라고 해명했다. 박일 외교부 대변인도 "호르무즈 해협 문제는 미-이란 간 협상 동향, 관련국 입장 및 유엔·IMO 등 국제사회의 논의 등이 복합돼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양측의 엇갈린 발언은 정보 제공을 둘러싼 신경전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기업과 거래하면 통과 불가"…정치화된 통항 기준
이란은 모든 비적대국 선박의 무조건적 통항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쿠제치 대사는 "우리는 전쟁 중이고 미국과 이스라엘 기업들을 제재하는 건 이란의 방어권"이라며 미국과 거래하는 한국 선박의 통행은 제한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에너지 운송 과정에서 미국 자본이 개입된 경우도 포함된다는 의미다. 실제로 GS칼텍스 소유 유조선은 미국 에너지 기업 셰브론이 50%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에쓰오일(S-Oil)의 모기업인 사우디 아람코도 미국 투자를 받은 기업이어서 이들 선박의 통과가 제한될 수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이란 정부는 "침략에 가담한 참여국들의 선박은 비적대적 통항 자격이 없다"는 내용의 서한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국제해사기구(IMO)에 발송했다.

선박 26척·선원 175명 발 묶여…현장의 긴박한 상황
현재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한국 국적 선박 26척과 한국인 선원 175명(외국 국적 선박 탑승 인원 포함)이 발이 묶인 상태다. 이들 선박은 통상 2개월치 식량, 식수, 연료를 싣고 출항하는데, 해양수산부가 24시간 실시간으로 선박 위치와 생필품 공급, 선원 교대 일정 등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해수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선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장 상황은 녹록지 않다. 전정근 HMM 해원노조위원장은 "전쟁 초기에는 육안으로 드론과 미사일이 보일 정도로 긴장감이 높았다"며 "이란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갑판 조명을 끄고 있고, 심한 GPS 교란으로 얕은 물과 부유물을 식별하기 어려워 안전 항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 "26척 통과 방안 찾아라" 지시…정부 입장 변화 조짐
이재명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에 억류된 한국 선박 26척의 탈출 방안을 적극 모색하라고 지시하면서, 기존의 '이란과 개별 협상 불가' 원칙에 변화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해양수산부와 외교부가 서로 협의해 호르무즈의 26척이 통과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정부 관계자는 "그동안은 선사들이 호르무즈 해협에 머무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지만, 지금은 미-이란 종전 논의 등 유동적인 상황이라 선사들의 의견이 달라졌을 수 있다"며 "선사들의 수요와 상황 진전에 따라 이란과의 개별 협의를 하게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 일본, 인도네시아, 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이란과 개별 협상을 통해 선박 통과를 확보한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1일 "유럽이 하게 두자, 한국이 하게 두자"며 호르무즈 해협 문제를 동맹국들에게 떠넘기려는 발언을 한 만큼, 한국 정부의 독자적 판단과 대응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