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프>와 슬기로운 언어생활 [조직문화탐사기]

<호프> @PlusM

*본 글은 영화 <호프>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군생활을 떠올리면 몸의 고단함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언어의 고단함이다. 훈련과 작업으로 쌓이는 육체적 피로야 하룻밤 자고 나면 얼마간 회복되었지만, 하루 종일 귀로 흘러 들어오는 말들의 피로는 좀처럼 씻기지 않았다. 조사와 어미를 제외하면 거의 욕으로 점철된 말들. 그 언어의 환경 속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내는 일은, 지금 돌아보아도 꽤 고역이었다.

그 시절 이후로 나에게는 하나의 믿음이 생겼다.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나의 일상을 채울 것인가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는 믿음이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생각을 빚는 틀이기도 해서, 우리가 매일 쓰고 듣는 말들은 사고의 폭과 깊이를 상당 부분 결정한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오래된 문장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빈약한 언어 속에서 풍요로운 사유가 자라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그 시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영화 <호프>를 보면서, 이 오래된 믿음이 다시 살아났다.


괴물에서 외계인으로, 그리고 고등한 존재로

영화 속 생명체는 크게 둘로 나뉜다. 인간, 그리고 감독이 창조해낸 크리처. 이 둘은 영화 내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흥미로운 것은 이 크리처를 부르는 이름이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달라진다는 점이다. 초반의 크리처는 공포의 대상인 '괴물'로 비춰진다. 중반을 지나며 그것은 '외계인'이라 불린다. 그리고 종반에 이르면, 인간보다 우월한 '고등한 존재'로 조명된다.

같은 존재가 괴물에서 외계인으로, 외계인에서 고등한 존재로 옮겨 간다. 영화를 보며 나는 하나의 질문을 품게 되었다. 어디서 그 차이가 오는 것일까.

<호프> @PlusM

감탄사가 되어버린 비속어

영화 속 인물들은 '씨X'라는 비속어를 연발한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무려 180회 넘게 등장한다고 한다. 불안, 초조, 두려움, 긴장.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감정들이 밀려올 때마다 인물들의 입에서는 같은 단어가 튀어나온다. 감독은 그것이 감정을 담아내는 감탄사처럼 쓰였다고 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어찌할지 모르는 인간의 연약함을 담아내는 단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정제된 언어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마음에 걸린 것은 그 단어의 등장 횟수가 아니라, 그 단어들 사이의 공백이었다. 인물들의 혼잣말에서도, 인물들 사이의 대화에서도, 깊이 있는 언어를 찾아보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영화 속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대부분 즉각적인 감정의 표출이거나 생존을 위한 외침이었다.


조르와 마베이요의 대화

반면에 영화 말미, '조르'와 '마베이요'가 나누는 대화는 전혀 다른 결의 언어였다. 거시적이고 의미심장한 그 대화를 듣고 있다 보면, 영화 속 인간들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던 품격을 마주하게 된다. 눈앞의 공포에 붙들린 언어와, 시간과 존재를 멀리서 조망하는 언어. 두 언어 사이의 거리는, 두 존재 사이의 거리이기도 했다.

그 순간 앞선 질문의 답 하나가 떠올랐다. 괴물과 고등한 존재를 가른 것은 외형도 힘도 아니었다. 적어도 관객인 나에게 그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상당 부분 언어였다. 우리는 어떤 존재가 쓰는 언어를 듣고서야, 그 존재를 무엇이라 부를지 정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호프> @PlusM

빈약한 언어만으로는

물론 영화 <호프>를 언어라는 관점 하나만으로 풀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층위가 겹겹이 쌓여 있다. 그럼에도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두 존재의 언어를 나란히 보면서, 뭔가 눈이 확 뜨이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말의 뜻을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축약된 표현과, 기원을 알기 어려운 밈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간다. 빠르고 가볍고 재치 있는 언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 언어들이 모두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런 세상에서도, 아니 그런 세상이기에 더욱, 적확하고 깊이 있는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이유를 영화를 보며 좀 더 알 것만 같았다.

존재는 언어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빈약한 언어만으로는 좀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어렵다고, 나는 믿는다.
그 시절의 병영에서 꽤 멀리 걸어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전히 어떤 언어 환경 속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나의 하루를 채운 단어와 문장들은 어떤 것들이었나. 슬기로운 언어생활은, 아마 그 질문에서 시작될 것이다.


* 글쓴이 : 인생여행자 정연
이십 년간 자동차회사에서 HR 매니저로 일해오면서 조직과 사람, 일과 문화, 성과와 성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몸으로 답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층처럼 쌓아두었던 고민의 시간을 글로 담아, H그룹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칼럼을 쓰기도 했다. 11년차 요가수련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을 인생여행자라고 부르며, 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는다. 현재는 H그룹 미래경영연구센터에서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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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차 HR 매니저, 11년차 요가수련자, 16년차 아빠로 살아갑니다. 일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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