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년 전 비밀 잔뜩 쏟아진 동굴, 일본의 석굴암 경성 이전 계획

지금으로부터 116년 전 어느 날, 우체부 김모 씨는 우편 배달을 위해 토함산 동산령을 넘다가 묘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능, 즉 무덤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해 가까이 다가갔더니 입구에는 문이 있었고 천정은 무너져 내렸으며 그 안은 흙으로 가득 차 있었죠. 심지어 흙 속에는 석불들이 대량으로 묻혀있기도 했는데요.

그는 배달을 마치고 경주로 돌아와 일본인 우체국장 모리 바스케에게 해당 사실을 전했고, 이 말을 들은 모리는 당시 경주 군수와 일본인 두 명과 함께 현장 답사를 떠납니다. 751년경 완공된 석굴암이 쥐도 새도 모르게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다시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 이는 돌로 만든 부처를 모셨기 때문인데요. 현재 국보 제24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석불사는 김대성 개인이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지었지만 경덕왕의 원찰로서, 또 나라를 지키려는 국찰로서 경영됐습니다.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인공석굴 구조에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정교한 계산 속에 배치된 아름다운 불상들은 완벽한 불국토를 연출하며, 종교성과 예술성에서 우리 조상이 남긴 가장 탁월한 작품이자 전 세계의 종교 예술사에서도 빛나는 유산인데요.

그런데 현대인들이 아닌 누가 보더라도 그 가치는 뛰어나 보였는지, 일제강점기에 특히 일본인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민예 운동과 야나기 무네요시는 "석굴암은 동양 문화가 최고조였을 때 그 영기를 살린 신라인들이 만든 영원한 걸작"이라고 평가했고, 나카무라 료헤이는 "신라 예술의 정수이자, 조선만이 아닌 모든 지상 미의 전당"이라 극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회화집장성', '조선탑파의 연구', 한국미술문화사논총' 등을 저술한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인도를 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한다던 영국처럼 우리에게는 석굴암이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위대한 유물이기에 이를 탐하고, 이를 소유하려는 이들이 생기게 되는데요. 석굴암이 다시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고 3년 뒤인 1910년 6월, 경주군청 서기로 부임한 일본인 기무라 시즈오는 관찰사로부터 내려온 명령을 받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상부는 "불국사의 주조불과 석굴암 전체를 경성으로 운반하라"고 명령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절, 그것도 석굴암 전체를 통째로 옮기라는 것은 지금 들어도 황당무계한 명령인데, 이는 기무라 시즈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924년, 그는 '조선에서 늙어가며'라는 책에서 "엄명이었다. '불국사의 불조불과 석굴불 전체를 경성으로 수송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즉각 운송 계산서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경주 군수 등은 복종하는 태도였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야말로 폭명이었다. 나는 반감이 솟구쳤다."

"원래 이런 유적 유물이라는 것은 그 토지에 정착해 있어야만 역사적 증빙이 되고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를 다른 곳에 옮기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며 관리로서 사리를 모르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이에 맹종해서는 안 된다 생각하여 회답하지 않고 묵살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나의 명령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서 중지된 것은 지금에 이르러서 흐뭇하게 생각한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한일합병 전후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됐던 석굴암의 경성 이전 계획은 상당히 진지했습니다. 석굴암 관할 장기 군청의 구체적인 이전 지령이 하달됐으니까요. 장기 군청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석굴암을 해체해 운반하려면 표고 561m 산 꼭대기에서 감포항까지 16km에 이르는 대형 도로공사가 필요했으니까요.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무슨 재주로 높이 3.4m에 이르는 거대한 석상과 부재들을 산길을 통해 완벽하게 운반하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견적조차 내지 못한 채 쩔쩔맸죠.

이런 어이없는 명령을 내린 이는 한일합병 직전, 조선의 제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악명 높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조선 총독이 있었죠.

왜 일본이 아니라 경성이었을까요? 여기엔 시커먼 속내가 있습니다.

아라키 준 경북대 인물학술원 연구원이 2020년 1월 '문화재'에 발표한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삼릉계 약사여래좌상 반출 경위에 대한 고찰'에 의하면 석굴암 경성 이전 계획은 식민 이데올로기인 '일선동조론'과 '조선정체성론'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해체하고, 그 한복판에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석굴암을 안치시킴으로써 일본제국에 의해 무너진 유교 중심의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동시에 조선이 일본과 뿌리를 같이 했던 고대로 회귀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는, 즉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시각적으로 선언하려는 기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상이 무산되자, 석굴암 본존불 대신에 경성으로 반출된 것이 다름 아닌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이었죠. 물론 실행되지는 않았으나, 석굴암이 이전된다는 소식을 접한 경주 주민들의 반대는 대단했습니다. 1912년 10월 30일자 매일신보는 "경주에 있는 신라 고도의 다보탑과 석굴암의 불적 등을 총독부에서 경성으로 이관한다는 유설이 전해져 경주 지방의 조선인 등은 크게 떠들고 있다고 한다"고 보도하기도 했죠.

결국 석굴암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경성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은 기술적, 재정적 어려움과 경주 주민들의 반대 여론까지 겹쳐 다행히 무산됐습니다.

이렇게 마무리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당시 일제의 심보는 그리 쉽게 꺾일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 바로 뒤에는 십일면관음보설상이 있습니다. 동양에 있는 관음보살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보살상이죠. 이 상만을 가지고도 불교 예술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이름 모를 신라 석공이 온 혼을 기울여 만든 정교하면서도 멋진 보살상인데요.

원래 이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는 아름다운 5층 대리석 소탑이 있었습니다. 일제시대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모로가 데루오가 쓴 '경주의 신라시대 유적에 대하여'라는 글에는 이와 관련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석굴암 십일면관음상 앞에 아름다운 대리석 소탑이 있었는데, 메이지 41년에 매우 고귀한 모 고관이 순시한 후 행방을 감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그지없다"라고 말이죠. 여기에서 모로가가 말한 '모 고관'은 소네 아라스케 통감을 말합니다.

일본 민예 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도 1919년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목격자의 술회를 빌면 십일면관음 앞에 작고 우수한 오층석탑 하나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소네 통감이 가져갔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며 소네를 유력한 절도 용의자로 꼽았습니다.

1967년 한국에서 발간된 '석굴암 수리공사 보고서'에도 대리석 5층탑을 일본으로 가져간 것은 소네 통감이라고 쓰여 있으나, 아직도 5층 소탑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역사학자 이홍직은 이를 두고 "불국사와 석굴암의 보물마저 송두리째 일본으로 옮겨가려고 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1906년 일본의 국내 대신인 다나카 미쓰아키는 높이 13m가 넘는 거대한 경천사 10층 석탑을 해체해 인천에서 배에 실어 반출한 기록도 있으니까요. 당시 일제에게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석굴암에서 사라진 것은 5층 소탑 뿐만은 아닙니다. 석굴암 내에 안치된 작은 불상 2점과 불국사 다보탑 사자 3구 등도 감쪽같이 사라졌죠. 1910년부터 경주군 주임 서기였던 기무라 시즈오는 '조선에서 늙으며'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내 마지막 소원이 있다. 도아들에 의해 환금되어 일본으로 반출된 석굴암 불상 2구와 다보탑 사자 3구 그리고 석조사리탑 등 귀중물이 반환되어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다"라고 말이죠. 같은 일본인조차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며, 우리 유물이 본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랐던 겁니다.

지금도 일본 어딘가에서 우리의 유물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쓰라리기만 합니다. 시대가 흐르고 흘러 한류가 전 세계 만방에 퍼지면서 우리의 역사, 전통, 문화 역시 함께 주목받고 있습니다. 문화유산 역시 하나의 산업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고 있죠. 이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우리가 빼앗기고 잃어버린 유산을 되찾는 것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유산을 보호하고 더욱 빛나게 보존하는 것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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