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구심점없는 잠실 집회…“이번 주말이 분수령될 것 같아요”

이태준 기자 2026. 6. 10. 14:5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30 주축된 잠실 집회…남성 참여자 다수, 10대 모습도 일부 보여 
인쇄 현수막, 피켓 대신…흰 도화지에 직접 손글씨로 개인 생각 작성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 커…스레드·인스타그램 등 SNS로 정보 교환

(시사저널=이태준 기자)

닷새째를 맞은 잠실 집회 현장. 9일 자정 취재진이 올림픽공원역 일대를 찾았을 때 쓰레기가 말끔히 수거·정리돼 있었다. ⓒ시사저널 이태준

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서울시민들의 항의 집회 닷새째, 지도부가 없다. 협의체도 없고, 대변인도 없고, 취재 창구도 없다. 그런데도 9일 밤 올림픽공원역 앞은 여전히 사람들로 채워졌다. 아무도 이끌지 않는 집회가 5일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집회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다 돼 가는데 구심점이 없어요. 솔직히 걱정됩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참여자의 말이었다. 걱정하면서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 집회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밤 11시30분, 역 출구를 나서자 "부정선거 재선거"라는 구호가 먼저 들렸다. 참여자들은 한 군데 모여 있지 않았다. 크게 다섯 무리로 나뉘어 각자의 자리에서 구호를 외쳤다. 한 무리에서는 참여자들이 머리를 숙이고 기독교식 목례를 올리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경찰은 20~30명 안팎이 산발적으로 배치돼 있었다. 자극하거나 제지하기보다 현장을 지켜보는 수준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어서 중장년·노인층은 드물었다. 주축은 20~30대였고, 일부 10대도 눈에 띄었다. 여성 참여자 비율도 상당했다. 30대 시민 한정민씨는 "지난 주말엔 사람이 더 많았다. 오늘이 오히려 적은 것"이라고 했다.

이 집회가 진행되는 방식에는 지침이 없었다. 손에 든 것은 인쇄 현수막이나 정갈한 피켓이 아니었다. 흰 도화지에 손으로 직접 적은 네 가지 구호가 바로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목소리였다.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개표', '수개표'. 정치적 목적성을 띤 조직과의 연계 의혹을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선택이었다. "정치색이 들어가면 집회 취지가 훼손된다"는 인식이 참여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었다.

9일 자정 취재진이 잠실 집회 현장인 올림픽공원역을 찾았을 때, 참가자들이 흰 도화지에 재선거를 촉구하는 문구를 적어 곳곳에 붙여놓은 모습이었다. 당일투표와 현장 수개표를 요구하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시사저널 이태준

낮 참여자-밤 참여자, '순환 근무'하듯 교대

현장 운영도 마찬가지였다. 이름 모를 자원봉사자들이 빵과 물, 초코파이, 피자를 나눠줬다. 취재 중인 기자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배급을 맡은 한 자원봉사자가 피자 한 조각과 사이다 한 캔을 건네며 말했다. "콜라가 다 떨어져서 사이다로 드려요." 집회가 끝난 자리는 참여자들이 직접 치웠다. 강제도, 지시도 없었다. 운영 시간도 자율이었다. 자정에 인원이 가장 많고, 이른 아침 6시까지 이어졌다. 낮 참여자와 밤 참여자가 순환 근무처럼 자연스럽게 교대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돌아가는 구조였다.

한편 내부에서 목소리가 갈리는 지점도 있었다. 성조기를 든 참가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수는 태극기를 들었고 자원봉사자들이 한켠에서 배포하기도 했다. "집회의 순수한 취지가 희석될까 봐 걱정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부정선거 주장자로 알려진 전한길씨도 현장에 나타났다가 "나로 인해 집회 의미가 왜곡될 수 있다"며 스스로 물러섰다. 앞서 일부 언론이 보도한 소지품 검사는 이날 현장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집회를 지탱하는 또 다른 동력은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이었다. 참여자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통로는 스레드·인스타그램 등 2030 세대가 주로 쓰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였다. 처음부터 공식 취재 창구가 없었던 것도 그 연장이었다. 기자들도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했다.

그러나 집회 안에서도 지속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나왔다. 한 참여자는 4·19혁명을 꺼내 들었다. "3월에 시위가 시작돼 한 달 만에 이승만이 하야했는데, 이번 집회는 일주일이 다 돼 가는데 구심점이 없잖아요."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곧 축구 시즌이 시작되잖아요. 남성 청년들의 관심이 분산될 수도 있어요." 집회 주축인 20~30대 남성들이 시즌 개막 이후에도 지금의 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이 안에서도 자신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20~30대만의 동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참여자들 스스로 인정했다. "구심점이 생기거나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지금 이 흐름을 끌고 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번 주말이 이 집회의 진짜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말이 현장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였다.

9일 자정 올림픽공원역에 모인 집회 참가자들. 오전 1시가 가까운 시각임에도 재선거를 촉구하는 구호를 연호했다. ⓒ시사저널 이태준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