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진짜 삶
기쁨 못 느낀다면 더 나을까
여행 중 읽은 책이 던진 질문
감당 못할 슬픔 존재하지만
삶이란 기쁨도 사랑도 선물

나는 이 글을 광주에서 쓰고 있다. 어제 도착했고, 오늘 돌아간다(아쉽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어제는 적잖이 당황했다. 가고자 했던 곳이 다 휴무였다. 그래도 5·18 국립민주묘지에는 갈 수 있었다.
묘지를 둘러본 후, 휴게실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책을 읽었다. 나는 여행을 갈 때 항상 종이책을 챙기는데, 이번에는 캐나다에서 임상심리학자로 활동한 캐서린 길디너의 '생존자들'을 가지고 왔다. 이 책에는 길디너 박사가 만난 내담자 네 명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제 민주묘지에서 읽은 부분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크리크족 출신의 남자, 대니에 대한 이야기다. 트럭 회사에서 근무 중인 그는 딸과 아내를 사고로 잃었음에도, "전혀 슬퍼하는 사람 같지 않아" 보인다. 알고 보니 그는 캐나다가 시행했던 강제동화정책의 피해자였다. 어릴 적에 그와 누나는 억지로 기숙학교에 끌려갔고, 크리크족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 당했으며 너무나, 정말로 너무나 끔찍한 폭력에 줄곧 노출되었다. 그는 너무 큰 고통을 받은 탓에 감정을 느끼는 부분을 완전히 차단해버린 후 "냉동인간"이 되었다. 그는 말한다. "기쁨을 못 느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길디너 박사는 이렇게 썼다. "기쁨은 슬픔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지만…기뻐할 줄 아는 능력을 복원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였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게 과연 이득일까? 기쁨을 느끼는 대신 고통도 느끼게 되는 삶과 고통을 느끼지 않는 대신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삶. 그 둘 중 무엇이 더 이득일까?
문득, 작년 여름 뉴욕 여행 때 봤던 레슬리로먼 뮤지엄 오브 아트(Leslie-Lohman Museum of Art)의 'every one is real, I am a thousand different people(모두 다 진짜야, 나는 천 명의 다른 사람이야)' 전시가 떠올랐다. 거기에는 '파충류 인간'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의 인간들로부터 받은 폭력과 고통 때문에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증오하게 되었다. "나는 인간으로서 죽고 싶지 않아요." 그는 파충류가 되는 걸 선택한다. 이를 날카롭게 갈았고, 귀를 절개했으며, 머리 위에는 뾰족한 뿔을 달았다. 얼굴과 몸엔 파충류의 비늘을 문신으로 그려 넣었으며 손가락 사이를 봉합했다. 그 여행 이후 나는 종종 파충류 인간을 떠올리곤 했다. 그의 겉모습이나 그가 드러낸 인간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의 이유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새벽의 주차장에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준 노파를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게 너무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나는 그 부분을 떠올리며 파충류 인간이 간직하고 싶은 '진짜-삶'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곤 했지만, 이상하리만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5·18 국립민주묘지에 앉아서, 국가의 폭력 때문에 그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 된 원주민 남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 파충류 남자가 온몸과 온 인생을 던져 보여주고 싶었던 게 인간에 대한 증오심만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갖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그걸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생존자들'의 대니는 뒤늦게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적합한 감정을 찾아간다. 거기에는 당연히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분노, 후회와 실망감이 있지만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기쁨과 사랑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책을 덮고, 바깥으로 걸어나오며 이 단어를 중얼거렸다. 진짜 삶.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의 이 마음을 잊지 말아야지. 나는 뒤돌아 한 번 더 묘역 쪽을 바라본 후, 버스 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손보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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